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내 고추 좀 팔아 도고...

해선녀 2006. 12. 3. 12:35

 

 

친구가 여름내 멀리 서산까지 밭일을 하러 들락거린다더니 친구들 까페에 "애들아, 내 고추 좀 팔아 도고"라는 글을 올렸다.. 남편이 하도 밭일을 좋아해서 주말만 되면 달려 가서 호박이니 배추니 심어 돌보고 거두는 재미에 푹 빠졌는데, 정작 자기는 그게 귀찮아 죽겠다더니 은근히 농삿일이 몸에 익어 가는 듯했다. 기름값이며 노동력이며 시간 투자며, 그게 어디 경제적으로야 타산이 맞는 일이겠는가? 그래도 착하고 예쁜 그 친구 심성대로 툴툴거리면서도 열심히 따라다닌 덕분이겠지, 실한 수확을 거두어,이리 저리 자리 봐 가며 건사하고 이집 저 집 나누어 주느라고 애 많이 썻을 터...고추 열 근을 팔겠다고 한다. 그 예쁜 친구가 직접 심고 가꾸고 정성들여 말린 고추 열 근...그렇다고 한 근씩 나눠 가질 수도 없고 선착순으로 한 친구에게 돌아 갔지만 고추장사는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찬구가 직접 농사지어 말린 고추들...ㅎㅎ 

 

 

그 게시글 제목에 우선 군침이 돈다. 그잖아도 이제는 점점 매력도 없어져 가고 챙겨 줄 일만 더 늘어 가는 귀찮은 얼라들이 되어 가는 남편들에 대해 흉도 보고 은근히 자랑도 하며 입방아들을 찧고 노는 우리들이 아닌가?, 얼씨구나, 고추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냥 넘어갈 리가 있나. 어김없이 고추장사라니?, 아직도 달려 있는 고추도 있더냐? 나도 좀 비 도고(보여 달라)... 해가며 고추 열 근 장사판이 걸판지게 벌어져 댓글이 고추처럼 주렁주렁 열렸다.  이렁저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데는 남편들에 관한 이야기가 좋은 안주꺼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서로 어쩌지도 못하고 등긁어 주며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 완전 여성상위 시대를 구가하지는 못하여도 각자 '지 팔 지가 흔들며' 살아갈 수는 있게는 된 우리들...우리는 그 중노인 남편들을 '영택씨'라고 부른다. 미워 죽겠다는 마음으로는 영감탕구라고 부르고 싶지만 그래도 듣기 좋게, 그 옛날 데이트하며 "ㅇㅇ씨"라고 부르던 애교을 그렇게 보탠 것이다. 우리는 하루 한 번이라도 까페에 들리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을 지경이 되었으니 사라져 가는 여고시절의 그 아련한 옛정이 가히, 더 따숩고 끈끈한 우정으로 되살아났다고 할까....

 

그런데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보니 그 제목에 다시 눈이 간다. 고추를 팔아 달라니? 사 달라고 해야 맞지 않는가? 그러고 보니 까페가 생긴 지 삼년 여, 고향 사투리로 노닥거려 오는 동안 처음에는 어색하고 무슨 말인지조차 잊어 버렸던 구수한 우리들의 옛말이 우리를 옛정취에 빠지게 함은 물론이고,우리들의 몸에 다시 베어 들어 우리를의 말이 점점 더 잘 익은 술 같고 묵은 된장 같이 맛이 깊어졌다. 저 말만 해도 그렇다. 그래, 지금 같으면 당연히 사 달라고  했을 터인데 우린 어느새 팔아 달라고 써 놓는 사람이나 그것을 읽는 사람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 것이다. 아, 까맣게 잊어 버린 저 말들...내가 무얼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인, 그래서 그 때 그 시절로부터 우리가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것을 새삼 다시 실감하게 하는 하는..."쌀 한 말 팔아 온다', '내 떡 팔아 주이소'하는, 저 말들이 다시 우리말이 될 수 있을 줄이야....

 

 

 

t시카고 은행 앞의 샤갈 벽화 앞에 각서리처럼 하고 서서...

