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책과 테러와 눈이 있는 4월을 보내며

해선녀 2013. 4. 27. 02:45

 

요즘은 거의 책만 읽고 (듣고) 지냈다. 언젠가, 음성파일로 담아 두었던 국내외 저자들의 소설책들을 혹시나 읽게 될까하고 여기 올 때 가져 왔었는데, 읽다 보니, 스물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다 읽게 되었다. 무엇이건 한 번 손을 대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빠지곤 하는 버릇이 아직도 내게 있다. 마침,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들'과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이 막 끝난 참에, 보스턴 테러 폭발사건이 일어나서, 소설 속의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아직 그대로임을 실감했다.  

 

호세이니는 아프가니스탄 카불 출신의 미국이민 의사, 처음 접하는 이슬람 문화였지만, 그의 책들은 내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소련군의 점령과 내전과 탈레반의 폭정, 911사태 이후 미국의 장악에 이르기까지,아프가니스탄의 격동하는 전쟁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 파괴되어 가는 문화와 절대빈곤 속에서도 오롯이 흔들리지 않고 살아남는 순수한 인간사랑의 이야기...과연, 종교적 이념과는 상관없이 인간 삶의 궁국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책이었다.  .

 

테러 용의자의 추격과 생포과정이 계속 보도되면서 온갖 관련대화가 하루종일 이어지는 방송을 듣고 있던 그 날, 폭발 피해자들과 보스턴 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그 아픔과 공포와는 별도로, 나는 그 용의자에 대한 연민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호세이니가 그랬듯, 무엇보다도 우선 이 사회의 힘있는 자로 살아남기 위하여 의학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던 총명한 19세의 모범생 쟈하르, 그가 기어이 극단주의적 테러리스트가 되고 만 것을 이슬람이나 민족적 자긍심 때문으로만 말할 수 없다. 그 후로도 계속되고 있는 대담들을 들으면서, 나는 미국사회가 텔레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적의 때문에 이슬람 전체가 배척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일까? 형의 영향으로 극단주의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중성격이라든가, 그를  '지행의 불일치', 정신심리적인 이상상태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병원에서 이제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는 그는 사형을 당할 수 있다는 말에도 조금도 불안해 하는 기색이 아니라고 한다. 그의 부모들 말대로, 그는 오로지, 이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배척을 당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는 그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착하고 총명한 모범생'이기만 했던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래, 아무도 모르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보복의 일념으로 그의 영혼이 가득찼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저 호세이니가 그렷던 주인공들처럼, 어떤 종교적 이념과도 무관한 인간보편의 순수한 사랑의 촛불이 아직은 가늘게나마 그의 영혼 한 구석에 피어 오르고 있지 않았을까? 어떤 극악한 상황에서도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타오르는 인간에 대한 더 깊은 사랑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앎이니 지식이니하는 말들에 대해 편견들이 많다. 단순한 정보적 지식에서부터 영혼적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모두를 다 지칭할 수 있는 다의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인데도, 굳이, 깨달음이니, 지헤니 하는 것들과 구분해서 쓰곤 한다. 지행불일치라는 말도 그런 불투명한 개념들의 연장선에서 하는 소리들이다. 그런 말을 할 때의 '지'가 저런 단편적 정보적 지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건 하나 마나한 소리가 되고 (우리는 모든 입력된 정보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므로), 소위, 지혜, 깨달음을 뜻한 것이라고 하면, 인간은 신처럼 완전하지 못해서 제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라도 아는대로 다 행하지 못한다는 뜻이라면 몰라도, 지와 행이 원래 무관한 것이라는 뜻이 된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어떤 행위를 하고 있든지 간에, 우리는 그 행위를 하는 동안 순간마다 그 안에 어떤 생각을 담아 가면서 하고 있고, 그 때 그 생각은 곧 앎이고, 그것은 그 순간의 행위와 분리된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다는 말을 나는 지금 하고 있다. 무슨 거창한 이론들을 들먹거릴 것도 없이,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과연, '아무 생각없이' 무슨 일을 하거나, 한 가지 생각을 먼저 하고 나면, 그 한 가지 행위만 할 뿐 모든 생각이 정지되어 버리고 몸만 살아서 움직이는 그런 존재들인가?

