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수다만발

해선녀 2009. 5. 10. 03:06

 

화병과 찻주전자의 수다...ㅎㅎ.

(화병은 예전에 만든 것이고 찻주전자는 지금 만들어서 말리고 잇는 중)

 

 

그래, 명희야, 이 세상은  .신호들로 가득 차 잇지..우리가 입어 온 수많은 옷들, 책들, 설교와 설법과 강의와 미사가 다.나름대로  꽃다운 신호들이자 저 실재라는 피안, 최고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건너가고 올라 가기 위한  똘방한 징검다리들이고 사다리들이지. 이렇게 우리가 맨날 만나 수다하며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 받게 해 주는 이 DAUM도 얼마나 멋잇는 우리들 존재의 수단이냐, 참말로종종 좀 삐그덕거리고 내가 .자주 물 안주어서 시들어 쌓아서 탈이지...ㅎ

 

 수단들이 없이 목적에 이를 수 잇는 존재는 신 밖에 없지. 인간도 영혼적인 존재이지만 육체라는 수단 없이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고 육체만 잇으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닌 시신일 뿐이니까..그런 의미로는, 니 말대로, 신호와 실재,  수단과 목적을 평행선에 놓는다는 말은 완벽하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평행선....평행선에 놓는다는 말을 우리 이렇게 재해석하면 어때?..'개념상', 목적이 없이는 수단이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 논리적 관계.....둘은 서로의 존재를 전제하고 함축한다..신랑이나 신부라는말처럼....그런데, 사람들은 이 신랑신부를 구별 못한다...ㅎ.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펄쩍 뛰겟지, 물론...신랑신부의 구분은 '사실적인' 구분이고 그건 눈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잇는 게 사실이니까..그런데, .저 목적과 수단이라는  '개념적인' 구분은 '사실적인 구분'이 아니고 ' 논리적인 구분이어서 눈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구?되는 거란 말이지.... 다행한 건, 그래도 우리는 모두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것. 모든 신호들 너머에서 빛나고 잇는 실재를 건너다 보는 내면의 빛을 가진...조금 더 밝고 미약하고의 차이가 무에 그리 대단하랴... 그걸, 니는 신호들을 초극하여 실재를 바라 보는 내공이라 한 것 아닌가?  오, 가련한 신호들이여, 나는 너의 그 떨리는 손가락 저 편 끝에서 빛나고 잇는 달을 보네. 창백한 달을 보네...ㅎㅎ그러나 신호를 실재의 아랫것이라는 내 말은, 사실은 내 말이 아니고 결국, 니 말이기도햇지.....

 

그건, 말 그대로, 수단이 목적의 우위에 잇을 수 없다는 것이지. 본말이 전도된 현상들...현실은 얼마나 그런 혼돈의 세계이던가... 육체가 그 영혼보다 우위에 잇는 인간, 무성한 언어의 유희로 의미가 훼손되고 실종되어 버린 사고, 하나님은 안보이고 목사만 보이는 교회, 교육은 없고 교사만 잇는 학교, 학교만 잇고 학습은 없는 사회...아, 참, 대통령만 잇고 정치는 없는 국가...ㅎㅎ 아으 아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며 손톱에 때가 끼엇다고 비웃고 지 손톱엔 메니큐어만 바르는도다. 그나마 수전증 환자처럼 떨면서 말이다.ㅎㅎ그걸 니는 알지만, 그 다음 단계의 말을 하는 것이고 나는 저런 차이를 말하는 것에 머물고 잇엇네.

 

 

(하동철 作 (제목 모름) 

삼각형을 거의 다 올라가고 잇는 저 불빛은 울집 주방 불빛임.)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 양단에서 줄다리기를 하지만, 중요한 건, 서로 같은 줄을 잡고 잇다는 거, ..서로 다른 줄을 잡고 땡기면 우리는 우애 되겟노? 니는 니대로, 나는 나대로 나가자빠지는 수 박에...ㅎㅎ 그니까, 밀고 당기고... 니가 바리사이형의 신앙을 더 지향하는 바는 아니라고 말하면, 나는 그래도 모든 종교적 의식과 율법을 거부할 수는 없더고 말하고 싶은 순간, 그걸 니가 이미 말하고 잇다..줄을 나꿔 채서...ㅎ 맞다.....징검다리 없이는 강을 건널 재주가 없지. 그게 무엇이든.... 나는 일부러 더 삐딱선을 타느라고 옆다리를 짚기도 하고 그러다가 정말, 물에 빠지기도 한다...니는 깔깔 웃으며  다음 징검다리로 먼저 폴짝 건너가 버릴 것이지? ㅎㅎ 그게 대화의 묘미가 아닌가 한다....ㅎ

