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영감의 시대 2 / 직관도 논리도 아닌, 개구리 소리?ㅎ

해선녀 2015. 7. 17. 08:54

영감의 시대라고, 거창한 말을 들먹거리면서, 영감은 우리들 영혼의 지적 정서적 능력의 '요체'라고 말했지만, 정작, 나는 요즘, 그 영감을 자주 만나지 못한다. 지적이지만도 않고, 정적이지만도 않은, 그 둘이 다 합쳐진 정신적 능력, 하고도 그 요체...그것은 나같은 미약한 영혼에게는 어쩌면,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얼핏 설핏, 현실에서나 꿈속에서나, 밑도 끝도 없는 허접한 생각과 느낌의 실오라기들이나 아른거리다가 사라져 버리는 게 다인데, 요체는 무슨. ㅎ

 

그러고 보니, 고승의 사리가 생각난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정신의 요체? 그저, 뼈와 살과 피가 다 한데 녹아서 응고된 결정체? 물리화학적으로 그것을 분석한다고, 그 정신적 요체의 근원이 확인될 수 있을까? 혹시, 보통 사람의 화장장에서도 사리가 나오기도 하지 않을지? 것, 봐라, 또 이런 어줍잖은 생각들이나 하면서, 귀한 시간들이 흘러 가고 있다.... 밤바람이 서늘하여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닫으려니, 오늘도 개구리 소리가 요란하다. 새벽까지 개골거릴 저 녀석들은 참, 잠도 없다. 내 귀엔 끝없이 똑같은 소리로만 우는 것으로 들리는데, 저 소리들 중에서도, 영감있는 소리와 없는 소리가 있을까? 하늘이 들으시기엔, 아니, 어느 암놈 개구리가 들으시기엔... ㅎㅎ 

 

하다는 무당들은 영감이 많은 사람들이겠거니. 한 번, 그 영감의 신이 지피면, 그 눈으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그래서, 그게 맞으려면, 정말, 기가 막히게 맞는다. 어디선가 삐끗하면, 아주 엉뚱하게 빗나가서 탈이지.ㅎ 젊은 날, 그런 '신통한' 무당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먼데 있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는 듯이 꼭 그대로 그려냈다.  '영이 맑은 사람'이어서, 세상이 거울처럼 다 비친다고도 하던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는 거다. 한 점 그늘이나 가린 데 없이, 직관이 뛰어난 사람들. 

 

그런데, 점집도,무당집과 역학으로 사주를 푸는 철학관이 다르다. 그 둘을 다 하는 점집도 있겠지. 아, 지금 나는, 무당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보통사람도, 그렇게 영이 맑은 사람과 흐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려는 거다. '세상적 지식'을 다 비우라고 말하는 종교인들만이 아니고, 일반인들도 그런 말을 한다. 머릿속이 온갖 '잡설'과 '잡이론들'들로 가득 찬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떤 하나의 이론적 지식의 논리에 빠져 있거나, 여러 이론적 지식의 논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다 직관력이 떨어진다고. 어쨌든, 이론이든, 논리든, 그것들을 모두 비워야, 비로소, 맑은 유리창을 통해 보듯, 자연과 세상이 보인다고. 도대체, 직관과 논리는 어떤 관계라는 것인가? 직관은 왜 논리와 아무 상관이 없고, 이론적 지식이 많을수록, 또는 논리적 사고를 많이 할수록, 왜 직관력에 방해가 된다는 것일까?  

