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 목요일 추수감사절,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어 모여 놀고 나흘이나 되는 휴일을 충분히 쉬었다. 연이어, 28일은 그의 생일, 아무 말 할 것 없이, 저녁에 미역국이라도 끓이고, 포크 챱이나 스테이크라도 구워 놓고 그를 위한 기도를 올리자고 해볼까, 궁리 중인데, 아침에, 어머니,오늘이 아버님 생신이잖아요? 물어 주는 에미가 너무 고맙다.
아버지가 꽃을 좋아하셧지, 꽃 몇 송이를 사 오면 어떻겠니? 아, 그 코카 케잌도 구우면 더 좋겠는데...그러지요. 무슨 꽃을 사 올까요? 장미도 좋겠지...핑크색이나, 그런 예쁜 색을 좋아하셧지...화병에 주홍색 장미꽃 여섯 송이가 꽂히고 그가 좋아할 만큼 진햔 모카향의 케잌이 구워졌다. 에미는 복잡한 데코레이션 없이 아주 깔끔하고 얌전한 케잌을 굽는다. .꼭 그 단아한 성격을 닮았다. 저녁을 끝낸 후, 알맞게 식은 케잌에 휘핑 크림을 곱게 저어 바른 후에 촛불을 키고 해피 버스데이 노리를 부른 후, 태오와 준오가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불을 껐다.
오늘은 우리 천사 할아버지 생일날이야. 할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땅에 묻히셨어. 할아버지는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에 가셧어.할아버지는 하나님과 다른 천사들과 함께 하늘나라에서 지금 행복하게 살고 계시는 거야.....하나님과 할암버지에 대한 간단한 감사기도를 한 녀석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긴말을 덧붙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일에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고는 묻는다. 누가 할아버지를 땅에 묻었어요?
너의 아빠와 엄마, 아빠의 브라더의 그 와이프,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어 드렷지. 할아버지는 한국의 깊은 산, 나무 아래 묻히셧단다. 왜요? 할아버지는 산과 나무를 좋아하셧거든...태오는 커다란 눈을 껌벅이며 생각에 잠긴다. 녀석, 또 무얼 생각하는 것일까? 피는 못속인다더니, 유난히 생각이 많고 질문이 많은 것은 꼭 제 에비를 닮앗다.하긴, 나도 수십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나를 질문쟁이로 기억하지 않던가...나는 천성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질문하기와 대답하기에 관심이 많앗다. 강의도 늘 세미나식이엇다.수업은 질문과 대답의 과정에서 앎의 길을 여는 작업이라고 믿었다. 지금까지도,나는 복지관 학교에서 많은 엉어들을 배우며 질문을 계속한다. 그 대답들을 이젠 더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고, 삶의 현장에서는 그것을 내놓고 물을 수가 없어서 탈이기는 하지만, 질문은 내 영혼의 나무가지나 그 뿌리라면, 답들은 그 나무줄기와 맥을 같이 하며 돋았다가는 시들어 떨어지고 다시 돋아나는 이파리 들이 아닐까 싶다.
준오는 태옴보다 네 살 아래지만, 형의 질문들과 그 대답들 속에서 저도 제 길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유난히 샘이 많고 성취욕구가 강한 탓에, 언어나 행동발달이 매우 빠른 듯하다. 태오는 잦년까지만 해도, 언어발달이 늦어서 속을 태웠는데, 지금은 언어 숙제도 보통급을 넘어서 고급반 것을 받아 온다. 스팰링은 자신이 대충 만들어 내기도 하고, 한 번만 교정해 주면 다 외운다.책읽는 속도도 아주 빨라졌다. 워싱턴의 내 친구의 아들이 재퍼드 게임에 나가서 준결승까지 나가는 바람에 2억원을 벌엇다던데, 얘도 그렇게 되는 거 아냐? 농담을 햇지만, 정말, 얘도 천재가 아닐까,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은, 역시, 못말리는 게 할미의 욕심이다. ㅎㅎ
아무튼, 에미가 심각하게 고려해서 그 동안 정신심리 상담을 받아 온 결과, 태오는 심리적인 어떤 문제가 있지는 않고 단지, 언어가 늦고 수줍어서 사회성 발달이 좀 지체되었던 것이라고 했단다. 며칠 전에는 친구 패트릭이 태오를 초대해서 그 집에서 오래 놀다 왔는데, 준오는또 샘이 나서, 친구 집에 너무 자주 가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 이번엔 우리집에 오라고 하면 되지...ㅎ 아무튼, 친구들도 잘 사귀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도 여전히 그림을 잘 그려서, 만화책을 여러 권 만들어 놓았는데, 여전히, 나는 알 수도 없는 어린이용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한 것들이다. 며칠 후에 피아노 샘의 제자들과 함께 리싸이틀을 연다고 징글벨과 크리스마스 캐롤 몇 곡을 열심히 준비 중이다. 피아노 앞에 앉기를 싫어하던 녀석이었는데, 저렇게 좋아하며 치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조곤조곤 가르쳐 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에미의 교육방법도 한결 부드러워진 듯해서 보기가 좋다.
