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나의 '노가다 집장사' 이야기 3

해선녀 2012. 7. 14. 21:21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참, 기가 막힌다. 이럴 땐, 기도 안 막힌다고 하던가, 옆집은 우리처럼 주택담보 은행대출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3년짜리 적금상환식 대출금 3천만원을 2년 반쯤 갚다가, 악기값 때문에 다시 조금 더 대출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 남편도 모르는 그녀의 빚이 이미 1억을 넘은 상태에서 집을 짓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빚도 늘어 가는 판에, 자신이 빌려다 준 다른 사람의 빚까지 떠안다 보니, 이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약속을 수없이 어기면서 거짓말만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요즘, 고교동창회에 나가면서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그 사람의 중국식당 차리는 자금까지 대어 주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그 친구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그녀에게 돌아갈 분양대금이 이제 얼마 남았느냐 하는 것과, 그 분양대금 일자를 놓치지 않고 자기 돈 3천만원을 먼저 받아갈 수 있도록 분양대금 입금일들을 알려 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나는 다른 빚쟁이들은 잘 모르는 상태였고, 그 친구는 한 골목이라, 그녀와 함께 오가면서 서로 알고 지낸 사이었다. 그녀는  종합고등학교를 나온 시골 유지의 딸로, 그 친구에 의하면, ,남편이 중동의 건설현장에 나가서 벌어 보낸 그 많은 돈을 물쓰듯 쓰면서부터 그리 되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우리 현장의 돌사장과 도배사장과도 이미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거다. 그들은 동네에서 춤꾼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들에게도 돈을 꾸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는 그 돌사장이 그녀를 통해 나에게도  돈을 빌려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몇 번 그녀가 그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는 눈치였지만, 오빠네 공사 관계로 그러는 것이려니 했엇다.

 

나는 그녀를 앞에 앉혀 놓고, 내가 당신의 빚규모를 다 알래야 알 수도 없지만, 더 이상 당신에게 분양대금을 가져 가게 해서 투자차액을 늘리지 않겠고, 될수록 빨리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산하겠다. 그 때까지, 그 동창생 남자와의  관계를 끊고, 일에  충실하지 않으면, 당신 남편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펑펑 울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부정도 하였다가,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것이라는 소리도 하였다가, 횡설수설하였지만, 이미 넋이 나간 사람처럼, 대책이 없어 보였다.,  그 때는  심전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였으며, 그 땅의 주인이 자신의 다른 땅이었던 이 미전의 땅도 매우 유리한 지불조건으로 우리에게 주어서,  이미 공사에 들어가 있는 때였다.  이 땅은  심전과는 대각선으로 붙어 있는,  바로 한 블럭 아래의 땅이었지만, 작은 평수의 연립주택이 그 골목의 코너이자 바로 옆땅에 들어 있어서 소위, 맨션이라고 불리는 큰 평수를 지을 분위기는 아니기도 했지만, 투자비 차액이 이미 1억 7천을 넘고 있어서, '심전맨션의 동생, 미전 빌라'라는 컨셉트 정도로 하나 더 나가는 것이 적당해 보였었다.  

 

