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그녀

해선녀 2004. 1. 29. 08:44
저렇게 낡아가는 고엽 몇 이파리,
저 아파트 어느 창문의 누구와 마지막
눈을 맞추다 떨어져 갈까요? 외로워라. 허무하여라.
저 웅얼거리는 소리, 누가 마지막으로 들어 줄까요?
 
인연이 그것밖에 아니었어요.
새순이 돋을 때부터 서로를 바라 보았다고 내내 손잡고
어루만지며 말한들, 이제 와서 무엇 하겠어요.
가야 할 길 가는 거지요. 우리 다 정해진 길대로.
 
조금 후, 아홉 시면, '결전의 시간'이랍니다.
우리 윗동네에 조그만 아파트가 들어서는데,
아아, 그 헌 연립주택들 중에 누가 살았는지 아세요?
미친 여자랍니다. 아침마다 무어라고 무어라고
알아듣지 못할 욕설을 듣지도 않는 어떤 사람에게 퍼부으며
우리집 앞을 지나가던 그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오늘은 나가서 보려고 해요.
그녀의 남편과 건축업자들이 빳빳한 새돈 백만원
뭉치를 들고 끝까지 혼자 남아 버티고 있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달래어 본다는 시간.
 
그녀를 '내보내기 위한 마지막 작전'
그 빈 동네엔 지금 그 집들 만큼이나 오래된
감나무와 라일락,꽃사과, 석류나무들이
그녀처럼 마당을 지키고 있지요.
언젠가 썼던 '폐허에 비'가 생각납니다.
아, 그 나무 잎사귀들에 또 그렇게
처연한 비가 내리고 있겠군요.
 
그녀가 끝까지 버티면 몇 사람의 장정들이
그녀를 '들어낸다'네요. 그녀는 혼자서만 쓰라고
찔러 줄 것이라는 그 돈을 받고 과연,
좋아라하고 일어서 나올까요? 그 돈을 저 나뭇잎들처럼
공중에 내던져 휘날리게 하면서 헛웃음을 웃고
욕설을 퍼부을까요? 이미 돈을 다 받아챙긴
이혼한 그 남편과 아들에게도?
 
인연이 아직 다한 것은 아닌지, 그녀를 '시설'로 보내는
서류에 그 아들은 차마 도장을 찍지 못하였답니다.
'죽어서나 나올 수 있는' 그런 곳이라나요.
차마, 헤어지지 못하여 매달리는 인연들
소리를 지를 때는 눈에서 살기가 돋는다는 그녀,
한 번씩 병원에 다녀 오고 나면 그렇게 유순할 수 없는
미소를 띄운다는 그녀, 오랜 동안 그녀의 괴성을 견뎌 온
이웃사람들은 무슨 마음으로 그녀에게
무슨 말들을 할까요? 잘못하다가는 그녀가 '해꼬지'라도
할지 모른다며 무서워 하는 사람도 있다네요.
 
나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그녀와 처음이자 마지막 눈을 맞추게 될 수도 있는
그 현장으로 지금 가렵니다. 나도 그녀처럼 한 장,
흩날리는 낙엽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의 눈에
사진찍혀 주렵니다. 그녀에겐 그녀를 둘러 싼 모두가
다 그렇게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03/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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