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그런 천박한 소리를 내고 있어? 지휘자의 이 말 한 마디에 게이지는 왜 클래식을 떠나고 말았을까? 노마드님 말씀 그대로, 그것은 그렇게 자인한 그 자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 천박성'이 게이지의 전부였을까? 소위, 절대로 변하지 않을 본질 같은 것 ?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래서, '천성'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 우리에게 그렇게 절대로 변하지 않는 그런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것보다는, 그만큼 변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 아닐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본질'이라는 것을 누가 무엇으로 파악하는가 하는 것이리라. 심리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교사나 부모형제, 혹은 그 자신의 판단이 아무리 확고하다고 해도, 정말, 그 '본질'이 진짜 그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 기술자가 될래? 음악을 할래? ' 노마드님이 반성하신다는 그 말에 그 아이가 눈물을 떨구었다지만, 그 아이는 정말,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같은 말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고 반응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 역시, '본질적인 차이'라면 차이이고, 살면서 습득되어 온 아이 나름의 경험의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가 그 때 실제로, 음악을 연주한다기보다 기술을 발휘하고 있었는가의 사실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그것을 정말 변하기 어려운 자신의 '본질적인 한계'로 받아 들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
사실, 노마드님의 그 말은 모든 교사들이 매일처럼 하고 있는 말의 한 변주곡일 뿐이다. '연주란 콩나물 숫자만 세면 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음악에 네 영혼을 불어 넣어라...' 이런 류의 말은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말이 아니던가? 그런 야단을 들어도, 그것을 불변하는 자신의 본질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만이 그 길을 끝까지 갈 수가 있을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 어떻거나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결핍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려는 의지와 자존감이다. . 거꾸로, 연주기술은 아직 너무 빈약하면서, 노래부터 부르고자 덤비는 아이에게 교사는 어떤 말을 하겠는가?
물론, 교사는 그런 심한 말을 하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학생의 재능과 학습능력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그 학생에게 전달한다. 영혼이 아직 여릴 때, 교사의 말은 치명적일 수 있다. 여린 영혼들은 외부의 모든 자극에 온마음을 다하여 반응하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다. 교사가 한 인생의 길을 좌우하기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훌륭한 교사는 가지고 있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의 전달방식이 그가 파악하고 있는 학습자의 '본질' 혹은 자질과 어떤 역동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는지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조절해 나가는 사람이다.
지휘자는 교사도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게이지는 그 지휘자와 함께 클래식도 버렸다. 운명의 선택...그 지휘자가 그 '천박함'을 그의 본질로 규정한 것이라고 해도, 그가 여전히 음악에 대한 열정과 함께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반응은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그는 왜 스스로 , 그 '천박함'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 기울이지 않았을까? 중앙 오케스트라에서 자기만큼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자부심도 그는 가지고 있었고, 세츠꼬가 결혼했었다는 그 잘즈부르크의 챌리스트는 게이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말에서도 그렇지만, 고다니는 게이지의 탤런트를 충분히 높이 사고 있었는데도, 그는 왜 협연을 제의하는 고다니가 순전히,그 여동생이 사랑했던 친구라서 그러는 것으로만 치부하며 냉소하며, 자신의 '천박성'을 끝까지 둘러쓰고 그 제의를 거부하였을까?
표면상의 이유가 있었다면, 고다니도, 오케스트라가 돈이 많으면 그 소리도 좋아진다는 말도 했지만, 음악은 돈이 많아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것 때문에 순수한 클래식을 계속할 수가 없었고 천박성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졸부였던 부모가 그 부를 과시하기 위해 그에게 음악을 시켰다고도 하고, 내내,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끌렸고, 집이 망해서 업라이트 중고 피아노로 바꾸어야 했을 때, 그 때 음악을 관두었어야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는 정말, 그런 것들이 그가 주장하고 있는 자신의 음악의 천박성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마음만 먹으면 그는 지금도, 쇼팽을 아쉬케나지처럼 칠 수도 있지 않았던가? 환경이 그의 '본질'을 '천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똑같은 논리로, 그 '본질'은 지금 그가 다시 붙잡기만 하면 되는 이 기회로 인해 되돌려질 수도 있어야 한다. 고다니의 말대로, 그가 뜻만 있었다면, 십년 만에, 컴백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고다니가 아니라, 게이지가 아닌가?
진짜 음악은 어디서 나오는가? 영혼에서 나온다. 하기야, 요즘 세상에, 예술뿐 아니라, 돈이 받쳐 주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도 그것으로 다 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빈부를 떠나서, '천부적 재질'이 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그 영혼이 천박하면 음악도 천박할 수 밖에 없다. 이중섭이나 고흐를 예로 들지 않아도, 가난 속에서도, 가짜가 아닌, 그 영혼이 깊고 빛나는 예술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영혼을 깨운다. 돈으로 영혼을 번쩍거리게 할 수는 있어도,성숙시킬 수는 없다.
