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밭에 가서 연꽃들을 더 가까이 다가가 연잎에 빗방울이 도르르 도르르 흐르는 것까지 볼 수 있다면 연밭 하나를 전체로만
보는 것보다는 삶의 안쪽을 더 깊은 곳까지 볼 수 있게 될까? 나는 원래 삶을 너무 관념적으로만 살아 왔다.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것도 문제지만 나는 나무는 안 보고 숲만 보려고 해왔던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숲을 보라는 것은 원래, 나무들은 대충대충만 보라는 것이 아니라, 나무도 하나하나 제대로 보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그 나무들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더 크고 깊은 뜻을 보라는 말일진대,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도 팔자인지, 나는 더구나,이제 눈이 점점 더 나빠져 가면서는 그렇게 나무를 들여다 볼래야 볼 수도 없게 되어 간다. 나는 이제 숲을 보기는 커녕, 자잘한 세상 세간살이들을 점점 더 엉뚱하게 짚으면서 살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나의 불안감은 가시적인 세상에 대한 착각과 착오보다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도를 더한다. 겉으로는 통뼈인 것처럼 대범하지만 속으로는,나도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말을 하든 못하든, 엔간히 예민한 사람이다. 시험공부할 때도, 아무리 급해도 어서 외우기나 할 노릇이지,어떤 이론이든 그 타당성을 따지고 들다가 볼 일 다 본다. 특히, 사람 사이에서 어떤 사람의 심중이 잘못 헤아려지고 처리되고 겅중겅중 넘어가지는 엉성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면 참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아진다.
'수박겉핥기식', 혹은, '봉사 코끼리 만지기식'으로 인지된 정보를 바탕으로 거칠게 진행되는 상황논리...혼자서 따져 보았자,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나 혼자서 어찌해 볼 도리도 없을 때가 많지만, 상황의 전개에 관련된 사람들의 마음읽기에 나는 관심이 많다. 그것은 남의 눈치를 너무 살피는 것과는 다르고, 자의식이 너무 강한 것과도 다른, .인간관계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사람의 몸짓을 잘못 보고 말을 잘못 듣는 데서 오는 오류보다도, 연꽃잎에 빗방울 도르르 구르는 것을 누가 못보았대? 똑같은 것이라도 다른 눈과 귀로 다르게 접수되는, 오류라고 한다면 바로 마음으로 짓는 인간적 오류에 대한 관심이 큰 것이다.
마음의 오류들에는 대개 시중에 떠도는 슬로건들이 동원되곤 한다. 격언이니, 속담이니 하는 것들이다. 옛말에 그른 말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경우에, 맹목적으로 그런 말들에 붙들림으로써 오류를 저지른다. 도무지 분석적이지 못한 이현령비현령의 신화들을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쓸 때가 그렇다. 서로 궁합이 잘 맞지 않아 오른손을 내밀었다, 왼손을 내밀었다, 그래도 잘 안되면 뒤꼭지가 캥겨 가면서도 외면도 하면서 우리는 산다. 부딪치고 이가 빠진 일관성 없는 논리들을 모른척, 억지로 부둥켜 안고 혼미한 자아를 사는 것이다.
숲을 보라는 말은 하나하나의 나무들-그런 슬로건들의 의미를 넘어서서 맑은 마음의 시력을 가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역시 인구에 회자하는 또 하나의 슬로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과도 통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하나 하나의 달(비가시적인 의미의 손가락(또는 나무)들을 또 다시 넘어선, 그야말로 유비퀴터스적인 영혼의 세계를 관통하는 마음의 시력까지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과연, 우선 손가락으로 가르치고 그것을 보는 가시적인 시력이 없이도 달을 볼 수 있는가? 가시적인 미소를 보지 않고서도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는가? 말하자면, 이것이 눈이 점점 더 어두워져가는 나의 딜레마인 것이다.
덧붙여,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나무 하나 하나, 그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눈과 귀로 접수하지 않아도,숲을, 그 사람의 성향이나 더 깊은 그의 내면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도 영 믿을 것이 못되는 말이다.. 그가 잘 웃는다거나, 잘 찡그린다거나, 옷을 잘 입는다거나 촌스럽게 입는다거나,...우리는 소소한 그의 언행 속의 의미, 손가락의 방향을 잘못 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아먈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식으로, 우리는 더 이상의 손가락들을 제대로 볼 생각도 않음으로써, 스스로 판단 자체를 그르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또 얼른, '있는 그대로' (다) 본다'는 또 하나의 슬로건을 거기에 갖다 붙인다. 원래, 그 말은,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그것(그 사람)이 보아 주기 원하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보는 사람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과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말은 궁합이 잘 맞기 어렵다. '그가 보아주기 원하는대로, 그러나 내 마음의 눈으로? 차라리, 그냥, '있는 그대로'라면 모를까....