 

문제는, 지와 행의 관계는 1대 1의 관계로 파악될 수 없는 복합적이고 심중적인 관계라는 것을 간과한 데서 온 것이다. 어떤 단순한 앎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그 영혼 속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 다만, 남에게서나 자신에게서나, 그 위치와 기능이 순간마다 다 투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런 어떤 앎을 대변하는 유일한 어떤 특정한 행도 없고, 나서서 하는 어떤 특정한 행도 그것을 대변하는 유일한 앎이 없다. 여러 변화 중인 가능태들 중에서 일단, 어떤 것을 선택하여, '해보는 (Try out) 그런 것이다. 지와 행 사이, 어느 방향으로든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창의적 과정이 들어 있다.  마치,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에 붓을 든 화가처럼, (혹은 그가 붓대신 숯을 들었을 수도 있다) 모든 전쟁도 그 공격과 보복 사이에는 어떻게 해도 정당화될 수 있고 어떻게 해도 정당화될 수 없기도 한 '엿장수 마음대로'의 실천적 판단이 들어 있다. 그런데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게 과연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인지?

 

뇌의 전두엽이 손상된 환자들의 행동특성 중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은 잘 하는데, 그에 따른 행동적 실천에 관련된 판단은 잘 못내리더라는 연구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인접한 두 날 중 어느 날로 약속을 잡을 것인가하는 사소한 문제에서도, 날씨, 교통, 인접된 다른 볼일과의 연계성, 등 온갖 요소들을 꼼꼼히 다 비교분석은 하면서도, 그 중의 어느 요소를 중심으로 행동을 결정할 것인가의 판단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전두엽이 아직 발달되지 않은 어린아이도 그렇다는 것이리라. 이것을 가지고 또 앎과 행의 괴리의 예로 몰아가지 말자. .그는 지금, 행, 실천에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판단에 장애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이성적 분석에 따른 합리적 의사결정과는 다른, 직관과 통찰에 의한 판단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콤 글래드웰의 Blink라는책에서 읽은 이야기로, 그는 이 순간적인 통찰의 능력을 '적응적 무의식'이라고 부르면서, 어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석에 의한 결단도 능가할 수 있는 이 능력이야말로, 거의 본능적인 섬광과도 같은 판단으로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모든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현대인인의 필수적인 능력으로 강조하고 있다. '짚힘'의 능력이라고 할까,'감'이라고 할까...같은 책에서, 캘리포니아의 폴게티 박물관이 거금을 들여 가장 완벽하다고 판정한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의 석상 쿠로스를 수많은 자료들을 14개월 동안이나 검토한 끝에 거금을 주고 사들였을 때,한 눈에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 보는 전문가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인상깊었다.

 

그는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물론 짚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온미국인이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메너에 홀려, 편견과 차별의 눈으로 뽑았던 워렌 하딩이라는 대통령이 미국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된 대통령이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훙미롭다. 도매금으로, '지혜가 없는 국민이 되어 버렸다고 할까? ㅎ   '무리'교수의 이야기로 유명해진 작가 미키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들'은 바로 그런 순간적인 통찰과 판단의 오류들로 이어지는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튼, 정보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을 평가하고 선택하여 '해보는' 실천적 판단의 능력은 별개의 능력이다. 이 능력은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우리들의 '앎'의 구조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앎으로, 종합젹이고 그야말로, 융합적인 능력이다. 정보적 지식은 실천적 이성, 깨달음의 재료로서, 요리사에게 식재로가 그렇듯, 그 자체로서 아직 창의적인 하나의 전체로서의 깨달음은 아니다. 이것 저것, 재료를 마구 섞어 놓는다고 좋은 요리가 되지 못하듯, 정보가 많다고 어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재로의 많음이 아니라, 재료들과 그 상황을 보는 안목이다. 그 안목을 이루는 순간적인 통찰력이라고 해서, 무슨 신통력 같은 것이라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앎에는 종교적, 정치적인 혹은 예술적인 가치판단이 들어 있고,  오랜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예민한 감지능력과 오랜 경험에서, 그것을 순식간에 알아 차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일 뿐. 아무튼, 노년에 이르러서도,삶의 의지와 그 수행의 과정에서 더 이상 온갖 정보적 지식 나부랭이에 끌려 다니며 무의미한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온 날들 중에서 가장 부끄러운 때는 바로 그렇게, 얄팍한 지식과 이해타산의 영리함에 휘둘렸을 때이다.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지행의 관계는 이성동체의 관계이다. 앎이 먼저냐 행이 먼저냐의 문제도 따라서, 사이비 문제이다. 지행불일치에 대한 우려가 오죽했으면, 변덕 많은 머리와 가슴을 따르지 말고 발부터 따르라고 하는 시인도 있지만, 앎과 행은 존재의 의지와 그 수행을 한 덩어리로 어우르는 영혼 전체의 울림과 동조의 관계에 있다. 어느 순간에도, 생각 따로 행동 따로 하고 있는 존재는 없다. 음식에 소금을 넣는다는 것이 후추를 넣고 있는 사람은 그걸 소금이라고 '잘못' 알고 넣고 있다. 때로는 집중하여, 때로는방심하며, 때로는 진부하고 고지식하게, 때로는 기발한 천재의 아이디어로, 우리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행하고 있다. 그가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그는 그 존재의 순간마다 어떻게 그 관계를 감지하고 운행해 나가는가에 따라 저 수 천 개의 찬란한 별들과도 같이 명멸하며 사랑한다. 그 무엇인가를 '감지하면서', '해 보는 것', Trying out WITH SOME Thought'는 그냥, 시행착오가 아닌, 창의적인 실험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어떤 앎을 가지고, 주어진 상황에 대응하면서 피드백하고 책임지는 행위이다. 한 개인이나 국가나, 한 사회의 주류나 비주류나, 젊었으나 늙었으나, 덤벙덤벙, 혹은 꼼지락꼼지락... 언제 어느 때고, 우리는 생각하면서 행동하며 그리하여 존재한다. 