 

 

며칠 전엔 미국서 온 블로그 친구를 다른 두 친구와 함께 만났다. 그는 방금 중국여행에서 돌아 온 길이어서 그 곳에서 접한 탈북자들에 대한 눈물겹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하면서 자신이 그 동안 미국에서 너무 잘 살고 있었다는 것이 죄스러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 중에, 그는 미국적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페어 플레이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 정신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도덕적 가치이며 한국의 문화수준은 거기에 너무 못미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한국은 온 사회가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라는 것이다. 그의 블로그를 통해서나 내가 미국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 이야기는 익히 듣던 바였지만, 좌중은 그 날 따라 그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쪽으로 흘러 갔다.  모든 것을 문화수준 차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문화의 내용이 워낙 서로 다르다는 점늘 간과해서는 안된다..미국적 합리주의도 좋은 가치이지만, 한국적인 끈끈한 인정도 좋은 가치가 아닌가 운운하며 서로 통상적인 논쟁으로 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이럴 때, 우리는 서로 누가 써 놓지도 않은 연극에서 얼른 자신의 배역을 선택하여 어떻게든 해내어야 하는 즉석 연극무대에 서게 되는 것 아니던가? 어쩌다 보니 가장 손쉽고 익숙한 역을 각자 자연스럽게 맡게 되는 것이지만, 만약, 좌중이 그에게 미국 사람들은 참 합리적이어서 좋더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할 수도 잇었을 것이었다. 그는 옳다꾸나 하고 그 점에 대해서 길게 부언설명하며 강조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반대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국이 그리워서 찾아 온 사람이니 풋풋하던 교향 사람들의 옛정에 대한 추억이 왜 없겠으며 한국적 전통적 미덕을 왜 그리워 하지 않았겟는가? 우리 역시, 미국적인 합리주의의 편리하고 깔끔한 사람관계의 미덕을 왜 모르겠는가?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 뻔히 다 알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서로 부러워 하기까지 하면서도 그 때 그 순간, 리허설은 커녕, 대본도, 정해지지도 않은 연극을 얼른 그 순간에 떠오르는대로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때로는 꼭 그것만 하고 싶었던 배역도 대사도 아닌 것을, 목에 힘까지 주어 가며...이것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그가 그렇게도 비난하고 싶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까지는 할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들의 '끈끈한 정과 유대감'을 바탕으로 우리는 서로 믿고 한 판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면부지의 사람들끼리도 그런 논쟁은 가능하지만, 가페와 블로그를 수없이 들락거리며 함께 나누어 온 대화가 모두 허깨비들의 연극이 아닌 이상, 그 동안 드러내어 온 '아이덴티티'와 그 간의 관게방식을 우리는 잘 안다. 때로는 상대방이 좀 엉뚱한 연기를 해도, 우리는 "아, 저 사람은 저게 다는 아니야"하고 이해해 준다.일부러 짜지 않았어도, 우리 사이의 고와 스톱의 게임의 룰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싸이버에서 오래 만나 온 사람들끼리는 현실에서 처음 만나도 아주 오랜 친구들처럼 친숙하게 느껴진다.. 열띤 논쟁을 하고 있는 지금, 만약, 갑자기 어떤 다른 사람이 끼어 든다면, 우리는 일단 그의 논조를 알아 듣는데 시간이 걸리고 세상 어디든 낯선 곳에 가면 다 그렇듯이, 그는 잠시라도 짜고 치는 고스톱판에 들어 온 느낌을 가질 것이다...

 