 

아무튼, 저런 신호와 실재 간의 혼동이나 본말전도  현상들을 자조적으로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고도 하던가?  많은 문학, 예술에서 우리는 실존주의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인간적인 오류와 갈등과 고통을 오히려 더 후벼 파고 드러내어 펑트기해서 내걸어 놓고 달처럼 쳐다도 보고 샌드백처럼 두들기기도 하면서 자학적인, 너무도 자학적인 쾌감을 느끼지도 않앗던가...그러다가 우리의 영혼이 그 절망의 밑바닥으로부터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눈물겨운 환희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하야...ㅎㅎ.

 

그런데, 목적과 수단은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하나의 목적은  저 징검다리나 사다리처럼, 끊임없이 다음 단계의 수단이 되지 않던가....궁극적인 실재에 도달하기 전까지는...어떤 위대한 영혼의 언어도,  모두 그 자체로서 실재인 것은 없고 다만 실재에 이르게 하는 저 수고하고 짐진 징검다리들, 그저, 조금 더 저 실재라는 피안에 가까이 가 잇어 보인다는 찰나적인 확인과 희망과 공감들일 뿐.그래서 우리는 종종 허당을 짚기도 한다...임어당이  그  목사 아부지라는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햇다고?  내사, 그를 잘 모르고, 교회 평생 댕겨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구원받지 못햇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지만, 안됐네...옆다리만 짚다가 그거 허당에 빠?던 것인지.그래도, .이 순간 나는 또 그가 부정한 신이 어떤 신이엇는가에 따라서는 그게 아닐 수도 잇다고 또 다른 옆다리를 짚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네...ㅎ

 

우선,  니가 말한, , 그가 '신호들을 잘못 읽어서 엉둥한 실재에 도달하고 거기에 고정되엇다'...라는 말을 내 식으로 옮기면  '그는  아직은 실재에 도달하지 않앗다'가 되어 버린다고 말하고 싶네....그가 실제로 어떠햇든지, 어떤 선언을 햇던지와는 상관없이...그가 도달햇다고 니가 말하는 그 '엉뚱한' 실재는 결국,  고정 내용을 가진 어떤 (언어적) 수단이자 또 다른 신호엿단 말이지...그리고, 임어당도 모르긴 하지만, 그 목사 아버지의 언어들에 대해 많은 부분 받아들이지 않앗다지만,  마음 더 깊은 곳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이 숙고하지 않았을까? .어떤 의미로.구원 받지 못햇다고 누가 평가한지 모르지만...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행태적인 요소만 가지고 판단햇다면 할 말이 없네 그러고 보니 그는 줄담배를 평생 피?지만 여든 살까지살앗다고 울양반이 맨날 금연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더니..ㅎ 요즈음은 몸이 너무 힘들어지니까, 이제서야 그도 담배를 줄이네...제발, 너무 늦지 않앗기를....어느날 교회에도 가겟다고 할랑가...ㅎ 암튼, 그도 신에 대한 생각만은 누구못지 않지... 

'

 암튼, 실재는  가시적인 대상이나 행태에 일의적으로 연결된 어떤 고정된 '내용' 콘텐츠가  아닌, 순수 형식,  형상(Form) 또는 이데아이고 비가시적인 실체여서 어떤 고정된 내용으로서의 진실도 그것을 목적이라고 하는 순간 곧바로 또 하나의 수단이 될 뿐이라는 거지. .'道可道 非可道 (도가도 비가도) 라고 한 노자의 말처럼.....하나님의 모습을 누군가가 그려낸 것이 잇다면 그 순간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게 하는 하나의 방편, 수단일 뿐이엇다는 것...임어당은 단지, 그 목사 아버지가 그린 하나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앗던 것 아닐까?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건 달리 말하면 이 모든 수단들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 되겟지만...임어당의 그 '엉둥한' 실재'도 결국 또 다른 우상이엇단 말이 되겟지..따지자면, 불상도 십자가도 우상이 아니겟나...인간의 모든 고정적인 행태와 사념과 상징과 예술이 다...

