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답지 않게 따뜻하기만 하던 날들이 이젠 정말 끝났는지, 사나흘째, 하얀 눈이 내려 쌓이고 잇다. 그래도, 날씨는 여전히 아주 춥지는 않아서 아이들은 스노우 팬츠를 입고 나가서 논다. 이제 1월도 말로 접어 들어, 엊저녁이 한국에서는 설날아침이엇으니, 여긴 온아침이 설날아침인 셈인데, 아무래도, 저녁에나, 만두도 조금 빚고, 떡국을 끓일 참이다. 신정엔, 꼬까옷을 입은 아이들에게 세배도 받고, 교회로 가서 떡국도 먹었으니, 그걸로 됐고, 엊저녁엔 그래도, 중국음식점으로 가서 수프와 에그롤, 스페어립 바베큐와 새우, 그리고 곱게 볶은 버섯과 그린 빈을 배불리 먹고 해피 뉴 이어 소리를 들었으니, 구정도 그냥 지나지는 않는 셈이다.
함박눈이 내리는 길을 천천히 운전 하며 돌아 오는 에미의 차에 타고, 아이들과 함께 천진하게 떠들며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마냥 편안하고 즐겁다. 마음 속으로는 그래도, 온갖 고민들이 잇지 않을까, 자주 생각하며 에미의 눈치를 잠시 잠시 살피지만, 아무리 보아도, 에미는 나처럼 무엇인가 복잡한 마음을 가지지 않는 스타일이다. 느끼는 그대로 될수록 그 당장에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때로는 놀랍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켜는 바이올린 선율 그대로, ,simple and clear, neat and cool...그것이 오랜 체질이듯, 너무도 자연스럽다. 참, 다행이지, 너무 sophiscated하여 무엇이고 하나가 하나가 아닌 나는 에미 앞에 서면 아무래도 스스로 좀 괴물 같기도 해서 입을 닫는다. ..ㅎ
그래, 나도 저 눈처럼 더 단순해지리라. 노인이 되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얼마나 좋은 뜻이기도 한 것인지...겉으로는 그 또한 단순한 듯 보이는 내 행위들 속에서도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했던가? 선악과 미추와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이 다 그 안에 응축되고 가지런히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끊임없이 몸소 가리고 챙기려고 애썼던 많은 자잘한생각들을 이젠 다 내려 놓고, 달랑, 직관과 느낌만으로 걸어가리라. 누구든, 서로 선선한 바람처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가볍게, 가볍게...
올해가 흑용의 해라던가? 포춘 쿠키엔, '인생도박을 하지 마라'라고 씌어 있었다.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요행을 바랄 것이며, 젊은이들처럼 대박을 꿈꾸겠는가마는, 멀리서 보면, 너무 문제 투성이이고 불안하기까지 한 내 나라, 한국에 돌아가도, 그저, 남은 힘으로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일에 더 느긋이 임하고 주어지는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이겠거니... 갈수록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허물어져 가는 스스로의 모습도, 그런 나를 허투루 대하고 지나치는사람들의 모습도, 다 수긍하며 받아 들이리라. 어떤 일에도, 내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마음을 완전히 다 비운다는 것은 욕심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 살아갈 세월 동안, 또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면서 어떤 몌기치 않았던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저 잠시 흔들리고 기우뚱거릴지언정, 그 스트레스 속에 영 갇히지 않고, 금새 나를 건져 올려 내 영혼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태오가 묻는다. '할머니, fact와 opinion의 차이를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며칠, 에미가 플로리다 연주여행을 갓던 동안, 숙제가 너무 많았던 어느날, 제대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을 것 같은데도, '아, 알았어요.'하고 건성으로, 거의 받아 적기만 햇던 문제가 요즘 계속 학교에서다루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2학년 아이들이 그걸 어떻게 다 알겠는가? 