네 사람의 좌석은 그러나 그런 고스톰이 제대로 진행되기에는 너무 엉성한 무대였다. 목소리가 너무 작고 말이 빠른 선수, 상대방의 대사를 너무 일찍 간파해 버린 선수, 자신의 대사를 다 쏟아내기에 시간은 이미 너무 촉박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어서 게임에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는 선수... 우리 삶이 늘 그렇지 않던가?  그것은 관객도 배우도 도무지 손발과 호흡이 잘 맞지 않는 엉성한 연극에 시간을 보내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 가곤 한다.  나는 차라리 내려다 보고 있던 노오란 은행잎이 깔린 인사동 길로 무대를 옮겨 그에게 줄 '인사동표' 선물을 하나 고르고 싶었다. 갑작스런 장면전환에 좀 불만한 배우도 있었으리라...마침, 바로 건너편의 앤디 워홀의 커다란 그림이 온 인사동 쌈지길을 내리 누르고 있는 건물이 보였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도자기 가게가 있었다. 첫번 만난 가게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백자로 된 찻주전자와 찻잔 세트를 샀다.  그가 내게 베풀었던 친절에 비햐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는 꼭,.내 고향 후배가 된다는 그의 아내나 몇 달 전 맞아들인 파란 눈의 발레리나 며느리에게 선물로 전해지기를 바랬다. Oh, I did not expect this...나의 돌출행동에 그는 엉겹결에 영어로 말하며 놀라는 눈치였지만 아마 그도 내 뜻을 이해했으리라. 

 

꼭 작년 이맘 때, 막내가 이사 오기로 한 시카고 공항에 내가 처음 내렸을 때였다. 나는 신시내티에서 시카고로 달려 온 막내와 공항에서 만나 며칠 모텔에서 묵으며 시카고의 학교나 아파트 사정을 좀 알아 볼 참이었는데 저 친구가 극구, 자기 집에 가서 묵으란다. 그는 거의 납치하다시피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우고 갔고 우리는 이틀이나 묵으면서 그의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그의 처남이 공항까지 함께 나왔고 내내 함께 그 집에 있었지만, 그의 부인은 마침 한국에 가고 없는 상태여서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 들엿다. 그래, 이런 연극도 있을 수 있구나...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그게 상당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이상한 연극이 아닌가? 아이오와의 큰 아들 집에 갔다가 다시 시카고로 가서 한 달쯤 막내의 아파트에 머물면서 나는 그 부부를 함께 식사에 초대하려고 몇 번이나 전화를 하고 메세지를 남겼지만 웬일인지 그는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 친구는 시카고 최고 건물 죤 행콕 빌딩 꼭대기에서 밥도 사 주고...

뒤로 보이는 건 미시간 호수....나는 언젠가, 꼭 저걸 건너 캐나다로 가 보고 싶었는데 

또 그냥 두고 왓다...

 

 

혹시, 그의 부인이 무슨 오해라도?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굳이 그렇다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때 20년이나 해 온 사업을 막 접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기 위해 너무 바빴고, 집안일로 워싱턴에 주로 가 있었다. 귀국 바로 전날, 나는 누군가와 약속이 되어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혼자서 나를 만나러 오겠단다. 만나지 못하고 그냥 떠나 온 이후로 늘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였는데 그가 한국에 온 것이다, ....어수선한 인파 속에서 갑자기 몰려 온 추위에 한기를 느끼며,긴 여행으로 초췌해고 추워 보이는 그의 복장에 안쓰러워 하며, 우리는 마지막으로 또 다른 친구를 만나기로 되어 있는 그를  그 인사동 거리를 내리 누르는 듯한 앤디 워홀의 팝아트 밑에 그를 세워 둔 채로 헤어졌다. 그래, 그도 아마, 미국에서 살아 오면서는 그 깐깐하면서도 산뜻한 합리주의자들 사이에서 지금 나처럼 단호한 척, 깔끔한 장면을 연출했을 테지...그러나, 그도 역시 지금 나처럼, 속으로는 어정쩡하고 마음이 쨘하기도 하지 않았을까?  한국사람들의 이 끈끈한 정을 어쩌지 못하고 말이다.....

 

나는 사실, 그의 부인이 그 때 나에 대해 무슨 오해를 하지 않았던 것인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고, 그 때 너무 고마웠다고도 말할 사이도 없었다. 그는 마지막에 우리에게, "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만날 일은 없겠죠" 라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졌다는 듯이..."글쎄, 그럴까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만날 지 누가 알아요?"라고 대꾸하였지만, 나도 감감한 일, 저 대사 역시,서로 바꾸어서 할 수도 있었던 거였다. 그는 다음엔 한국에 오더라도 우리를 다시 찾을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그는 등단 이후,프로로서의 문필활동에 더 치중하면서 블로그엔 신변잡기만 올릴 뿐 작품은 올리지 않는단다. 발표하지 않은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작가들도 있기는 한데 말이다. 막내 역시, 미국으로 다시 간다고 해도, 시카고로는 돌아갈 것 같지 않다. 지금쯤은 눈이 많이 내리고 네시 반만 되면 어두워져 저녁시간의 낭만도 내겐 좋았는데.. 막내는 단지, 형이 살고 있는 소도시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여서 갔던 것일 뿐, 좀더 날씨도 좋고 활기 넘치는 경쟁과 도전이 있는 LA나 뉴욕이 더 좋단다. 글쎄, 더 살아 봐야 알지...지금은 일단 귀국해서 대학공부를 마저 마치기 위해 주중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주말에는 맨날 동아리 야구시합하러 간다.