나도  공사대금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빌려 쓰고는 있었다. 공사와 분양이 늘 병행되고 있다 보니, 이자는 은행보다 훨씬 비싼 월 2부 였지만, 수시로 들고 나는 자금은 그게 편리했다. 사실, 그 즈음엔, 자금도 거의 나 혼자서, 일도 거의 나 혼자서 추스려 나가다시피 하는 상황이었지만, 미전 분양까지는 그래도, 제대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터였는데, 그러나, 사정이 그 정도라면, 미전이 무난히 끝난다고 해도, 그 때까지 저 사람들이 과연, 가져갈 돈이 남기나 할까, 걱정이 되었다. 남편에게도 어쩌다 그녀가 현장 일을 소홀히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그 여자는 사업을 함께 할 사람은 못되는 것 같으니, 어서 빨리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오던 터였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는 그도 이제 대충 짐작은 했겠지만, 상황이 이 정도인 것을 우리는 둘이 다 상상하지도 못했다. . 그러나, 내가 말 안듣고 애먹이는 일꾼 이야기만 해도, 당신은 주택사업을 하는 거야, 자선 사업을 하는 거야? 그런 인간들에겐 딱 부러지게 자를 건 잘라, 제발...이러곤 해서 동업자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는 잘 하지 않고 지내 왔는데, 이젠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시점이 온 게 아닌가?  더 이상 투자 차이를 벌이지 말고, 차근히  이 사업을 정리하는 수 밖에.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느긋하게 처리할 수가 없게, 급박하게 닥쳐 왔다. 그 친구보다 훨씬 더 큰 대형 빚쟁이 아줌마가  어느날 느닷없이, 우리 이름으로 미전 두 세대를 담보로 빌렸다는 1억 짜리 차용증을 들고 와서 미전 분양실을 점거했던 것이다. 상도동에서 왔다는 그 억세게 생긴 아줌마는 그 동안 거짓말만 하는 그녀를 도저히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다며, 좍좍 수돗물을 퍼부으며 머리를 감고 가져온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는, 지금부터 모든 분양대금이 들어올 때마다 돈을 직접 받아 챙기겠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우리가 반반씩 투자해서 동업을 하고 있으니, 분양이 끝나면 모든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이름으로 되어 있던 건축주 명의의 차용증을 써준 것이다. . 우리에겐 아무런 말도 없이, 분양실의 막도장을 훔쳐서...그  두 세대는 이미 분양 계약금과 전세 계약금까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남편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당장, 그 사람과 동업자를 모두 고발 해...라고만 했다.  나는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일생에 남편 말 안들은 건,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녀의 남편이 나에게 무릎을 꿇다시피하면서, 내가 고발하면 마누라는 감방에 들어갈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러지 않고  이 빚을 갚아 주고 다 잘 정산만 해주면 모자라는 돈은 자기가 새로 들어간 회사의 15억짜리 공사가 끝나는 그 해 연말까지 꼭 갚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걸 바로 정산해 주고 연말까지의 이자는 안받을 터이니 꼭 갚아만  달라고 했다.

 

정리를 서둘렀다. 먼저, 대출을 받아 그 빚쟁이에게 고스란히 1억을 갚아 주어 내보내고, 남은 집들을 조금 싼값에 빨리 처분했다. 남은 부동산 하나 (우리가 살고 있던 빌라, 그러니까, 두번 째로 지은  빌라의  어느 한 세대가 40평짜리 작은 집을 우리에게 주고 현금을 좀 보태서 이사들어온 것이 있었다.)도  시세보다 평당 100만원씩을 더 쳐주고도  4천만원이 모자란다. 그녀의 오빠의 집을 담보로 1천만원을 설정하고 3천만원은 공증을 받으러 갔지만, 그 자리에서 2천만원만 공증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바람에 또 그러라고 승락해 주고 말았다. 나중에, 그녀의 오빠로부터는 그 돈을 받았지만, 3천만원은 고스란히 떼였다. 공증서 쪼가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남편 이름으로 된 재산이 아무 것도 없는데...그 때가 93년 4월, 나는 그렇게 그녀와의 3년 동업을 손털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랬다.   정산을 그렇게 후하게 쳐 줄 일도 아니었고, 그녀 때문에 분양을 서둘러 종결할 일도 아니었다. 그 오빠의 집에 그 4천만원이라도 다 설정해 주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 오빠가 거절하면, 그냥 그녀를 사문서 위조와 사기죄로 고발해 버렸으면, 나중에 그 쪽에서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서 가까운 누군가가 어떻게라도 그 빚쟁이와 협상해서 해결하려고 했을 것이고, 그 빚쟁이도 어쩔 수 없이 좀 감액해서라도 받아 갔을 거라고.....알고 보니, 그 빚은 원금은 얼마 안되는, 월 4부의 고리대금이었다. .더구나, 차용증 하나뿐이지, 그 두 세대에 근저당 설정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건축주 명의도 우리 이름으로만  되어 있는데,  우리의 동의서도 인감 증명서도 없이 막도장 하나 도용해서 찍은 차용증에 우리가 무슨 법적인 책임을 질 일이 있는가, 고발만 해놓고 버티면 이기게 되어 있었다...

 

남편은 그런 방법까지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 그대로 햇다면, 결국,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두 집 남편들도 다  엔간히 바보들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미 계약금까지 받아 놓은 두 세대 주인과 그 전세 입주 예정자와의 문제도 그렇고, 그게 얼마나 더 복잡한 사태로까지 갔겠는가? 그 빚쟁이를 무단점거죄로, 바로 옆집이자,  동업자를 사문서 위조와 사기죄로  고발하여 감방에 넣고, 버티기만 잘 하면 우리는 원의도대로 저 좋은 맨션에 살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런 치열한 전투를 치러낼 자신도 없었고, 그런 전투에서 끝까지 승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이 지금 그야말로, 길바닥으로 나앉을 판에, 내가 무엇을 더 건지려고 할 것인가?  내가 할 일은 오직,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너무 믿기만 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더 이상 그 구덕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모든 관계를 원점으로 깨끗이 돌려 놓는 일뿐이었다. 

