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버밀리언에 봄이 온 아침에

해선녀 2013. 3. 30. 22:38

 

 

새들이 아파트 앞 거대한 나무에 진을 치고 앉아 합창을 해대고는 어디론가, 떼를 지어 날아가곤 한다. 온세상에 봄이 왔다고 소리치며 다니는 것 같다. 멀리서, 북으로 가는 길인지, 오리떼들의 꽥꽥거리는 소리도 크게 들려 오고, 가까이에서 우는 이름모를 새의 소리도 참 아름답다. 봄은 확실히 오긴 온 모양이다. 지난 주중 낮엔 햇살 따뜻이 비치는 날도 많아서 현관문을 열어 두었더니,  거미가 한 마리 기어 들어와서 아이들이 물스프레이를 뿌리며 거미를 쫓느라고 한바탕 신나는 전쟁놀이를 하였다.  꽃샘추위인가, 주말엔, 아이들과 저녁 먹으러 가면서 털 달린 옷을 입고 나갔는데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고,월요일엔 눈까지 와서 아이들은 스노우 팬츠에 털모자와 장갑에, 부츠까지 신고 학교로 갔다. 4월에도 눈오는 날이 예사라고 한다. 

 

어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는 부활절 브레이크, 화요일부터는 아이들이 에프터 스쿨, BSA를 안 가고 수업후 곧장 스쿨버스를 타고 집으로 올 것이다. 집앞에서 스케이트보드나 롤러 스케이트도 타고,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도 갈 것이어서 좋아라 한다. 유치원생 준오는 공항에서 만났을 때부터, 그랜마, 저번에 수학 많이 가르쳐 주셨잖아요..하며 11 곱셈도 척척 해보이더니, 3학년 짜리 태오는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강남 스타일 때문에 한국어와 한글에 관심이 많아져서 그랜마, 한글 좀 가르쳐 주세요 한다.  안그래도 이번엔 한국말을 좀 가르치려던 참인데, 잘 됐다. 그 동안 있었던 태오의 언어문제 때문에 집에서도 영어만 써 온 탓에, 아직 한국말은 단어만 스무 개쯤 겨우 아는 정도지만, 한글 모음과 자음들, 그리고 몇몇 글짜들을 가르쳐 주니 금방 이해한다. 일단, 알파벳들을 외우게 하고, 더 많은 단어들를 읽으면서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줘야겠다.      

 

요즘은 컴앞에 앉아서 글을 쓰는 것보다,  가만히 누워서 라디오를 듣거나, 글읽기(듣기)를 하는 게 더 좋다. 공지영과 신경숙의 책들을 일곱 권을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내리 읽다 보니, 그것도 좀 지친다. 처음엔 시차적응이 안되어 밤에 잠이 안와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읽다 보면 그치기가 어렵다.  악기소리는 아직 낼 생각이 안난다. 윗층 사람에게 신경 쓰이는 것도 좀 그렇지만, 관은 긴 음과 고음을 불어낼 힘이 자신없고, 현은 허리도 약해진듯, 오래 서 있기가 자신없다. 작년 왔을 때보다 기운도 떨어지고 눈도 훨씬 더 나빠진 것을 알겠다. 이 집은 다 좋은데, 거실이 너무 어두운게 탈이어서, 웬만큼 불들을 켜놓지 않으면, 아이들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얼른 보이지도 않는다. 소파까지 내겐 너무 어두운 색이다. 온집안이 털이 긴 카펫이어서, 작은 물건들이 떨어져 있어도 잘 안보여서 청소기는 에미가 돌릴 때까지 뻔히 보면서도 냅두고, 나는 큰 것들이나 주섬주섬 치우고 만다.

 

몸이 늙어 감에 따라 매사가 마음같지 않아진다는 말들을 자주 떠올린다. 마음으로는 뻔한데, 냅두고, 냅두고, 산으로 가고 싶은데, 들판으로나 가고 말아 버리고,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 보이는 일도, 이러니 저러니 시비논쟁하는 게 이젠 다 귀찮고 부질없어 보인다. 다 좋은데, 그러다가, 정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사리판단 자체가 다 흐려져 버리지 않을까, 그것이 두렵다.시비하지 마라...바보처럼 살아라..웬만하면, 그런 태도로 살려고 해온지는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내 머릿속 판단은 투명하다고 믿어 왔다. 나를 포함한 상황 속의 사람들의 심리파악이나 논리적 일관성, 명료성에 그리 문제를 느끼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그마저 자신없어져 간다. 시각적인 능력이 떨어지는데서 오는 시각정보의 결핍이 어쩔 수 없이, 총체적 인지와 사고력, 그리고, 그 행위력에까지 영향을 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눈이 보배라고, 우리 영혼의 창문이라고 해온 것이겠지...  

