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수선화를 받다

해선녀 2013. 2. 5. 12:21

 

 

마음이 어수선해지려는 2월, 두 친구가 양평에 와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그 두 친구의 친구도 한 명 같이 왔는데, 그녀는 수선화와 히야신스 화분을 선물로 들고 왔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의 독신이었다. 

 

독신이기만 했다면,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을 터이다. 그런데, 작고 앙징맞은 그 꽃이 너무 예뻐서,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 들었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혼자만의 관념과 망상 속에 자신을 던져 놓고 삶의 스토리를 다 놓아 버린 듯한 게으름에 빠져 살고 있는 나와는 사뭇 다르게, 그녀는 평생을 오로지, 꽃과 나무와 흙을 만지며, 순정하고 유순하게,  자연의 생명력에 귀를 기울이면서 기꺼이 그 시중을 드는 삶을 살아 온 사람이었다. 취미로 농원을 하셨던 아버님에게 배우며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지만, 지금도 여전히, 흙만 보면 씨앗을 뿌리고 키우는 것이 유일한 낙이란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소박한 생명력을 가진 사람 같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화단을 비롯해서, 집집이 손바닥만한 작은 공간만 허락되어도 화분을 마련해서 씨앗을 심어 주고, 싹을 틔워 내어  꽃나무를 가꾸고,  기쁨을 나누면서, 그 꽃이 잘 자라기를, 그 꽃을 잘 키워 주기를 기원해 왔다는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을 나는 무엇으로  따라갈 수 있을까? 꽃과 나무와 흙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거듭 말하는 그녀 앞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더 알며, 아는 게 있다고 한들, 그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군더더기들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꾸만 어수선해지는 마음도 그래서였다. 무엇을 해도, 덕지덕지, 내가 나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을 그대로  매단 채,  원하지도 않는 길을 끌려 가곤 했다. 이게 길이다 싶을 때도, 정갈하고 오롯한 마음으로 임하지 못했던 것. 

 

양평집을 지을 때부터, 수선화를 심어야지, 생각만 하고 지낸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봄이다. 수선화는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아해 온 꽃이다. 만돌린을 켜며, 일곱 송이의 수선화, 그 노래를 가르쳐 주신 한 교수님을 우리는 학문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무척 따랐는데, 그 분이 우리들에게, 어느 날, '어이, 두 사람 결혼하지...' 농담처럼 던진 말씀을  마치 무슨 계시인 양 받아들여, 공부만 같이 할 뿐, 손도 한 번 잡아 볼 생각조차 안해 본 사이였던 내가 오로지, 함께 갈 수 있을 듯한 공부길이 좋아서 결혼작심을 했던 것이다. 그는  꼭 내 생일이 아니어도, 수선화 화분을 자주 사와서 식탁에 올려 놓고 'For You~' 하며, 애교를 부리기도 하며, 가끔씩 말라 들어갈 것 같은 우리 삶의 의미를 다시 끌어 올리기도 했다. 마지막까지도 야생화 화분을 손질하며 지내던 그는 양평에 집을 짓고 꽃과 나무를 키우며 살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이 화분의 꽃을 다 본 후에, 구근을 잘라서 말린 다음, 마당에 심으면 내년에도 그 꽃을 볼 수 있고, 점점 새끼도 칠 것이라고 그녀는 말하며, 심는 방법을 세세히 알려 준다. 꽃나무에 대한 그녀의 앎은 그 깊이가 무궁무진한 것 같다. 제몸 하나도, 제 할 일 하나도, 제때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어벙어벙 느려 터지게만 살고 있는 내가 정말 부끄럽다. 내년 봄부턴, 수선화가 소복소복 피어나는 마당을 가지리라는 꿈, 나는 이 꿈 하나라도 꼭 실현해 보리라. 그녀처럼 흙 속에서 살지는 못해도, 돈 한 푼 없어도, 우리의 순정한 마음 꼭 잃지 않으리라,  노래 부르고 말하던 우리가 아니었던가?  또 잊을 뻔했던 일을 늦기 전에 미리 상기시켜 준 그녀, 그녀를 나도 친구로 삼고 싶다.

 

 

지난 글들 중에서:

일곱 송이의 수선화 http://blog.daum.net/ihskang/621434

워즈워드의 수선화 http://blog.daum.net/ihskang/697794

몰다우강을 들으며 http://blog.daum.net/ihskang/9064515

강물처럼 흐르다 http://blog.daum.net/ihskang/570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