 

  

 

징글징글하게 오던 시카고의 눈... 치즈케잌 공장 앞에서 막내...

 

 

 식당에서 웨이터 알바하며... 

 

공부는 조금만 하고 여행하고 야구장 찾는 재미로 살았다...

  

 

외국에서 오래 고생하며 고국사람들을 그리워 한 탓일까, 그는 좀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한 번 맺은 인연들을 끝까지 놓지 않고 지켜 온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처음 갔던 문학지향성의 어느 인터넷 까페였는데, 블로그를 하면서 나는 진작에 떠나 왔지만, 그는 아직도 거기 사람들과의 교류도 계속하고 있다. 오랜 이민생활 끝에 그는 돈도 많이 벌었고 자식들도 잘 키워서 출가 시켰으며 이제 자신이 오랫동안 해보고 싶던 일, 문필가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잇는 중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동안의 인연을 싹둑 끊어 버리고 앞으로만 달려 가기에는 그는 너무도 정이 많다. 그의 집에서 나눈 대화 중에,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는 눈물도 흘렸었다. 이번 중국에서도,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그렇게 많이 울었다고 한다. 감히 뿌리치지 못할 정도로,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기 좋아하는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의 일을 미루고라도 미국의 페어 플레이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노인교포들을 돕는 일에도 열심이다.  아무리 봐도 그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의 양말에는 쏙 맞아들어가지 않는 어수룩한 한국인의 심성을 버리지 못할 사람이다.

 

친구의 게시판 글로 다시 돌아 가자. "내 고추 팔아 도고", 그 말은 바로 우리들의 이 끈끈한 정'을 나타내는 적절한 예가 아닌가 한다. 필요하면 내 고추 내가 사 가면 그만이고, 그래서 '사 준다'는 말은 있어도, 남의 고추를 '팔아 준다'는 말은 없는, 사는 사람은 살 분이고 파는 사람은 팔 뿐인 미국적인 개인주의에 비해서 저 말은 "당신은 그냥 고추를 사 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 고추를 팔게 해 주는 사람이라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끈끈하게, 당신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며, 고마운 정을 표시하며...가히, 너와 내가 한 둥우리이고자 하는 그런 동류의식, 사랑의 마음이 아닌가...

 

우리는 자기 집도 우리집이라 하고 자기 엄마도 우리 엄마라하고 우리 딸, 우리 아들 우리 영택씨, 우리 마누라...모든 개인적 소유를 공동체 의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정서가 없는 미국사람이 저 말들을 들으면 좀 고개를 갸웃거릴 말이다. 우리의 딸이라니? 하하...우리의 뿌리에 깊숙히 박혀 있는.이 We- Feeling을 그들은 곡 주객 미분리 상태의,자아 미발달 단계의 어린아이 같은 저급문화로만  치부할 것인가?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그가 공항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한 전화를 걸어 왔을 때, 어쩌면 그는 한국무대를 벗어나는 비행기에서부터 벌써, 탈북자들이 겪는 비인간적 상황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그 짧은 우리 까페, 우리 블로그 친구들과의 만남의 시간에, 또 그 놈의 미국적 페어 플레이 장사만 줄창 하고 돌아 가는 자신에 대해서 일말의 후회와 아쉬움에 젖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걱정 말아요...지금까진 우리 모두 어설펐지만 다음에 만나면 우리 서로 더 잘 팔아 줄 거예요...그것이 무엇이든....

  

 

 

 시카고 O'HARE 공항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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