 

직관은 통찰이다. 철학은 물론이고, 과학적 이론도 가설이라는 통찰로 시작하여 그것이 얼마나 진짜인지를 검증하는 일이다. 그 진위여부 이전에, 나름의 통찰이 없는 모든 말은 무의미하고 맹목이며 죽은 말이다. 도인이나 성인의 말씀에도, 순간마다 살아 반짝거리는 어린아이의 종알거림에도 통찰은 들어 있다. 통찰이 없는 이론적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표절이거나, 그저, 닥치는대로, 주워 섬긴, 지적으로 무책임하고 불완전하며, 죽은 지식이다. 직관은 이론적 지식이라는 집을 짓기 위한 그 목수의 안목이다. 논리는 그 안목으로 짓는 그 집의 구조이자, 뼈대이다. 이런 비유를 계속한다면, 이론적 지식에서의 사실적 근거들은 그 집의 바닥이기보다 벽체가 아닐까 싶다. 그럼 바닥은? 자연과 인간이겠지.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올려 벽을 삼아? ㅎ 이 비유는 좀 엉성한가? 아무튼, 직관과 논리는 서로 무관하기는 커녕, 뗄래야 뗄 수 없는, 지식의 내적 조건들이다. 이 조건들이 충실하게 만족되지 않으면, 즉, 그 직관이 나무만 보고 숲은 못보거나, 그 논리가 너무 엉성하면, 삐끗, 세상을 잘못 보고 사실적 근거들을 잘못 골라 오거나, 잘못 다루는 오류로 빠져 버릴 것이다. 집이 잘못 지어지는 거라고.

 

그러니까, 직관이나 논리나, 잘못될 수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다 비우고 버려야 할 것인가? 직관은 그대로 두고 논리만 다시 세워? 그래도, 아무튼, 논리는 세워야 집이 되는 거 아니냐고. 무엇인가를 주장하는 건 모두 집을 세운 거 아니냐고. 논리를 몽땅 내다 버려야 한다는 주장, 그것도 집이 아니고 무어냐고...논문에서나, 역술에서나, 죵교활동에서나, 하물며, 시에서도, 오로지, 그 직관과 논리가 지혜에 이르도록 노력할 일이지. 詩에서도, 그것이 언어인 이상, 시적 논리가 있는 거라고. 그림에도, 음악에도, 다 있다고. 하긴, '지혜'라는 말도, 얼마나 함부로 쓰이고 있는지. 심지어, 원하지 않는 현실을 용케 잘 빠져 나가는 임기응변의 꾀쟁이도 지혜롭다고 칭하는 세상이 아니더냐고, 아고, 개골 개골 개개골...ㅎ  

 

복잡함은 단순함에 대비되는 말이지, 순수성, 혹은 맑음에 대비되는 말은 아니다. 복잡함이 있어야, 그것을 뚫고 내다 보는 직관도 가능해진다. 복잡함이 있음으로써, 그 순수는 더 순수해지고, 더 깊어질 수 있다. 촌철살인은 바로, 복잡함을 뚫고 떠오르는 영감이다. 그러므로, 복잡함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순수에 이르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순수에 이르기 위해 모든 논리를 비우거나 갈아엎을 일이 아니라, 사욕의 논리를 비우고, 억지논리와 엉성한 논리들를 비우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섭리와 그 속에 존재하는 인간을 더 크고 넓으면서도, 세심하게 들여다 보는 논리를 오히려, 정련시킬 일이다. 그것은 구비마다 직관이 있는 논리가 되고, 구비마다 명상이 되어 지혜에 이를 수 있다. 

 

단순함과 순수함은 다르다. 단순함은 말 그대로, 단순할 뿐, So what? 그것은 맹목이어서, 어디로 튈 지 몰라, 위험하다. 그것은 그저 단순함 그것뿐이지만, 순수함은 이 복잡하고 험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아파하며 빛이 난다. 그 순수의 눈빛, 직관에 이르기 위해 논리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마치, 뼈대없는 집, 피와 살만 있는 인간을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단순해지기 위해 많은 논리들이 얽히고 섥히는 복잡함을 피할 게 아니라, 순수해지기 위해 복잡함에 빠지지 않고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기면서 투과해 나올 일이다. 삶은 그래서 더 재미있는 것.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삶의 목적은 단순하고 쉬운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 그 재미로 우리는 살 수 있다. 교회에서나, 정치에서나, 학문에서나, 그 사욕과 엉성한 논리들로 인한 혼돈들을 맑은 거울처럼 비춰 줄 직관과 명징한 논리가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 

 