 

 

 이번엔 불빛을 꼭대기에 오게 해서 찍어 보앗네...^^

 

 

그래서, 결국, 어떤 길도 왕도는 아니고 그 자신이 택한 어던 수단을 끊임없이 갈고 닥는 과정을 통해서 얼마나 내면의 진실이 진리와 더 가까이 만나게 되엇는가가 중요하겟지.  스승을 믿지 마라, 어던 위대한 영혼도...예수도 공자도 부처도...다만 너 자신을 믿어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끊임없이 믿고 사랑하다가 또 의심하는 너 자신을 믿어라...그것 없이는 너는 죽음이다. 시체다...ㅎ 스승은 그저 네 옆에서 너를 염려하며 몇 걸음 앞서 가는 옆사다리의 동행자이다...둘이 함께 엇길로 들어 설 수도 얼마든지 잇다... 그러다가 얼싸안고... 또 다시 홀로 올라가는 거다...아으....눈물겨운 아름다움이여...빛나는 사다리여..잭의 콩나무여...ㅎㅎ

 

카고 보니, 차라리, 그 소위, ' 형편없는' 교사나 부모들도 ?아내 주는 수많은 신호들이 그 내면의 빛에 따라서는 네가티브적인 의미에서의 훌륭한 교재가 되는 겨우도 얼마나 많던가.....우리의 영혼은 그렇게 튀어 오르는 공 같은 것이어서.교재가 무엇이든 그 위에서 튀어 오른다...방방...ㅎ 니가 말하는 그 수단들을 뛰어넘는 내공만 잇다면 말이다..참, 그 부고에서 오래 계시다가 전근오셧던  기하 선생님을 기억하니?  그 천재 같앗던...여학생들 앞에서 그 나이에도 안색이 핑크빛으로 변하곤 하시던  그 빵꼬 모자를 벗으면 빛나는 대머리에 조금 남은 머리카락이 내려뜨려지던...그 샘이 한 번은 나를 불러 수학을 전공해보지 않겟느냐고 하셧지. 그 때도 나는 튀엇다...ㅎ 그래도, 그 샘은 부중 건너편의 붉은 벽돌집에사셧더랫지...담쟁이 넝쿨이 늘어진 부중 창문에서 바라다 보일 정도의 또 다른 담쟁이들이 덮힌...나는 그 때부터 담쟁이 올라간 붉은벽돌집에 살고 싶엇는데 아직도 못사네? ㅎㅎ

 

나도 사실은 곡히 기독교적인 신이라고 규정되지 않는 신을 믿는 사람이니 이리 교회라는 수단에 가가이 가지 못하고 잇는 것이겟지. 그래도, 뜻이 잇는 곳엔 길이 잇다고, 어던 수단, 예컨대, 책이나 인터넷이나, 기타 많은 언어라는 수단들에 기대어 끊임없이 신을 만나려고 그 실재의 사다리를 오르내리고 잇는 편이고... 어차피, 그 신이나 저 신이나 조금식은 그 믿는 방식과 절차가 다른, 즉 수단이 다른 것일 분, 그 목적, 본질은 같다는 생각이므로, 내가 무슨 엉뚱한 나라의 신을 믿으러 쫓아갈 일도 없고, 교회에 간다면 구교든 신교든, 아마도 가까이 잇는 기독교 교회에 나가게 되겟지...미장원도 시장도 가장 가까이 잇는 곳에 가듯 말이다. 불교신도가 되지 않는 한..난 사실,  내 마음 안에 부처를 모시기도 하고  예수를 모시기도 하는, 무신론적 유신론자라고나 할까... 아, 이거 말되나? ㅎㅎ 에이, 교회도 절도 아직 안 가고 잇을 바에야, 석가와 예수가 강물 한가운데에서 만나서 악수하는 그림이나 그려 볼까?ㅎㅎ

 

