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만인가? 아니, 여기서 떠낫던 날로 치면 8개월만에 다시 온 여기 버밀리언의 거리 풍경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밝디 밝은 햇빛과 맑은 공기가 황홀하리만큼 아름답다. 아이들은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간다. 소복소복 쌓인 낙엽들, 옷벗은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고즈넉한 집들은 꼭 그림 같다. 이제 곧 눈이 오고, 나는 또 그 겨울풍경 속에 침잠하리라...푸른 잔디밭과 무성한 잎들이 우거진 나무들이 있는 여기 풍경을 본 적이 없지만, 나는 내가 와서 함께 할 이 계절들과 친해지리라. 아니, 사실은, 어제 처음으로 내린 진눈개비가 얼어 붙어서 길은 미끄럽고, 지금은 그 밝던 햇빛이 이미 사라지고 바람까지 분다. 벌써, 진짜 겨울로 진입하고 잇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식구들은 좀 바뀌었다. 지난 봄에 여기 대학에서 재임용되지 못하여, 포닥을 하면서 다른 기회를 찾겠다던 동우네는 뒤늦게 열락이 온 필라델피아의 어느 더 좋은 대학으로 떠났고, 그 자리에 대신 들어온 사람은플로리다 대학의 내 먼 후배격인 황교수와, 또 한 사람, 스포츠 과학을 전공한 젊은 교수이다. 지난 해, 체육관도 아주 크게 짓더니, 체육학과가 아주 크게 개혁하여 신진교수들을 더 많이 용햇다고 한다. 황교수는 이제 막 스포츠 경영학으로 학위를 하고 첫 직장으로 온 35세의 처녀. 딱 보기에도 너무도 성실하고 참한 사람이다. 그 어머니가 신학기 시작하면서부터 와계셨는데, 첫학기부터 세 과목이나 맡게 된 딸을 위해 노심초사, 마치, 한국의 고3때처럼 돌보는 너무도 자상하신 분이다. 내가 오자마자, 저녁초대를 해주어서, 내 생일에 그 인사로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햇더니, 기어이, 미역국에 갖가지 반찬을 곁들여 점심을 차려 주셔서 결국, 저녁은 멕시칸 식당에서 함께 했었다. .
며칠 전는그 황교수 엄마가 들리셔서 차 한 잔을 나누었다. 알고 보니, 에비와 예고 동창인 아이의 엄마와 전주교대 동창으로 절친한 사이란다. 그 새, 그 집에 전화해서 에비의 뇌경색 소식을 전하는 중에, 언젠가 우리집에도 와서 아이의 교육에 대한 의견을 구햇다고 하더란다. 듣고 보니, 그 엄마도 교육열이 엔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주에서 아주 잘 알려진 집안의 종부라던가, 역시, 그런 엄마들이 교육철학이나 한답시고 아이를 방임하다시피 하는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빨리, 아이를 세상의 앞줄에 내놓는 능력이 잇다. 당시, 예고에서 네 명뿐이던 남학생들이 모두 '호'자 돌림이엇는데, 다들, 한국에서 한다하는 오케스트라나 예술학교에 자리를 잡고 있다.
황교수 엄마는 내 또래로, 삼십년을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은퇴하셧단다. 에비가 있을 때, 자주 오셔서 수지침과 뜸을 놓아 주셧고, 에비가 가고 싶어 하는 골프장에도 몇 번 데려가 주셧다고 한다. 어지러워서 채를 제대로 휘두를 수도 없었지만, 그린을 밟고 몸을 푸는 동작만으로도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그 장면 하나 하나를 소상히 설명해 주신다. 차수리 문제로 에비가 수 시티에 가서 통역을 해드렷더니, 아이들 파카를 하나씩 사주셧다는 분이다. 에비도 엔간히 고맙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그 분과 꼭 친하게 지내라고 당부하고 갔다. 한참 수다를 나눈 후에, 한국에서 가져 온 식품들 중에 하나라도 더 드릴 게 있나 뒤적이는데, 잔멸치를 발견하고 집에 물엿이 있으니, 멸치를 볶아서 가져 오겠단다. 자상도 하셔라...내가 뭘 잘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니 뭐라도 도우시려고 그러시는 것이니, 그냥, 고맙다고 하며 드렸다. 말린 고사리와 표고버섯 도 드렸다. 에미가 시간이 저렇게 없으니, 언제 일일이 찾아 다니며 갖다 드리겠는가? 요즘은 교회에도 안 가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마냥 딸 결혼 걱정이다.에미와 에비도 날더러 어디 좀 알아 볼 데가 없느냐고 하지만, 모두들, 여기서 짝을 만나지 않고서는 결혼이 쉽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엄마는 외국인이라도 좋으니 결혼을 하라고 하고, 딸은 한국인들 고집하고...그러나, 사실, 여기 직장을 버리고라도 남자를 따라 갈 만큼의 더 좋은 직장, 그것도 같은 교수끼리가 아니면 참 어여울 것이라는 거다. 그럴 것 같다. 한국사람이 몇 안되고, 그것도거의 이 대학 하나밖에 없는 이 시골까지 같은 교수로 부임하는 사람 이외에 누가 결혼 때문에 여기 와서 살려고 할 것인가? 그렇다고,웬만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이 직장을 버리고 떠나기도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더 큰 도시의 대학에 있는 남자와 결혼해서 같은 학교에서 강의를 함께 하게 되는 것, 에미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란다. 그게 안되면, 어떤 백말 탄 왕자가 여기로 와서 저 예쁜 공주와 함께 살게 되어야 한다. 그래도,연하의 좋은 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진짜 능력있는 여자도 있던 걸요. ㅎㅎ