얼마 전, 무슨 대담에서 어느 새누리당 전의원이 이런 소리를 했다. 유승민의 IQ는 높은 모양이지만, EQ는 낮다고. 이것도,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이다. 주로, 자기 무리의 정서에 동조해 주지 않는 명문대 출신에게 하는 소리. 그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은 IQ보다 EQ가 높아야 한다고도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EQ는 과연 무엇일까? 단순히,'우리가 남이가?'가 '우리가 정의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은 단순히, 당에 대한 충성심이나 개인적 이해관계에 대한 상대방의 동조의 정도를 EQ라는 그럴 듯한 용어를 들먹거리면서 판정하려 든다. '의리''가 '정의'보다 더 중요한 사회, 지연, 학연, 족벌이 더 중요한 사회, 슬프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그런 사회이다. 서췅원은 거기다, 유승민의 사퇴는 불명예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고까지 했다던가? 그것도 영감이라고 우길 수도 있겠지, 그것이 진짜로, 왜 아름다웠던지 훗날, 그의 안목이 달라질 날이 있을까? 입 가진 자들이 하는 모든 말은 다 일리가 있다고, 일찌기, 코메디언 이주일은 '원 투 해브 예스'라는 말로 웃기기도 했었다. 비아냥이었기 보다, 사람은 누구나, 제눈의 안경, 제나름의 안목과 영감을 가졌음을 그는 일찌기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EQ, 그것은 결국, 영적인 교류와 공명의 능력지수이다. 직관과 논리가 그렇듯, EQ와 IQ도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몸과 마음이 그렇고, 그 마음의 知와 정서가 또한 다 연결되어 있다. 몸이 건강하면 마음이 건강하다는 말처럼, 앎이 가는대로 느낌도 간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마음이 내켜지지 않는다'라는 말은 그 둘 간의 어딘가가 다 밝혀지지 않았음이다. 늘, 사람은 아는대로 행한다. 생긴대로 논다고 말해 왔지만, 생각과 느낌과 행위는 우리 안에서 때로는 숨박꼭질도 하며 살고 있다. 살아 팔딱이는 아이들처럼. 

 

공감력은 반드시, 그 대상과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게 됨, 즉, 동감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빨간꽃의 열정을 오래 바라 보던 꽃이 보라색 공명의 다리를 건너가서, 파란색 영감의 꽃으로 피어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그들 간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저 지적이면서도 정적인 교류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 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 때로는 울퉁불퉁하고 콱 막힌 길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도, 저 골목 끝 어딘가에서 나타나는 당신, 내가 당신을 만날 꿈이 아직 살아 있는 사회, 그리하여, 느리고 답답하더라도, 더 깊은 영감의 바다로 함께 흘러가는 강물같은 사회, 우리는 이제, 격변기는 지나고, 점진적인 개혁의 시대로 들어선 나라라고 나는 믿고 싶다.

 

'페어리 스타'라는 꽃을 만나게 되었다. 어떤 아름다운 사람이 갖다 준 것인데, 참, 신통하게도, 지금 두 달째, 별처럼, 정령들처럼 예쁜 꽃들이 우리집 작은 베란다에서 계속 피고 있다.  2년 전, 보스톤 테러 때 읽은 호세이니의 책, '천 개의 찬란한 별들'을 생각나게 하는 꽃. 요즘은 조금 시들면서 꽃 수가 줄어들고 있는데,(이게, 다년생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아린아린, 손톱만한 이 작은 꽃들을 나는 해년마다 다시 만나고 싶다. 아직 보라색까지도 못간 핑크색의 작은 꽃. 나도,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영감과 공감으로 깨어 있는 한 송이 작은 꽃으로 조금 더 오래 피어 있고 싶다. 개구리들은 이제 잠이 들었나 보다. 이 개구리도 이제 자야겠지.

'노을 비낀 숲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묵정밭에서  (0) 2015.08.17
운명론과 거제여행ㅎ  (0) 2015.08.02
다나가 떠난 후  (0) 2015.07.17
영감(靈感)의 시대   (0) 2015.07.06
시인  (0) 201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