제 표현이 완전치 못했네요. 우리의 기억, 또는 생각이 그 안에 望과 忘의 부분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를 말한 것이었어요. 촌촌님이 望에 대한 이야기를 하셔서, 나는 그 대비되는 忘을 말한 것이었지만, '忘은 없고 望만 있는 상태'란, 정확히는, '忘을 의식함이 없이 望만 있는 상태'를 말한 것이었지요. 望은 의식하면서도 忘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忘은 개인이나 사회의 의식 밑에 '깔려 있어서' (embeded ), 일부러 분석해내지 않고는 잘 드러나지 않는 삶의 방식, 또는 문화라고 할 수 있지요. 넓은 의미로서의 무의식, 잠재의식이라고 할, 우리 영혼의 밑바닥 같은 것.
, 그러니까, 촌촌님이 언급하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기억하고, 거기서 비롯되는 생각만 하고 있는 마음의 상태는 적어도 그러고 있는 순간에는 닫힌 마음의 상태라고 할까,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밑에 깔려 있고 잊혀저 있는 忘 부분과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고 있는 望의 상태인 것이지요. 반면에, 열린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면, 알게 모르게, 내 기억이나 생각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전제하고 있고, 그것은 다른 것들을 잊어버리고 있을 수 있어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논리적, 사실적 가능성)을 열어 두는, 즉, 忘을 염두에 두는 望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 望이란 말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기억과 생각들을 뜻한다고 말하기 어렵겠지만, 저 忘(을 의식하는 상태)이라는 말과 대비시켜 놓고 볼 때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으니 , 일단, 그렇게 규정해 놓고 계속 갈게요. ㅎ그렇게 갇힌 마음의 상태가 지속되다 보면, 결국, 모든 기억과 생각들이 다른 것들과의 논리적, 사실적 관계가 확인되지 못하고 단편적인 정보적 차원의 지식으로만 머문 채로 입력, 저장된 지식들이 마음속에 혼재하는 카오스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그게 결국, 우리 영혼의 亡의 상태가 아닌가 하는 말까지 했지요.ㅎ
뭐, 설마, 사람은 어쨌거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고 회복하려는 욕구가 있어서, 어떻게 해서든, 그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피해 보려고 하겠지요. 촌촌님이 읽으셧다는 그 책에서처럼, 우리의 뇌는 그런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서, 종교의 힘을 빌어서라도, 자기통합성을 이루려고 하겠지요. 사회도 마찬가지고...인격통합이니, 사회통합이니, 융합적 지식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望들 사이 사이를 연결하는 논리적 사실적 忘의 고리들을 찾아내어 드러냄으로써 쪼가리 쪼가리 제각각인 마음의 구석들을 소통시켜 개인의 마음, 또는 사회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 네트워크, 網의 상태로 가져 가지게 하자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지요. 하나의 望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望들이 유기적인 관계로 기능하는 생명력 있는 통합체, 바로 다가치적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유토피아라고 하겠지요.
종교뿐 아니라, 과학과 철학까지도 뇌의 그런 스트레스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려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도 동의해요. 과학적으로 그것이 검증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인가와는 상관없이, 어떤 오묘한 인간의 마음도 다 '뇌'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대선에서의 5, 60대 주류가 원했던 것도 그런 기본적인 안정욕구였다는 것에도. 그래서, 진보들이, 안정욕구는 인간욕구의 단계 중에서도 매우 낮은 욕구라는 것에 비추어, 비계몽적 의식이라고 비하만 하고 그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 줄 대안은 충분히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 잘못이었다는 말에 대해서도 다 동감해요. . 그래서, 그들에게 자꾸 세금 더 내야 한다고 욱박지르기만 해서 불안을 가중시키기만 한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은 없었을까, 나도 아쉽더군요. 덧붙이자면, 내가 너무 많이 가졌음을 의식하며 스스로 내놓을 수 있는 기부재단을 많이 만들도록 지원하겠다는 등의 자발적 기부문화를 일으키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까, 부정적인 비난보다는 더 높은 인간욕구를 충족시키고, 선진적인 사회로 가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시키는 유인체계, reinforcer를 제시해줄 수 없었을까, 저 유토피아에 대한 로망을 실어 보여줄 수는 없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문재인과 안철수의 단일화 토론에서도 느꼈지만, 진보들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하달까, 너무 직선적이고 목적지향적 성격 경향이 있어요. 문재인은 정권교체를 위한다면 단일화밖에 없지 않느냐고 , 안철수를 계속 몰아부치고 다그쳤지요. 민주주의를 그 과정보다도 목적으로만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박근혜가 더하였지만, 암튼, 보수든 진보든, 각자의 望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忘의 고리들을 찾아내어 분석하는 토론의 문화에는 서툴렀어요. 자신의 望을 결론으로서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사실적 논리적 근거를 깊이 다루며 토론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의식이 없는 것이지요. 결론이야,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결과일 뿐인데도 , 우리들의 댓글놀이도 아니고, 그 심각한 토론장조차, 望만 내걸고, 치고 빠지는 말솜씨나 잘 발휘하면 되는 곳으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보기엔, 민주주의는 괜히 그렇게 '깐죽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배가 산으로 갈 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고, 또 이 족 사람들이 보기엔, 그런 빽빽 주장만 하는 사람들에게 휘둘리다가는 민주주의가 독재로 갈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는 거겠지요. 불안이 커질수록 더 극단적 대치와 결집으로 달려 가고...ㅠ
암튼, 경제민주화, 어떻게 하면 다 함께 잘 먹고 잘 사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젠, 통합성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국민 모두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을 나누고 소통할 것인가의 문제에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소외와 갈등, 혼돈과 분열의 문제가 극복될 수 없지요. 자살율이 높은 것은 경제문제만이 아니잖아요.암튼, 박근혜는 이제, "다뜻한 성장'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정말, 국민 마음 밑에 깔려 있는 忘까지 잘 읽고 건져 올려서 또 저 望들만 들끓는 카오스로 가지 않게 해주기만 하면 좋겠네요. 종국적으로는, 보편적 인간애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게 하는 '따뜻한 정치'를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교육분야에 관한 한, 세금정책을 비롯한 경제정책이나 정치적 조치에 의해 직접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더디더라도, 교육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실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교육이 정치의 시녀가 아니라, 정치가 교육의 하인이 되어야지요. 선행학습이니, 무상급식이니, 학교폭력과 청소년 자살문제니 하는 온갖 문제들을, 교권과 학습권이 보장되는 학교 내어서, 교육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자성적 탐구가 지속되는 중에 그 해결책을 스스로 찾아내는 사회, 성찰하는 사회, 이것이 진짜 선진사회로 가는 길이지요.. 그런 성찰하는 학교에서 성찰하는 학생들이 키워질 테니까요.