 

 그 후, 나는 일체 전화도 안했다.  그 한 골목 친구를 비롯해서, 그녀에게 빚을 떼였다는 그녀의 많은 친구들 중에는 그 1억짜리 빚쟁이가 선심쓰듯 얻어 준 1천만원짜리 지하 셋방으로  그녀를 찾아가서 드러눕기도 하면서 그 식구들을 들볶은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 몇 푼 돌려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사실확인은 못했지만, . 그 남편이 들어간 회사마다 부도가 나고 점점 일자리도 떨어져 갔고, 그녀는 그 1억짜리가 가지고 있던 숭실대 부근의 분식집에서 구박을 받으며 설거지도 하고 파출부 일도 하던 끝에, 그 남편이 일하던 어느 회사 사장의 배려로 부산의 산동네, 공동화장실을 스는 아주 험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만 그 친구를 통해서 들었을 뿐.

 

그 친구는 그 후에도 자주 내게 전화해서 혹시, 내가 조금이라도 그녀에게서 돈을 받거나 내통하고 있지 않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 친구도 참 딱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서 월 1부 5리에 빌려온 돈을 그녀에게 2부로 빌려 주는 돈놀이를 하다가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집을 짓기 이전부터 그 골목의 맨안쪽의 작은 연립주택에서 살면서  그녀와 친하게 지내 온 그 친구는 부산에도 여러 번을 갔지만, 그 때마다 겨우 1, 2십만원도 받아 오기 어려웠다면서 분통해 하며 나에게 전화하곤 했다.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다 믿을 수도 없다. 내가 무얼 알겠는가?   딱 한 번, 그녀가 커다란 스텐 김치통을 들고 나를 찾아 와서, 어떤 다른 빚을 갚지 못해도, 내 빚만은 꼭 갚겠노라고 하던 게 종종 생각난다. 그래, 언젠가 형편이 되면 갚아 달라..  빚쟁이들마다에게 그런 소리를  하기도 했을 테지...ㅎ

 

덕분에 나도 큰 빚을 졌다. 우선, 그 동안 손쉽게 들락날락하며  2부 이자로 쓰고 있던 시어머니와  친구들의 빚을 몽땅 은행융자로 돌리고, 그 이자를 갚아 나가다 보니, 몇 년 동안이나 카드 돌려막기를 해야 할 정도로 궁핍해해지고 고통이 컸다. 심지어, 나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시누이의 권유로, 암웨이니 다이네스티니 하는 다단계 물건들도 사 와서 친구들에게 팔아 보려 했지만, 그건 역시 고지식한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사온 물건들을 원가에도 못넘기고 선물로 다 나누어 주고 말았다.그녀에게 후하게 쳐 주었던 그  조그만 집이 하도 안팔려서,  소위 물물교환이라는 것도 세 번이나 거듭해서야, 은행 이자 부담이 없는 맹지 하나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도 우리가 그냥, 대책없이 가지고 있게 된 양평집의 안땅이다.

 

정리 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양평에 재대로 된 땅을 사서 전원주택을 짓고 살려던 계획을  세웠다가 산값의 20프로를 손해 보고 팔아버리기도 했지만, 그 직후에 가지게 된 저 맹지에라도 언젠가는 전원주택을 지을 수 있겠거니, 그 꿈을 버리지는 않은 채로  십여 년이 흘렀다. 그 꿈을 서둘러  다시 실현해 보려고 시도한 것은 2009년 봄, 그의 와병 직후. 그러나, 막상, 우리가 서두르자, 그 땅의 진입로가 될 땅의 소유자는 뱃짱을 부리며 시세의 다섯 배인 6,000만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우리는 마침 절묘하게도 그 땅과 딱 길폭 4미터 남짓만 통하도록 비스듬히 어깨 위로 붙어 있는,  길이 있는 땅, 지금의 양평집 땅을 발견하고 그 주인을 찾아 가서 그것을 샀다. 그 땅은 막 개발해서 팔려고 내어 놓은 땅이었는데, 우리는 그 나즈막한 야산 자락에 수도자처럼 반듯하게 올라 앉아서 앞산인 양자산의 웅자를 겸허히 바라 보고 있는 것같은  그 땅의 모양새에 첫눈에 반해 버렸다. . ㅎ

 

