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것들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은 누구와 손가락 걸고 약속한 것도 아니어서, 취소할 수도 없는 그런 약속입니다. 약속되지 않은, 풍경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고 심정도 아니고 사건은 더욱 아닌, 정작, 언제 오갔는지도 모를,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기에 어김없이 오고 늘 기다려지는 계절 같은, 그런 약속입니다.
그것은 온갖 구체적인 삶의 몸짓들에 대한 약속이기보다는, 그 몸짓들이 담긴 그릇, 우리의 五感으로는 감지할 수는 없으나 삶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embeded) 삶의 형식(Form)으로서, 걸음걸음, 우리의 발을 놓을 곳을 가이드해 주는, 그런 약속입니다. 누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정의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더 크게, 진리니 途니 하지요.
그런데, 나는 사실, 나의 걸음걸음들이 그 어떤 그릇에도 제대로 담겨 있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별들 사이를 유영하다가 영 엉뚱한 별에 도달한 지구인처럼, 발이 땅에 닿지도 않은 채 허우적거립니다. 이것이 지금 사랑인가, 미움인가, 지헤로움인가, 바보인가..선인가, 영악함인가,.. 내가 지금 어떤 그릇의 어디쯤에 담겨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치매증 처럼.
실제로, 세상과 인간과 자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실컷 떠들다가도 금방 뒷꼭지에서, 그게 정말 그런가, 절대로 그런가,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갈수록 자신이 빗장 걸어 놓았던 자질구레한 정보 쪼가리들과 그에 맞춘 몸짓들과 생각들이 어느 새 다 무의미하게 생각되어,이제는 그런 약속들일랑 모두 던져 버리고 자유를 선언하고 싶은 심정 말입니다.
그러나 곧 다시, 그것 또한 억지 약속을 걸어 두는 강박관념에 불과한 것을 깨닫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의 치매증이란 단순한 치매증,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치매증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왜 모르게 되었는 것인지, 내가 왜 그것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그 문제점을 어렴풋이나마 알겠는, 그런 치매증이니까요. 정도 문제이겟지만, 스크라태스식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내가 무엇을 모르겠는지는 알겠는, 그런 치매증입니다. 그렇게 빤한 의식을 일부러 덮어 두려는 그 자의식으로 인해 강박증적인 긴장이 초래되는.
실어증은 바로 그런 치매 아닌 치매-자의식의 증상입니다. 무엇이 어떠하다고,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말을 하다가도, 곧, So, What? 그 말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꾸로, 화자의 의도에 따라서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음을 너무도 빤히 알게 되는, 그래서 점점, 어떤 누구에게 내일이면 달라질지도 모를 어떤 말을 함으로써 내일이면 내리게 될 간판 같은 자신을 내거는 약속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잃어 가는 허무감.
얼마 전에, 중국의 어느 途를 숭상하는 지방의 민속을 소개하는 화면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는 굿을 할 때 우리의 무당들이 흔드는 대나무 대신에 빈의자를 흔들어대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무당과 그 굿을 하는 가족들이 그 死者가 생전에는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내내 말하지 못했던 생각까지 이제는 말하게 하고, 그에 경청하여 받들어 모시겠다는 뜻 같았습니다. 생전에는 제대로 앉아보지 못하고 비워 두었더라도, 죽은 후에는 깨달아서 마음 편히 앉아서 무엇인가를 비로소 자유롭게 말하게 되는 그런 의자.
'죽어서나 고치는 병'이라는 말도 있지요. 스스로도 충분히 의식하고 버리고 싶지만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사는 고질적인 성격적 결홤이나 악습을 그렇게 말하지요. 나는 그가 그 의자에 앉아서 무슨 말을 할까가 궁금합니다. 死者는 정말로, 죽어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새 의자에 앉은 것일까? 나도 그 의자에 앉게 된다면..?
어쨌거나, 그 의자는 결국, 존재하지 않는 것들과의 약속 같았습니다. 약속을 하지도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아니, 굳이 기다리지도 않는 빈 의자. 몇 사람이 와서 앉아도 그만, 아무도 와서 앉지 않아도 그만, 다만, 언제든지 거기 그렇게 있을 뿐인. 어떤 말로도 말해지지 않았더라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그런 절대약속. 어쩌면, 영원히 빈 의자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의자... 그런 의자가 아닐까, 그 사람들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살아 생전에도, 좀더 자주 자주, 어쩌면, 늘, 그런 의자에 가앉고 싶어하지않습니까? 내가 던져버릴 수도 없고, 나를 기다리지도 버리지도 않는 그 의자에 늘 새롭게, 치매증을 숨기려는 수다나 허풍도 아니게, 강박적 실어증도 아니게, 말이야 있고 없고, 그저 물흐르듯이 편안하고 여유롭게 세상과 자신을 향수하게 해 주는 그 의자에....
비탈에 서서도 잎들을 반짝거리며 의연히 서 있는 나무들처럼, 그 약속없는 악속의 의자에 그림자라도 지긋이 걸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더 이상 허우적거리는 일도 없고, 땅에서 발이 떨어지는 일도 없이, 종교든, 철학이든, 칼럼쓰기든, 일상의 수다이든, 또는 침묵이든, 그 이름이야 무엇이든간에, 삶의 밑그림에 좀더 깊이 영혼의 발을 담그고 그 의자에 자주 앉아 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