자다 깨어서 이리 또, 어벙벙한 소리만 해댄다.....아고, 뒤뚱뛰뚱, 저 호팻지도 인나서 내게로 오고 잇네. 녀석 이름도 그렇잖니. 희망을 가지고 경계선을 걸어 가는 존재...호프 햇지...ㅎ .. 어제 아침에  능선 위로 떠오른 햇살에 눈이 부셔서 더 이상 손대지 못하고 나갓는데,   좀 줄인다는 것이 오히려 더 길어졋네... 지금은 별이 반짝이는 기분으로 갖다 둔 솔라등 네 개가 희미하게 빛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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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동철 교수(서울대 미대 서양화과)

 

 

 
 
 
[2009.03] 하동철 / 빛의 정원에서 플라톤을 만나다 김영호 / 중앙대 서양화과 교수
 
   
  하동철은 평생 빛을 주제로 삼아 근원적이고 영원한 이데아를 구현하는 삶을 살았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 만큼 자신의 예술적 견해와 표현 방식에 대해 확신을 가진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빛의 존재에 대해 다양한 물음을 제시했고 온 생애를 바쳐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때로는 철학가들의 사상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종교적 세계에 열중하면서, 때로는 시인과 같은 상징 언어로 빛의 세계를 추구하는 가운데 그의 예술세계는 독자적 결실을 거두었고 한국의 추상회화의 위상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하동철은 전후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앵포르멜로 대변되는 뜨거운 추상의 마지막 세대이자 (도1)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 첫 세대에 속하는 작가의 한사람으로 기록된다. 그가 활동을 시작하던 1960년대 전반은 새로운 추상미술로서 기하학적 추상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이에 부응하는 새로운 기류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그의 활동영역은 비단 회화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판화와 드로잉, 탁본 그리고 설치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를 수용하였고 교육자로서 한국 판화계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동철이 일관되게 탐구해 온 빛은 개념적이며 비물질적인 속성을 지닌 존재다. 그러나 빛이 작가의 손에 의해 표상화 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물질로 전이되는 형식을 빌리게 된다. 오광수가 지적했듯이 “비물질적 현상인 빛을 물질적인 안료를 통해 구현한다고 했을 때 일어나는 모순율”이 그가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하동철 , 캔버스에 유채, 175x175cm, 1977 하동철의 예술세계에 대한 해석은 대체적으로 빛과 공간과 구조의 형식적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의 족적을 보면 불변하는 우주적 질서와 본질로서의 빛이라는 의미에서부터 생명의 근원으로서 빛의 의미에 이르는 과정을 거쳐 자연에서 얻은 감흥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상되는 단계로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다.(도2) 이러한 내용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본다면 다음의 몇 가지 요인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빛의 개념, 빛의 이미지, 빛의 구조, 빛의 공간이 그것이다.



빛의 개념

하동철이 선택한 빛은 물리적인 차원을 넘어 상징적 의미를 지고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빛에 대한 종교적 상징성과 연관이 있다. 가령 빛은 성서의 핵심적 요소로서 구약성경에서는 빛이 ‘선(good)’과 관련이 되어 있으며 지혜서는 ‘지식’과 ‘힘’ 그리고 하느님의 ‘보호’를 상징하고 있다. 한편 신약성경에서 빛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신 자체의 상징 혹은 신의 속성을 지닌 대상으로 묘사된다. 가령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요한복음이 이를 대변해 준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요 장로로 활동하였다는 점은 종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하동철의 빛은 개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지각의 대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도 종교사적 프로세스를 지니고 있다. 중세의 신학과 신플라톤주의를 거치며 개념화된 빛이 단순히 신 혹은 신격을 나타내는 상징적 개념이 아니라 특수한 가시적 형태를 통해 제시됨으로서 그 상징적 의미가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 물리적인 빛이 그 자체로 절대의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듯이 빛이 절대성을 지닌 상징적 대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시각적으로 체험케 하는 어떤 조형원리가 필요했고 스테인드 글라스는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켰다.
빛의 형이상학적 체험이 스테인드 글라스의 조형원리인 투명한 빛의 설계를 통해 실현되었던 것처럼 하동철은 태양 빛을 신과 동일시되는 신성한 빛으로 변호시키는 시각적 형식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도3)