 

그런데, 적어도, 요 몇 년 동안을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공부하고 운동하며 지내오면서 얻은 생각으로는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물론, 어떤 특정상황에서의 시각정보 부족으로 기민성이 떨어지고, 그 상황을 오인할 수는 있어도, 전반적인 인지나 사고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더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내 개인적인 관찰로는, 시각장애인은 정안인보다도 그런 '오류의 가능성'에 더 민감한 것 같았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도 한 두번이어야지, 요즘 장님들은 제가 만진 부분이 다가 아니더라는 걸 너무 많이 겪어서 잘 알게 되었다고 할까...ㅎ 물론, 그 반대로, 눈앞의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자신의 생각에만 갇혀 있는 시간도 길어서 상황판단이 그만큼 느린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본 것에만 갇히고 휘둘릴 위험도 그만큼 적다.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문저라고 보는 시각으로는 참 답답한 일이지만, 자신의 내면을 잘 감시하고 확인하면서 바깥상황들과의 관계에 지력과 감성을 모으는 데는 오히려, 눈을 감고 사는 연습도 필요하지 않을지.. 눈을 감고 하는 체험학습장도 생겼다던가....  그게, 그냥 재미로 해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시각장애인이라고 뭉뚱그러서 말했지만, 학력, 경제력, 사회적 능력등이 너무나 다양한 것은 물론이고,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중도실명이나 실명으로 가고 있는 중인 사람도 많아서, 시각장애인의 성격적 특성이나 인지적 특성에 대해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반인들보다는 거동이 조심스럽다는 당연한 행동적 특성 외에는 거의 다, 자신이 가진 고유한 특성들이 아닌가 싶다. 전맹인들에만 한정시켜 본다고 해도, 내가 본 바로는, 그것도 천차만별이다. 무지하고 자기중심적이고,혹은 열등감이 너무 많거나 공격적이거나, 과잉방어적이거나 불안이 많아서 너무 다변이고 과잉 에너지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명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많고 침착하고 예의 바르고 사려가 깊은 사람이 있다. 나이나 성별이나 학력, 경제력 등과는 전혀 상관없다. 복지관 같은 곳에라도 나올 생각을 안 하고 집안에만 틀어 박혀서 우울해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지관에도 나올 시간도 없이, 어떤 일이건,  사회활동이 활발한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다 개인적 특성일 뿐, 일반화할 수 있는 특성이 없어 보인다는 거다. 실제로, 그런 연구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오래 전, 내가 한창 내 병인 망막색소변성증에 대한 연구물들을 번역하고 있었을 때 본 바로는, 그런 것도 있었다. 이 환자들은 지능이 높고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나도 이제 곧 전맹인이 되겠지만, 복지관에서 그 동안의 내 눈은 조금 나은 편이어서, 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조금씩 도우면서 정안인들 속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 없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직원들을 비롯한 정안인들과 전맹인들 사이에서, 나는 늘 현재의 나만이 아니게,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과거의 나를 비춰 보고 미래의 나를 내다 보면서 살 수 있어서 좋았다. 늘 깨어있을 수 있었다고 할까... 

 