그러니까, 지금의 양평집 Arete는 거기에 이미 허가가 나 있던 창고건물이라도 우선 지어 놓고, 그 겨울을 고구마라도 구워 먹으며 지내다가 그가 은퇴하는 봄이 오면  제대로 된 집을 짓자고,  그가 어린아이처럼 좋아 하며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 몇 번씩 외출복을 갈아 입고 나와서 계약하고  짓기 시작했던 건물이다. 남편은 그러나, 그 지붕도 덮기 전에 떠나 버렸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 특히 세 시누이들은 그 창고는 물론이고 그 땅들을 모두 팔아 버리라고 하나같이 권했다. 그도 없이, 눈도 안보이는 내가 거기서 어떻게 혼자 살겠느냐는  걱정은 누가 봐도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집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가기 바로 전날까지도, 창문 다는 것을 보러 자신이 운전해서 가려고 하다가, 나혼자만이라도 갔다 오라고 제자와 함께 보냈던 그 집, 창문 위치만 잡혀진 그 안에 서서   앞산을 바라 보며 생각에 잠기던 그 모습...나는 거기에 인테리어를 더해서 창고가 아닌, 집으로 마무리를 했다. 

 

사람은누구나, 한 번 든 길에서부터 그 길을 더 이어 가며 살아 간다. 얼핏 보기에는 엉뚱한 길인 것 같아도, 그게 다 그 사람이 원래 오던 길 때문에 생긴 길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길은 아니다. 다만, 사람마다 그 길을 이어 가는 생각과 스타일이 다를 뿐...내가 집장사 길을 어떤 방식으로, 왜  가게 되었고, 왜 그만 두게 되었던지를 그 부분만 잘라서 이야기하려던 것이었는데, 이것 봐라, 나는 왜 또 거기서 양평집으로 이어진 길을 가느라고 또 이리 길어지고 있지? 

 

아무튼, 는 이 양평집 마당끝자락을 길로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 아니,  양평집 땅을 사고 집을 짓게 만든 그 안땅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나도 모른다. 그 양평집도 마찬가지...나의 현재가 영원하리라는 생각은 할 수가 없잖은가? 하지만,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그는 지금 적어도, 그 땅에 나무를 심고 돌보며 그가 원하던 한유의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은 거의 틀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도 이 동네에 이렇게 아지트 하나 만들어 놓고 서울을 드나들 것도...봉천동도 양평도 아닌 영 다른 노선으로 건너 뛸 이유가 아직 보이지 않아서라고 말해야겠지만,  나는 내가 지은 동생네 집에서 세를 살면서, 양평을 오가는 지금이 무조건 좋다.  이걸 푼수짓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누이들도 이젠 더 이상 나를 걱정하기보다 이해하는 듯하다. 어쩌겠는가? 그 오빠나 올캐나, 별종은 별종이었으니...ㅎ 

 

푼수짓...이 글을 써볼 생각을 해서였던가, 며칠 전엔,   그녀가 한들한들 예븐 원피스 차림에 꽃무늬 양산을 들고 동네길을  지나가는 꿈을 꾸었다. 나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그녀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녀는 뒤를 힐끗 쳐다 보고는 모른척 샛길로 총총 사라져 갔다. 꿈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남편도 그 후 내내, 나를 책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와 똑같이,  자기 영역에서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했고, 더 이상 어떻게 나를 도울 수도 없었다.  경제적인 관리는 처음부터 내 몫이었고, 그 또한 나처럼 푼수짓의 대가였으니까...ㅎ

   

그 돌사장은 어느날 싸우나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갔고, 도배사장은 춤바람으로 사귄 여자와 두 살림을 차렸다가 간암으로 죽었다. 모두 이제 돈 꽤나 벌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40대 후반,  너무 젊은 나이였다. 천성이 착하기만 하고 오지랍이 넓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떼이고 떼고 뒷감당이 안된,  '푼수'라는 소리를 듣던 그녀, 동네 아줌들과 화투판을 벌려 놓고 끝도 없이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나던 그 집, 늘 생글거리고 웃던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그녀와 3년이나 동업한 나는 무에 그리 잘나서 푼수가 아니었다고 하겠는가?  그녀도 이젠 많이 늙었겠지? 얼굴이 역시 선하게 생겼던 그 큰딸은 그 후에  선교사가 되었고, 예쁘장하고 야무치게 생겼던  둘째딸은  미국으로 시집을 갔다는데....그 아직 어렸던 아들도  지금쯤은 좋은 직장을 얻어서 장가를 갔을까?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그들은 이 한많은 봉천동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