그저께 밤에도 캔터키의 어느 시골에 부임했다는 어느 후배가에미에게 전화해서 그런 어려움을 토로한 모양이다. 혼기를 놓치고 싶지도 않고, 직장을 놏치고 싶지도 않고...참 딜레마이다. .그래서, 한국여자뿐 아니라, 여기 백인여자들도, 차라리, 혼자 산다는 거다. 좋은 남자를 여기서 만나지 못하는 한...그래도 그들은 인근에 더 많은 다른 직업인들도 있기나 하지...게다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특히, 이 음악과는 어차피 힘든 것이, 연주여행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워야 하고, 평소에도 저녁연주가 많으므로 엔간한 강단이 아니고서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가정생활을 부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에미가 있는 음악과의 여자교수들도, 에미만 빼고 모두 싱글이거나 이혼녀이다. 그런데도, 모든 걸 척척 다 잘 해내는 에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 한다. 더구나,보통의 요즘 젊은 남자들처럼, 자상하게 아이들을 돌봐 주고 집안일을 잘 거드는 남자도 못되는 에비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에비의 멘토인 의 센 장이 물리학 박사인 남편을 집에 두고 아이를 돌보고 있는 사연을 더 잘 이해하겠다.
어제는 황교수 모녀가 김장김치 한 통과 한국 수세미 두 개를 가져 왔다. 며칠 후면 서울로 떠날 분이신데, 우리는 무얼 해드려야 할까? 아마, 혼자 사는 딸의 몫보다 더 많을 것 같다. 참 새찹고 손끝 야무진 푸른샘님님이 생각난다. 그녀도 언젠가, 손수 기른 수세미를 글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엇지. 아무튼, 그 엄마에 그 딸이고 그 아들들로 잘 키워낸 엄마와 자식들을 보면 어벙하기만 한 나와 나를 닮은 아이들이 생각나서 은근히 부끄럽다. 말만 교육학햇답시고, 내가 그들보다 더 잘 교육한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에미는 아이들에게 짜장면을 해주고 학교로 갔다. 어제 하루종일, 수 폴즈에서 연주회를 하고 밤늦게 돌아왔는데도 주말도 쉬지 않고 학교로 간다. 아이들이야 내가 있으니, , 차라리 학교로 가서 일도 하고 연습도 하고 그러는 것이 모두에게 더 낫다.나는 간단히, 고등어 자반과 배추국으로 저녁상이나 준비해 놓고 저녁엔 플륫 연습이나 좀 했다. 플륫을 가져 오기를 잘 했다. 내가 플륫을 불면 아이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 아는 노래를 같이 부르거나 태오가 피아노를 같이 치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오늘은 일요일, 식구 모두가 꼼짝을 안하고 쉬었다. 어제 온 진눈개비가 얼어붙어 아직 살얼음판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에미도 오랫만에 푹 쉬는 게 참 보기 좋다. 교회는 왜 안나가게 되었는가? 지난 여름, 큰 스캔달이 잇었단다. 그 젊고 활발해 보이던 김목사 부부가 수 시의 어느 캐톨릭게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아이들을 일곱 명이나 홈스테이를 하고 있었는데, 일인당 월 삼백만원씩 받으면서도 너무 소홀하고 엄격해서 학부모와 아이들의 반발을 크게 일으켰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다시는 그 집에서 기숙하지 말 도록 조치하엿고, 더 큰 문제는, 그러지 않아도, 대부분의 한인신도들도 다 김목사 부부의 비리?에 대해 비호감을 가지고 잇던 차여
서 젊은 신도들이 대부분 떠나 버렷다는 것이다. 에미와 에비는 마침, 약화 때문에 건강이 악화된 즈음이어서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지 못하던 참이었다. . 교회재정이 불투명해진 것에 대하여 김목사는 전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아들의 약학대학 학비 때문에 너무 많은 돈을 섯다는 것이다. 태오와 준오는 지금 인미국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한다. 그 동안, 그 멀리 수 시티까지 한인교회를 굳이 나간 것은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한인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 봐야,학생들을 빼고 나면, 대여섯 가족밖에 안되지만, 서로 돕고 나누는 정이 대단햇던 거다. 그게 저렇게 무너지다는 건, 민심이 떠나면, 정치고 종교고 다 부지할 수가 없는 것임을 말하는 게 아니겠는가? 진실이 무엇이든 말이다. 모두들, 김목사는 수시티를 멀리 떠나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은 침묵하면서 이 겨울을 그냥 보낼 것 같다고 한다. 아들은 아프고 며늘은 바쁘고 나는 점점 더 무력해져 가고...이 겨울을 지나며, 나도 내 내면으로 들어가서 진정한 나 자신의 답을 찾아내어야 하듯이, 그도 그 자신의 진실이 말해 주는 답을 찾아낼 수 잇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그 아들의 학업이 거의 끝났다고 하니, 그것 하나는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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