다시, 여러가지 예문을 들어 준다. '오늘은 날씨가 춥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준오는 참 착한 동생이다.' '준오는 지금 네 살이다.', '준오는 잘 생겼다.', '준오는 못생겻다.'...잘 넘어 가더니, '우리는 육류와 야채를 함께 먹어야 한다.'...이런 문장들에서는 머리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야채 안먹어도 되잖아요? 하하...옆에서 듣고 잇던 준오가 '나,착한 아이야,' 하고 화를 내려다가무언가 심각한 ,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래도 웃는다. 형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따라가려고 샘을 많이이 내지만, 이 문제는 아무래도좀 높은 '레벨'이라는 걸 알고 일단 포기하는 모양이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실들과 견해들 사이를 비집고 헤엄쳐 나가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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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오는 나하고 놀기를 아주 좋아한다.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한 두시간쯤 함께 뒹구는 것은 물론이고, 블럭이나 레고로 하루종일 무엇인가를 만들고 놀아도 지치지 않고, 온갖 이름의 장난감들을 가지고 즉석에서 놀이의 상황과 규칙을 만들어 내면서 놀이를 주도한다. 특히, 자동차와 기차들의 놀이에서 준오는 아빠가 되고 나는 아들이 되는데, 내가 어지간히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떼를 써도, 얼른 순간적인 재치와 상상력과 새로운 이해력으로나를 달래 가면서 놀이에 열중한다. 말놀이, 숫자 놀이, 퀴즈게임...주고 받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너무 기특하고 재미있다.' 로드러너의 캐치 프레이즈는 뭐게요?' 데피 덕의 케치 프레이즈는? '벅스 바니가 좋아하는 음식은? '' 같은 어린이용 티비쇼에 대한 퀴즈나 장난감 기차들, 자동차들의 이름을 내가 잘 모르고 가르쳐 줘도 자꾸만 잊어 버려서 탈이지, 하나씩, '레벨'을 높여 가며 가르쳐 주는 재미 때문에도 준오는 좋아라 한다. 언어와 논리와 상상력과 이해와 양보와 아량, 그 어떤 것도 아이들이 놀이하는 가운데 배워 갈 수 잇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 아이들을 키울 땐 내가 그렇게 오래 함께 놀아 줄 시간이 없었던 것이 새삼스럽게 미안해진다. 내가 이 아이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지만, 글쎄, 그게 다 욕심이지, 한다. 나 아니어도, 살아가면서 다 배울 것을 내가 또 지레, 헬리콥터 그랜마까지 되려는 것 아니겠는가? .ㅎㅎ
태오가 올 시간이 다 되었다. 아마,스쿨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일부러 눈밭으로 들어가서 부츠로 눈을 펑펑 차며 돌아 오리라. 고기만 좋아하고 아직도 야채를 피하는 태오,단것들과 위게임을 너무 좋아 하는 태오, 동생을 잘 봐주는 태오, 그림을 잘 그리고, 언어들에 관심이 많은 태오, 피아노를 초견만으로도 대충 잘칠 수 있는 태오, 수학을 싫어하지만, 나중에; 과학자가 되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한다는 말에, 그래도 집중하며 산수문제를 푸는 태오, 나하고 자는 형이 기어이 아쉬워서 엊저녁부터는 다시 엄마 방에서 함께 자야 한다고 간청하다시피 해서 데리고 간 준오, 어디 가면 문을 잡고 서서 기다려 주고, 내 방에 들어올 땐 문을 노크하며 익스큐즈 미 할 줄도 아는 준오, 나에게 성이니 물고기니, 레스토랑이니, 공원과 도시까지 만들어 주는 준오, 산수를 곧잘 하는 준오, 그러면서도 엄마가 나갈 때마다 문을 잡고 서서 무엇인가를 한 가지 해주지 않으면 못나가게 하는 준오, 아직 화가 나면,장난감을 내던지거나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소리를 내며 고집을 부리다가 타임 아웃을 당하는 준오, 그 타임 아웃이 끝나기 전에 잠들어 버리기도 하는 귀여운 준오......장난이 시작되면 끝도 없어서, 기어이 타임 아웃을 당하는 이 아이들을 놓고 나는 이제 떠날 날이 다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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