정치 이야기를 길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다 보니, 교육 이야기까지 늘어졌네요. ㅎ 암튼, 저 望과 忘 이야기로 돌아가서, 望을 마치 뇌세포라고 한다면, 忘은 그 세포가 잊고 있지만, 사실은 그 덕에 살아 숨쉴 수 있는 혈관이나 신경끈들이라고 생각해요. 사실적인 비유가 다 그렇듯이, 신경이나 핏줄도 관찰가능한 대상들이어서, 저 비유는 또 문제가 있지만, 그런 난점에도 불구하고, 望과 忘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지요. 望들 그 자체뿐 아니라, 다른 望들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방법이 과학과 철학으로 대변되는 관찰과 성찰의 방법들이겠지요. 과학과 철학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지난 연말, 양평모임에서도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해서 나도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세상에 대한 앎도 그렇듯, 자신에 대한 앎에도 대개 그런 두 가지 접근법이 있지요. 사실적 관찰을 통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설명 vs. 논리적 분석의 방법 그런데,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대개,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는 식으로, 자신의 望에 대한 주장과 설명은 곧잘 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望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다른 의미로는 볼 수 없는가, 왜 그런가, 그 이유들을 타당하게 증명하는 논리적 분석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외면적으로는 동일한 어떤 행위도 그 내면의 이유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다 안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철학적 성찰이 없이 과학적 설명만으로는 인간을 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해지지요..
한 개인이든 사회든, 望만 많은 상태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온갖 관찰들과 그에 따른 언표는 많은데, So What?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지식들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 안에서 의미화되지 못한 채, 낱낱의 단편적 지식 쪼가리들로만 뇌리를 떠돌면서, 순간마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지식들과 만나고 부딪치면서, '나는 이런 사람인데 왜 그러느냐,' 소리치지만, So What? 여전히, 그 밑에 깔려 있고 그 사이를 메꾸는 저 忘에 대한 탐색과 합의가 없으면, 소외와 단절의 문제는 극복될 수가 없지요. 결국, 보이지 않는 내면적 이유들에 대한 성찰, 철학은 평생 동안 계속해도 끝나지 않는 천형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어떤 다른 동물도 해낼 수 없은 인간적인 축복이 될 수도 있게 되는 것은 그가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성찰을 즐기면서, 그 자체로서 보답을 받게 될 때뿐이지요. 자주 말하지만, 알고 보면, 화학과 철학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어서, 과학적 가설 자체가 맨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머릿속 성찰, 통찰에서 나오고, 과학은 그 통찰, insight가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런가를 검증해 보는 것에 불과한데도, 사람들은 단순히, 온갖 '과학적' 가설들에 대한 검증, 관찰로만 끝내면서, 또 여전히, So What? 우리 마음의 비가시적 영역의 신비는 풀지 못한 채 영원히 묻고 말거나, 제3자인 관찰자의 잣대에 의한 임의적인 해석에 자신을 맡겨 버리기도 하지요. 남이 풀어 주는 점괘나 사주에 의존하는 것도 타자적인 이해라는 점에서 그 비숫한 경우라고 생각해요.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그런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는 눈이 깊어져야 하는데, .望만 많아지는 것은 뇌의 퇴화에도 기인하겠지요. 그런데, 그것은 조만간에 불안증도 불러 오지요. 불안증도 뇌기능의 문제라고도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잊고 있을 수 있는지, 자신의 한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과 함께 성찰을 계속하는데 대한 스트레스를 회피하기 위해, 짐짓, 아무 의심도 없는 듯, 꼰대가 되어 보기도 하지만,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그 유령같은 望들에게 휘둘리는 와중에서 더욱 스트레스를 받고, 또한 그러고 있는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니 더욱 불안해지고, 그걸 또 피해 보려고 변덕을 부려도 보지만, 그럴수록 불안은 더욱 가중되는 악순환이 되지요. .스트레스는 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면도전하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이 경우에 특히 필요한 것이지요. 자신의 기억과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 꼰대를 아망이 센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한자는 좀 이상하지만, 혹시, 我忘? 자신의 생각이 어떤 한계가 있는지를 의심하기를 잊어버리고 그 안에 스스로 갇히고, 남도 가두려는 고집. 나도 때로, 그러고 있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아망 버리기만이 내 남은 삶의 과제'라는 고집 아닌 고집이라도 부리겠다고 쓴 적도 있지만, 그 생각마저 잊어 버리곤 하지요. .그래도 아망보다는 忘이 나은가요?ㅎ 오, 남는 건 오직, 忘...오로지, 忘뿐이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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