한국에 간 에비는 삼성병원에서 2주일 만에 퇴원하고 지금은 처가가 있는 올림픽 공원 부근의 재활원에 매일 걸어 가서 재활운동을 한단다. 귀국하자 마자, 갑자기 확 좋아져서, 잠시 그러나 보다 했는데, 그것이 지속적으로 좋아진단다. 병원의 집중적인 재활치료도 효과를 보았지만, 거기만의 특별한 치료방법은 아니고, 그런 재활운동만을 전문으로 하는 곳들이 많이 있는 모양인데, 마침, 그 곳이 에비와 잘 맞는단다. 처음에는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강해서 힘들엇지만, 지금은 아주 마음에 든단다. 이제는 오른팔을 번쩍, 끝까지 들 수 잇다고 자랑이다. 화상전화로 매일 한참씩 통화를 한다. 그래도, 아직 걷는 모습이 어딘가 좀 어둔한데, 얼른 보아서는 표가 나지 않는다지만, 본인은 그 불편이 아직 남아 있으니 아직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한방치료도 시작할 것 같다.
어제토요일은 에미의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음악회가 있었다. 에미와 몇 교수들, 그리고 학생들이 나오는 갈라 콘써트 형식이었는데, 전통음악에서 재즈까지, 성가와 캐롤 들을 총망라한 것은 좋았으나, 해설이 너무진지하고 길어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만 즐기고 싶었던 일반청중들에겐 좀 지루했던 것 같다.무대정리를 하는막간에 시간에 해설을 동시에 했으면 진행도 매끄럽고 시간도 좀 단축되었을 텐데,두 시간 이십분이 되도록 끝나지 않아서 마지막 심포니 곡들을 다 듣지 못하고 나와야 했다. 기부금을 내고 학생들이 일일 데이 캐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언어센타에 아이들을 맡겨 두었는데, 끝나는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에 몇 년에 걸친 리노베이션을끝낸 이 음악당에서 내가 오기 조금 전에 오픈 기념 음악회가 열렸고, 에미는 그 때 오케스트라 협연을 했다고 한다. 이번엔 학생들과 함께 쳄버 연 주만 한 곡 했다. 여러 성가를 편곡한 현대곡이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나온 Green Sleeves는 내 흐린 눈에 실루엣으로만 비쳐진 에미의 모습이 더해져 무척 아름다웠다. 언젠가 본 어느 영화에서 어느 아름다운 여인이 푸른 소매를 휘날리며 마을입구를떠 나가고 있는 장면에서 저 곡을 처음으로 들었던가, 그게 '엘 시드' 였던가, 아, 이 가물가물한 기억이여.. 제 연주가 끝나자 마자 나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연주회로 돌아와서 나를 또 픽업하러 온 에미의 얼굴은 긴장감이 가득하였지만, 집으로 돌아 오는 길, 그 사이 내린 첫눈이 쌓여서 온통 은세게를 이룬 길을 달리며 금새, 다시 행복한 엄마가 된다.. 아, 저기 좀 봐요... 너무 뻐요...아이들은 성탄절 장식이 화려한 집을 볼 때마다 환성을 질렀다.