아무튼,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남의 눈으로 보인 것에 자신의 마음을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 깊은 '안목'을 가지려면, 자신이 지금 의존하고 있는 슬로건과 다른 슬로건들의 관계도 알아야 한다. 안목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말이 하나의 개인이 존재함으로서 성립된 말이 아니라, 무리로서의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속에서 비로소 성립하는 말인 것처럼, 하나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넘어 서서 다른 눈을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안목이 없을 때, 우리는 편리한대로 아무 재목이나 끌어다 지은 집처럼 통합성 없는 엉성한 존재의 집에서 이 창문, 저 창문 앞을 서성댈 것이다.
자기가 본 것과 다른 사람이 본 것의 관계를 아는 일. 그것은 결국, 자신의 시력과 안목도 믿지 않는 일이다. 다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력을 벼리고 안목을 깊게 하려는 의식을 깨우는 일. 진짜 마음의 시력은 거기에서 나온다. 그것은 도르르 구르는 빗방울을 님그리는 내 눈물로 보든지, 물의 화학방정식으로 보든지, 하나의 작은 우주로 보든지 간에,내가 본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물며 육안으로 본 것임에랴. 내 안에서도 세상을 주마간산식으로 볼 수도 있고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한 가지 관점에서의 지식에도 안주할 수 없어서, 우리는 세상을 참 꼼꼼히도 챙겨 보고, 온갖 지식들을 주욱 꿰면서 정보적인 지식의 수집과 정리에 마음을 기울이기도 한다.그러나,많은 지식과 정보들이 총망라된 앞에 섰을 때, 내 마음은 도대체 어디쯤에 위치하면서 무엇을 보아야 할지 황당하기만 할 때가 있다. 거대한 백화점에 아무 생각없이 들어섰을 때처럼, 나는 이것 저것, 내키는대로 충동구매를 하거나, 자잘한 악세사리 하나라도 챙겨 나오거나, 아무 것도 사지 못하고 돌아서기도 한다.
So what? 그헣게 많은 지식-상품들을 접하게 된다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대신, 오히려, 그것들로부터 소외됨을 느낀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었던 것인지 길을 잃기도 한다. 그 지식들은 나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는 것이 없다. 그냥, 이멜다의 삼천 켤레의 구두처럼,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 중의 어느 관점에 내 관점을 맞추어 넣고 잠시 즐길 수는 있다고 해도, 나는 잠시 신발 한 켤레를 즐기듯, 소모품처럼 그 지식을 흘깃 즐기고 다시 튀어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마저 든다.
그것은 그 지식들이 내 스스로 탐구하고 발견한 내 손가락이 아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손가락이든, 내 스스로의 눈으로 그것이 가리키는 곳을 반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지식들의 눈을 다시 들여다 보고 동시에 내 눈을 되돌아 보면서 그 지식과 내 지식과의 거리를 재고 그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나는 그 다리를 어디쯤까지든 건너가도 건너 가고 돌아서도 돌아서야 한다. 나를 가르치고 나를 만드는 것은 그 때부터이다. 그 선생은 또 다른 나, 나를 감시하고 나를 독려하고 위무하며 나를 거느리는 명징한 의식과 자기애이다..
'눈이 안 보이면 마음의 눈으로 보라. 육체의 눈이 어두워진다는 것은 영혼의 눈이 밝아진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시류에 물들지 않는 청렴한 학문에만 정진하던 존경하는 선생님 한 분이 어느 땐가, 이제 당신도 노안이 되어 간다고 하시며 하시던 그 말씀을 나는 오랫동안 신앙처럼 믿어 왔다.
그 때는 어렴풋하였지만, 그것은 내게 어쩌면 내 인생을 인도하는 가장 큰 계시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들 중의 손가락, 가시적인 세계를 넘어서 비가시적인 세계에까지 끊임없이 나를 인도하는 지팡이 같은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길은 사실(현실)과 거짓(비현실)), 사실과 사실, 사실과 논리, 논리와 비논리의 세계로 이어지는, 위태로운 경계선들을 넘나드는 수많은 손가락들을 직접 보지는 못해도 이야기들을 들으면서라도 헤쳐 나가야 하는, 봉사의 외줄타기 같은 끝도 없는 험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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