빛의 구조

하동철에 있어 빛의 구조란 빛을 직관적으로 체험케 하는 조형적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불변의 본질을 언어적 체계로 규명하는 일이라면 미술의 과제는 필연적으로 조형적 형식을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 하동철의 경우 예술을 둘러싼 문제의식은 개념으로서 빛이 아니라 빛을 드러내는 방식에서 항상 제기되어 왔다. 1978년 하동철이 ‘빛’이라는 화제를 사용한 이후 그의 작업에 나타나는 예술형식은 주제적 측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조형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작가 자신이 <빛의 구조>로 명명한 형식은 화면의 내적구조에서부터 점차 외적 구조로 확대되어 온 면이 있다. 이는 하동철이 표상하는 빛의 조형적 근간이 캔버스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캔버스를 벗어난 외적구조로 확대되는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대변한다.
빛의 내적구조는 우선 설정된 눈금 위에 자를 대고 규칙적으로 선을 그어내는 수학적 집합으로서의 구조이거나, 격자무늬로 구획된 사각의 화면 위에 사선으로 그어진 파상무늬로 표현된다. 그것은 빛의 파장에 의해 결정되는 색상의 광학적 성찰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파상선은 뒤이어 물감을 머금은 실을 튕겨 화면에 흔적을 만드는 먹줄 작업으로 대체된다. 이에 대해 작가는 ‘화면에 진동과 에너지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화면 밖으로 확대되는 빛의 외적구조는 분할된 화면의 조합에서 나타난다. 빛의 이미지를 담은 분절된 캔버스를 수직으로 배열하거나, 사각으로 맞물리게 하거나, 혹은 벽면에 캔버스를 15°각도로 비스듬이 세워 연결시키는 것이다. 하동철의 작업에 있어 외적구조는 결국 평면에서 설치작업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측면뿐만 아니라 전시장을 빛의 공간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1985년 미술회관의 개인전 이후 갤러리 현대(1988)와 진화랑(1995)에 이르는 개인전 모두에서 작가는 전시장을 빛의 구조물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선보였다.(도4) 이러한 빛의 구조는 전자상가인 테크노마트의 실내공간에 설치한 거대 조형물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다.
도4 하동철 , 캔버스에 아크릴릭, 90x180cm 화폭 7개 연결, 1987-88



빛의 이미지

화면에 구조화된 하동철의 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른바 그가 표상한 빛의 이미지는 쏟아지는 폭포수, 새벽, 장대비 내리는 바다, 저녁노을에 물든 갈대숲, 오로라가 빛나는 밤하늘 등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분명 신비스러운 체험이다. 기하학적 순열(順列)의 직선들과, 빨강과 파랑 그리고 노랑의 색면, 물감을 머금은 줄을 튕겨 고착시킨 사선들, 그리고 화면의 농도나 공간감을 적절히 조절하는 스프레이 효과가 자연 이미지로 지각되는 사연은 무엇일까.
캔버스에 표상된 자연 이미지는 엄격하게 일루저니즘에 속한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풍경화는 나무나 산이기 이전에 캔버스에 덮힌 물감일 뿐이라는 사실은 모더니즘 미술이후에 우리에게 익숙한 강령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동철의 작품에 나타나는 색이나 선 등의 상징적 기호들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논리적인 화면 구조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작품으로 드러내는 세계는 관념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가 표상하려는 빛의 세계는 풍경으로서 폭포수나 바다나 갈대숲이나 밤하늘의 이미지가 아니다. 외적 자연 이미지를 연출해내는 사물로서 캔버스를 넘어선 세계, 즉 본질로서 자연 이미지를 드러내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동철은 자신의 빛이 플라톤의 영역으로부터 온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빛의 세계를 이데아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이래 그가 지녔던 세계관은 보다 폭넓게 전개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를 통해 알 수 있다. “플라톤의 마당에 서서 데카르트와 칸트를 인식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말은 작가의 빛이 본질로부터 왔으며 그로부터 현상에 대한 회의적 성찰과 물자체에 대한 연구로 이어지고 있음을 대변하고 있다. 한편, 관념과 물질적 표상으로 이어지는 화업 40여년의 세월과 함께 하동철의 빛은 자연스럽게 선불교에 기초한 동양사상과 깊게 연계되었다. 말년에 그가 집착했던 일련의 제목들인 음, 양, 명상, 영겁, 만다라 등을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은 확인된다. 실재로 그는 불교의 경전을 심독(心讀)해 왔으며 스님과의 교류를 삼가지 않았다.
결국 하동철이 표상하고 있는 빛의 이미지는 동서의 양대 종교를 하나로 이어주는 상징적 기호로서 제시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 절대의 표상이자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성의 체계적 원리를 따르고 있다.

