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새 집안 분위기가 바뀌었다. 서재로쓰던 방을 이제 곧 결혼할 막내의 침실로 바꾸느라고 온집안을 뒤집은 것이다. 처음에는책장들을 방안에서만 이리 저리 옮겨 놓고 며칠 바라 보다가 아무래도 새로 들여 놓은 침대와 한 공간에 두기는 너무 무거워 보여 다시 거실로 베란다로 꺼내 놓고 또 며칠 바라 보다가 기어이 베란다로 간 책장의 책들을 거의 다 없애고 빈 자리엔 온갖 잡동사니들을 넣어 두엇다. 머잖아, 그것들도 다 비워질 것이겟거니....
.이번에 마지막으로 없앤 책들은, 지금까지 그래도, 그래도 하며 끼고 살던 문학, 교양류들이 대부분이다. 철학총서들 외엔 전공책들은 집에는이미 중요한 것이 별로 남아 잇지 않앗지만,내가 번역하거나 몇 페이지 끼어서 쓴 책들 각 한 권씩과 가까운 은사님들의 책들만 조금 남겻다. 그래도...당분간은 전자 돋보기로, 눈을 찌푸려 가며 가끔 들여다 볼 일이 잇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문학, 교양류들은 전자 도서관의 책들이나 잘 이용하면 다행이다 싶어서 저자들의 싸인이 들어 잇는 페이지만 잘라내고 다 누구에겐가 주거나 버렸다.
식탁도 창가로 바짝 옮기고 안쪽 벽에기대어산을 건너다 볼 카우치도 하나 놓았다. 이제 주방옆의 이 공간이 더 아늑해졋다. 이참에, 프로잭션 티비도 없애고 작은 벽걸이 티비도 하나 주문햇다. .산장에 가 있는 그에게는 전화만 간단히 햇다. 우리는 이제 그런 큰 거 놓을 공간도 없고 전기세만 많이 나온다고..안식년때 미국서 일년 살면서 사 쓰던 소소한 물건들과 함께 가지고 들어온 엄청나게 큰 그 넘을 바라 보기만 해도 나는 가슴이 답답햇엇다. 애착을 가지고 즐기던 그에게는 좀 미안하기도 햇지만, 미리 몇 번 입질을 햇던 터이라, 이번엔 선선히 허락을 한다.
책장들이 비워 준만큼의 자리에 화장대와 옷설합을 사다 넣고 예쁜 램프도 하나 사넣엇다. 모두 안티크 스타일들이다. 한 이년 쓰다가 공부하러 떠날 아이들이라면서 무얼 그리 예쁜 것들을 사고 그러느냐는 소리도 들엇지만, 집을 사주는 사람들도 잇는데 그것도 못하면 되겟는가 싶었다. 애들이 떠나면 내가 받아 쓰면 되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현실의 굼들을 다 버린 것은 아니라는 증거이겟지...
그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신혼때부터 우리집에서 가장 그윽한 공간으로 자리해 오던 서재가 점점 줄어 들더니 이제 달랑 책장 하나로 거실에 남게 된 셈이다. 그는 내가 차마 버리지 못한 책들까지 왕창 내버렷다. 정년을 하면, 연구실의 책들은 다 어쩔 것인가 하니 대부분 학교에 기증할 것이란다. 글쎄...그건 그 때 두고 봐야지...집으로 가져 오거나 따로 개인 연구실을 차리는 사람들도 많으니... 대신, 저 참하고 예쁜 아이들이 쓸 공부방과 침실이 생기지 않앗는가. 애써 만들엇지만 제대로 즐기지 못햇던 서재 앞의 작은 테라스가 쟤네들이 아침잠을 깨어 자주 나가 앉지는 못해도 시원한 눈을 들어 내다 볼 공간이 되어 주면 좋겟다. 이제 화분들을 정리해서 내다 놓고 플랜터에 곷모종을 심을 차례다.
어쨋든,' 지금 우리는...' 방이 달랑 세 개인데 우린 안방 하나만 쓰게 되엇지만, 건너방 두 개를 왓다 갓다거리며 재잘됄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이다. 그렇다고 안방을 내어 주고 우리가 건너방으로 가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에게는 좀 미안했엇지만, 나는 시부모님을 모실 때는 물론이었고, 시 어머니 한 분만 모실 때도 우리가 문간방으로 나가고 안방을 내어 드리는 것이 마음이 폇해서 꼭 그리 했었다. .그나마, 내년쯤 우리가 시골로 내려 가면 저 막내 부부도 분가시켜야 하지 않겟는가....오래 끼고 살 수도 없는 형편이다. ..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떠맡다시피 햇던 학교 일을 한 학기 미리 앞당겨 끝내기로 하고 산장으로 간 것이다. 술마시고 출장 다니고 사람들을 모아 이끌어 가는 일은 이제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의 건강과 일년 남은 정년을 위한 마무리에 집중하겟다며 후임자 선풀 위원회까지만 주도하고..'그 동안 수고하셧습니다...라는 리본을 달고 한창 꽃을 피우더니 이제 그마저 시들어 가고 있는 양란 화분을 바라 보며, 아닌게 아니라, 그 동안 그는 너무 수고가 많앗다는 생각을 한다. 자신의 일은 모두 뒷전으로 돌리다시피 하고 학교일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다시피 햇던 그가 아니엇던가...자세히 보니 어느새, 묘하게도, 늘어져 내리고 잇는 양란 꽃대 사이에 빠알간 꽃무더기가 하나 봉긋 솟아 있다.
이제 그는 마침 교생실습 기간인 학부 강의의 뒷마무리는 제자에게 맡기고 석박사 논문지도는 주로 온라인으로 하고 학생들도 산장에 자주 가기로 햇으니 집에 오는 것은 이제 그렇게 잠시 잠시 학교일로나 병원 갈 때 들릴 때뿐일 것 같다. 아침 저녁으로 산에 오르고 죙일 공부만 하는 모양이다. 술마실일이 없고 담배도 줄이고 산채와 그 싫어하던 잡곡밥을 먹으며 산장생활이 몸에 베어 간다는데 적어도 막내 결혼식까지 남은 한 달을 계속 그렇게 지내 볼 생각이란다. 겨드랑이와 팔의 통증은 아직 계속되지만 진통제를 줄인 것을 감안하면 많이 나아진 것인지...며칠 후에 다시 검사해 볼 것이란다. ..
그렇게, 그렇게,가는 것이다. 당신이나, 나나, 옛어른들이 뒤주와 곡간의 키를 넘기듯이, 제자들과 자식들에게 현실적인 삶의 키들을 넘기기 시작햇음이리라. 사람이 회한이야 왜 없겟는가마는, 홀가분하게, 그러나, 마지막까지 애정의 눈길을 그치지 않으며...이 향기로운 봄날이 가듯이 그렇게 가볍게, 우리도 가고 잇는 것이다. . 우리의 비움과 비워져 감이 이렇게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정신적으로, 진실로그렇게 되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