그런데, 나는 요즘 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에서, 뇌졸증을 앓은 후 뇌세포가 망가졌던 그 엄마처럼, 나도 시신경을 관장하는 뇌의 전두엽 어딘가가 점점 더 망가지면서 결국, 치매에 이르고 말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생겼다. 어제는 버리려고 냉장고에서 꺼내 놓았던 반찬을 이틀만에야 발견하였고, 모처럼 담근 배추김치를 냉장고에 너무 늦게 넣어서 너무 빨리 시어질까 무서운데, 정작 저녁상엔 또 잊어버리고 김치는 내놓치도 않았다. 자주, 무얼 깜박깜박 잊는 건 예사이고, 이런 어줍잖은 글 하나도, 전처럼 내리 쓰지 못하고, 몇 번을 오르내리며 수정을 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어디서 문맥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감을 못잡거나 잡으려고도 하지 않고, 생각나는대로, 저 엄마가 지하철에서 남편을 놓치고 그랬던 것처럼, 아무데서나 삼천포로 빠져 가서 주저리는 것이다. ...ㅎ 그 나이가 되면 다 그래요...뭐, 더구나, 책을 읽으면, 누구나 다 자기동일시가 일어나니까, ...이런 소리가 들려 온다. 태평양 건너서....ㅎ그래, 잊어버리고, 잠시 착각하고...그런 건 용서하자. 다만, 생각이나 행동이 적어도 나 자신에게 뒤죽박죽이 되지나 말기를...ㅎ

 

 부활절 브레이크 첫날이었던 어제는 모두 공원에 나가서 한참을 놀았다. 화창한 날씨였지만, 나는 여전히 털달린 옷을 입고 나가 앉았고, 뛰고 노는 꼬마 아이들과 그 부모들은 대개 반팔소매 차림이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아이가 무슨 숙제라도 하는 것인지, 이어폰을 낀 채로 박자에 맞추어서 웅얼웅얼 시를 따라 외우며 그네를 밀다 간 뒤로, 한창 피어나는 꽃같이 예쁜 중학생 여자애들이 와서 끝없이 수다를 떨고 간다. 에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태오 또래의 아이와 함께 온 어떤 여인이 에미를 반긴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저리 오래 하나 하며, 나는 맨손체조를 하였는데, 알고 보니, 작년에도 이야기 들었던 oo의 엄마였다.

 

그녀는 일년간 계속되었던 같은 학교 교수인 남편과의 완전한 이혼판결을 받아 내고 따로 살 집을 구하는 중이란다. 자신의 교수직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이 학교로 와서 강사직으로 일해 왔던 그녀. 며칠 전 그녀의 소식을 물었더니, 강사직은 그만 두고 대신, 행정부처 일로 옮겨서 일하게 되었단다. 의료보험을 비롯한 생활비 걱정은 없게 되었지만, 집과 아이들을 양쪽이 다 양보하지 않아, 남편이 지하로 옮기라는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 무슨 그런 판결이 다 있느냐고 했던 건데,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따로 살면서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 맡기로 했다나...아니, 아이들이 무슨 물건이라도 되는 건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큰아이는 더구나, 전부인의 아이라지 않는가...그녀가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는...지난 발렌타인 데이엔 여전히 미니 스커트 차림의 다른 여학생이 선물을 들고 남편 방을 들락거리고, 남편이 바람났던 그 여학생은 또 다른 교수의 방을 들락거리고...이 변하고 변하는 사람들의 손에서도 아이들은 자라나겠지. 또 변하고 변하면서.....

 

한밤중에, 서울의 조카 결혼식 축의금도 보내고, 두어 군데 송금할 일이 있어서 일어났던 건데, 오랫만이기도 하지만, 텔레뱅킹을 단번에 하지 못하고 몇 번씩을 실수해 가며 겨우 끝내고 나니, 또 잠이 안와서 이 글을 쓴 건데, 지금부턴, '가시고기'를 읽을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한다. 아무리, 요즘은 아무 것에도 매이는 것이 없어서, 그저 무한정, 꼴리는대로, 캥기는대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무언가를 잡았다 하면 또 못놓을 것이 뻔하니, 일부러라도 눈을 좀 붙여야 될 것 같다. 오늘은 수 시티로 나가서 아이들을  첰이치즈에서 놀게 하고 점심도 먹고 오기로 하였는데, 가서, 봄볕에 꼬박꼬박 졸기나 하고 앉았는 늙은 암탉 같은 할매 꼴은 안되어야 할 것 아니겠나?  ㅎ 아고, 근데, 벌써, 아침이다. 녀석들이 봄강아지들처럼 깨어나서 종알거리며 거실과 안방을 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처럼의 휴일이니, 저런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붙이고 있어 보려던 내 옛날 모습이 떠오른다. 나도 자기는 틀렸으니, 커피나 끓이면서 아이들을 뭐로라도 꼬셔 내야겠다...ㅎ

 

 

 

 

 

 

 

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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