 

느리고 답답할 지언정, 젊음의 그 질주하는 열정과 위태로운 지식과 정치적 종교적 이념들이 빚어내는 혼돈과 모순들을 이제는 넉넉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서도, 부단히 일관되고 통일성이 있는 내 영혼의 지적 정의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것, 단, 유머를 잃지 않고서...내게 남은 과제는 이제 그것뿐이다. 저 아직은 어린 쟈하르라는 영혼이 그런 아름다운 기회를 그 많은 사람들에게서 빼앗고 스스로에게서도 빼앗은 일이 너무 슬프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세상의 평화와 자유의 실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마는 것이 현실인 이 작은 지구촌에서 더 인내하며 다른 더 창의적이고 설득력 있는 앎과 행을 모색하며 살아가다 보면, 자신에게서나 세상에게서나 더 깊은 지혜와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지...호세이니는 지금, 유엔 난민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부와 명예와 알량한 '지식'이라는 것들을 넘어서는 순수한 영혼 그 자체의 앎, 지식, 깨달음이 그의 그런 실천에서도 엿보이는 듯하다. 어제 들은 방송대담 중의 어느 교수의 말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도 이젠 여성에 대한 이슬람적 차별을 버리고 의회의원의 20프로가 여성이고, TV체널 80개, 휴대폰 보급률이 80프로가 될 정도로 교육과 문화수준이 높아졌고, 아직도 일각에 진을 치고 있는 과격주의자들, 탈레반이 재집권하는 것을 국민들은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폭력대신 자유로운 대화의 가치를 알게 된 것이다. 북한도 테러는 원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어서, 좋은 대화의 길이 다시 열리면 좋겠다. 박근혜도, 안철수도 더 좋은 요리사가 되어 김정은과 함께 서로 요리법을 나누는 요리대회라도 열면 좋겠다. 체첸도, 극렬주의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유순하지만 결코 유순하지만은 않은 독립민족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갈수록 눈이 더 빠르게 흐려진다. 그에 따라, 내 영혼도 흐려져 가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기는 하다. 갈수록 더 깊어지고 투명해지지는 못하여도,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좀더 늘여, '내 생각은 자주 어두워지고 햇갈리고, 그 행위는 더디고 어둔하여 자주 실수하더라도, 그러므로, 나는 더욱 내 영혼을 챙기기를 놓지 않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주문이라도 외우고 싶다. 4월도 말로 접어든  후에도 사흘거리로 눈이 오더니, 오늘은 밝고 따스한 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에 눈은 흔적도 없이 다 녹았다. 이제 정말, 꽃이 피겠지? 건너편 나무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4월의 눈이라...이건 잔인한 현실이었던지, 자비로운 게절의 유머였던지, 저 새들에게나 물어 볼까나? 

 

 

 

4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