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어느 영혼과의 만남

해선녀 2004. 8. 3. 22:32

 

 

 

한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의 머리가 하도 길어서 이 더운 날에,  머리 좀 자르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내 머리는 내 영혼이라네.

머리카락으로만 보지 말아 줘.

당신의 영혼은 그리 긴가?

내 영혼은 길지도 짧지도 않다네.

그러면 둥근가?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아.

그러면 어떻게 생겼는가, 자네는?

나는 생김도 안생김도 없어.

그럼, 지금 내가 자네를

보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자네 머리가 자네의 영혼이라고 했지 않은가?

그럼, 자네가 본대로 말해 보게나.

나에 대해서, 아니, 나의 영혼에 대해서.

나는 지금 머리가 긴가, 짧은가?

나도 그만, 알 수가 없어졌네, 그려.

그것 보게. 자네가 본 것은 내 영혼도 아니고

사실은, 내 영혼의 끄트머리라네.

끄트머리는 바람에 나부끼는대로

온갖 형상을 다 보이는 거지.

자네가 본 것은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단 말일세.

자네는 그러니까, 내 영혼의

끄트머리에서 머무르지 말고

바로 내 안으로 들어 오게나.

어찌 들어가나, 문이 있어야지?

문은 자네가 원하는 곳에 만드는 거야.

내 어느 끄트머리에든 통로를 내되, 그것이

유일한 통로가 아닌 줄만 알면 된다네.

내가 그리로 들어가면 자네를 만날 수 있는가?

또 모르지. 나는 십중팔구,

어느 다른 끄트머리로 나가

또 다른 나를 만나고 있을지 몰라.지금처럼.

자네는 지금도 내 머리만 보이는가?

나는 지금 내 발꿈치를 보겠다는 사람을 만날 참이라네..

내 발꿈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도 모르는데,

누가 아주 밉상으로 생겼다고 그러더군, 하하...

 

.

그런 말을 하는 그와 엇갈려 떠나고 나서야, 나는 알았습니다. 그와의 만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나는 찰랑거리는 물가에서 물을 만지고 온 바람이었습니다. 수심 깊은 곳의 사정은 알 수도 없었지만 손바닥으로 찰방찰방 물의 머리결을 도닥거리며 놀다 온 느낌...참, 산뜻한 만남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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