게이지는 십년을 부정적인 자아개념에 스스로 가두어 온 자신의 영혼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학도 자기부정도 더 이상 아니어야 한다. 관심도 없었던 에리가 그에게로 온 그대로를 그냥 받아 들이듯이, 세상이 그에게 주는 그대로를 편안하게 사랑하면서 살겠다는 의지였을까?, 이제는 더 이상, 클래식이고 까페음악이고, 고상하고 천하고의 그 고뇌스러운 자의식조차 버리고 진짜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겟다는 의지였을까?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에, 도마 위에서 칼을 들고, '오른쪽으로 할까, 왼쪽으로 할까? ' 로 끝나는 대목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이 결국, 그의 손가락을 자르고 만다는 의미였다면, 그것은 닥쳐올 야쿠자들의 보복을 미리 끊는다는 의미만으로는 부족하다. 에리와 함께 산다면, 그것으로 그 보복이 마감될 리는 없지 않은가?원전에는, 그 마지막 장면에서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상징하는 듯한 '짜자자 잔'하는 소리가 삽입되어 있고, 어쩌면, 그 마담과 같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마담의 이야기도 더 들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제 까페 음악이고 클래식이고 다 떠난다는 것이고, 스타더스트라는 말 그대로, 존재의 의미는 여전히 오리무중, 별먼지 속이다.
천박한 부분이 절대 없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안에도 스타가 있고, 별부스러기가 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고상하고 천한 '본질'들이 세상에서나, 우리 안에서도 끊임없이 그 자리를 바꾸며 운행하고 변화한다. 본인이든, 타인이든, 그 별먼지 속에서 어느 별부스러기 하나를 나의 별로 명명해도 그것은 영 틀린 것은 아니리라. 하지만, 게이지가 분명히, 세츠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였으면서도, 끝내 그 '천박성'이라는 별자리를 자칭하며 살아 왔다가, 이제는 그 모든 잣대마저 다 끊어 버리고, 진짜 자신만의 별을 찾아 살아가겠다는 의지로, 자신만의 지휘봉을 휘두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삶의 반전을 기대하게 한다. 그러나, 그 별 역시,별먼지 속이 아닐까? 명료하게, 그 존재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슬프다.
고교시절, 600평의 대저택에 살면서 매주 비행기를 타고 서울의 유명 교수에게 렛슨을 받으러 다니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의 음악이 어떠했는지를 평할 능력은 내게 없었고, 단지 그 호화로운 집안 풍경과 스타인웨이 피아노와, 병약했지만 천사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와 더불어 그녀의 쇼팽 즉흥곡은 겨우 소나티네를 띵똥거리는 내겐 정말 무조건 황홀경이었다. 우아한 자태의 그 엄마는 늘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모든 스케쥴을 관리했다. 전국 피아노 콩쿨에서 몇 번 일등도 하더니, 서울예고로 전학을 갔던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60년대말, 입시발표가 막 난 명동거리에서였다. 어찌 된 일인지, 서울음대에 낙방했다던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매우 슬퍼 보였다. 그 겨울 이후, 그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녀는 지금도 어디선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까?
며칠 전, 일본으로 애니메이션 공부하러 떠나는 스무살 짜리 조카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재능을 칭찬하는 말들에 너 자신을 매달지 말아라. 그러다가, 혹시, 너의 재능을 형편없이 보는 어떤 일을 당하면 너무 심하게 흔들리고 떨어지게 된다. 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 보고 사랑하면서, 어떤 외부의 자극도 네 영혼을 키우는 방향으로 받아 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 든든히 뿌리를 내리는 나무처럼 되어야 해.....예, 알고 있어요. 칭찬에 연연하지 않을 거예요...조카는 기특하게도, 깊은 좌절과 절망의 터널을 지날 각오까지 미리 하고 있었다. 칭찬만 듣는 것도 우리의 자유로운 영혼에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가?
'주방에서 말성을 부린 녀석의 최후'
어디서 가져온 사진인지,
나는 또 태오에비의 페북에서 가져 왔어요...
저 게이지가 지금 저러고 살 것 같아서...ㅎㅎ
'노을 비낀 숲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오는 날 (0) | 2013.01.11 |
---|---|
望, 그리고 忘... / 촌촌님에게 드리는 답글 (0) | 2013.01.09 |
이 아침 한 잔 차에 (0) | 2012.07.21 |
나의 '노가다 집장사' 이야기 3 (0) | 2012.07.14 |
나의 '노가다 집장사 ' 이야기 2 (0) | 2012.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