빛의 공간

하동철이 표상하는 빛의 이미지는 결국 공간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 때 공간이란 빛의 구조가 이미지로 전환되는 장소(캔버스 또는 전시장)로서 하동철의 작업을 이해하는 근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화면공간은 주지하듯이 백색 포말(泡沫)로 기화(氣化)하거나 떨리는 검정 실선의 파장 에너지로 차 있는 비실체적 공간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빨강과 파랑 그리고 노랑의 기본색 위에 내려 쌓인 백색 분말과 튕겨진 선의 파장은 이차원적 물질성을 지닌 화면을 정신적 영역으로 이끄는 요소로 작용한다. 작가는 이러한 수학적 집합의 구조와 원색의 강렬함을 미세한 토운의 분말과 선으로 경영하면서 물리적 화면을 종교적 명상의 공간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말년에 들어서 하동철의 공간은 네 방위에 중앙을 더한 오방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다섯 방위를 지키고 다스린다는 민속신인 오방신장(五方神將)은 오방색이라는 다섯 가지의 색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하동철의 작품에 적용되는 다섯 가지의 절대색인 청, 백, 적, 흑, 황은 각각 다섯 방위신인 청제(靑帝)-동, 백제(白帝)-서, 적제(赤帝)-남, 흑제(黑帝)-북, 황제(黃帝)-중앙 을 상징하며, 이들은 사각의 평면공간에 상호 혼재하여 표현되거나 전시장의 입체공간을 다스리는 셈이다. 색채에 의해 우주의 총제적 구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동양사상은 색을 본질로 삼는 하동철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도5)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하동철은 자신의 색채관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우선 노란색은 색자체의 존재성 보다 나에게는 광원을 유도하는 색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화면 위에 스프레이로 깔리는 흰색 역시 색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화면에 공기 또는 어떤 공간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튕겨 드러나는 선으로서 검정색도 화면에 진동과 에너지를 유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랑과 흰색 그리고 검정은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내가 기본적으로 마주치는 색은 결국 빨강과 파랑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1995년 개인전 도록)
2000년대 초반 이후 제작된 작업들은 두 가지의 색이 기조를 이룬다. 이전의 작업과 비교해서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면 거친 붓질에 의한 표현적 바탕이 사라지고 대신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맴도는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가장 분명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작가의 체질적 조형의식으로부터 온 귀결로 여겨진다. 우주의 생성과 자연 에너지를 상징하는 동적인 화면에서 유출되는 우연성이 배척되고, 다시 선묘와 빨강과 파랑이라는 두 가지의 색 그리고 논리적 공간 구조가 중심을 이루는 시지각의 세계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구어낸 빛의 정원은 마치 네 개의 선으로 온갖 환상과 상징의 세계를 펼치는 현악기의 음율 만큼이나 다양하면서도 명증(明證)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 이 글은 하동철의 2002년 가나아트 개인전에 실렸던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


도1 하동철 <설화>, 캔버스에 유채, 162.5x113cm, 1964
도2 하동철 , 캔버스에 유채, 175x175cm, 1977
도3 하동철 , 캔버스에 아크릴릭, 600x300cm, 1997
도4 하동철 , 캔버스에 아크릴릭, 90x180cm 화폭 7개 연결, 1987-88
도5 하동철 , 캔버스에 아크릴릭, 180x180cm, 2004


하동철은 194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미국 템플대학 타일러 스쿨 오브 아트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하였다. 1964년 이후 국전에서 6차례의 특선을 받아 추천작가, 운영위원,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6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베니스비엔날레 등 다수의 국내외 회화 및 판화전시회에 참여하였다.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서울대학교에 재직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을 역임하였고 2006년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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