12월은 이제 제법 추울 모양이다. 그래 보았자, , 아직 겨우 영하를 오르내리는 정도지만, 사람들은 이미 단단히 각오하고 기다렸다는 듯, 두터운 옷을 입고 오간다. 태오오네도 커다란 성탄 트리를 장식하고 문 박에도 작지만 예쁜 산타의 케인을 걸어 놓았다 . 오늘은 일요일, 에미는 오전에 잠깐 쉬는 듯하더니, 오후에 마트에 가서 라이트를 더 많이 사와서 문밖에 다느라고 망치질을 한참이나 한다. 바이얼린을 켜는 손으로 심한 일을 혼자서 다하는 것이 너무 안쓰럽다. 어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나가서 혼자 낑낑대다가 또 앞집 교수의 도움을 받았는데, 연주할 때 팔이 좀 무리가 오더란다. 에비가 있었어도, 저 집 남편처럼 차관리를 잘 해 줄 것 같지가 않아 미안한 마음뿐이다. 며칠 전에도, 자동차 밧데리가 나가서 또 그에게 부탁해야 했는데, 김치까지 한 통 갖다 주고 마트에 가서 밧데리를 사다가 교체해 주지 않았던가? 오늘은 온가족이 일찌감치, 한 시간 넘는 거리의 수 폴즈에 있는 다른 한인교회까지 가는 길이라며 부인이 직접 만든 빵을 우리집에도 한 바구니 또 전해 주고 간다. 참 선한 사람들이다.우린느 뭘 해주지? 글쎄, 아직은 마음 뿐이다.
우리도 아빠가 오면 상의해서 가까운 미국인 교회든 성당이든 나갈 거예요..일부러 다른 한인교회를 찾아서 멀리 갈 것 같지는 않고...그래,그건 잘 생각햇다. 그 수시티 교회의 오목사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금방 다른 한인교회로 가는 건 좀 그렇구나. 그 목사님이 멀리 떠난 후라면 몰라도...이 겨울 지나면서 그 분도 생각을 정리하겠지...안그래도 바쁜 너희가 교회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다 쓰기는 좀 그렇고...
아이들은 첫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아침부터 나가 놀더니, 오후에도 나가서 자전거를 탔다. 다행히도, 오후부터는 눈이 많이 녹아서 같은 또래인 옆집의 금발 꼬마 아가씨도 이번에 처음으로 생일선물로 받았다는 두 발 자전거를타러 나왔다. 준오는 날샌돌이처럼 쌩쌩 달리는 형을 해적단이나 왕이라도 되는 양, 장난감 검과 건까지 옆구리에 차고 제법 잘 따라 다닌다. 내년 이면, 녀석도 유치원에 가게 되니, 에미도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좀 여유가 생기리라.파카 주머니에 라디오를 넣고 이어폰을 낀 채, 햇살에 빛나는 하얀 눈이 눈부셔서 썬글라스를 꼈다 벗엇다 하며, 에미가새로 사다 준까만 캐인까지 들고 왔다갓다거리는 내가 좀 과관이다 싶으면서도 이보다 더한 평화가 따로 없다. 그가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허전한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처음으로 들어 보는 89.7 메가 헬츠 FM방송에서 베토벤의 황제 피아노 협주곡을 들려 주고 있다.
하얀 눈이 쌓인 마을길로 구슬처럼 달려 가는 음률들을 혼자 듣기 너무 아까워서, 아이들에게도 들어 보라고이어폰을 귀에 꽂아 주니 한참씩을 가만히 듣는다. 녀석들아, 이 음악이 할아버지와 내가 처음으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걸 서로 알게 된 곡이란다..그렇게 해서 우리는 결혼을 했고, 또한 음악을 사랑하는 너희 엄마 아빠도 결혼을 했고, 그래서 보배같은 너희들이 이 빛나는 세상에 오게 된 거란다....아이들이 나의 그런 마음을 알 리는 없을 터인데도, 한 바퀴씩 돌때마다 다시듣겠다고 다투어 다가오는 녀석들이 투명한 햇살 속에서 정말 보석처럼 예쁘다. 내가 그런 말을 했으면, 할모니,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는 거죠? 틀림없이 또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엊져녁에는, 왜 매일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 거죠? 이렇게 묻던 녀석이니까.매일 저녁밥상에서, 에미나 나도 알 수 없는 단어들의 의미를 묻는 것도 그렇지만, 그런 질문이 더 대답하기 어렵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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