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겨울 다 가고 춘삼월, 이젠 영영 그만인가 싶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을 때, 나는 춘천길 수변도로을 달려 서울로 돌아 오고 잇었다. 처음엔 그저 조금 오다 말겟지 했는데 눈발이 점점 심해지더니 마침내 함박눈이 되면서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인다. 바람이나 쇨까 하면서 늘 가고 싶던 길을 우연히 따라 나서게 된 길이었지만 이런 분위기까지 될 줄은 몰랐다.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는 시간부터는 차창에 부단히 와 부딪친 눈발들이 유리벽을 소르르 소르르 기어 오르는 모습이 꽃불처럼 아름다웠다. 바람에 밀려 흩날려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발은 차디찬 유리벽을 어루만지며 나야, 나, 하며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는 듯, 흐려져 가는 내 영혼을 흔들어 깨우려는 혼불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흐린 눈 탓이엇을까?
그래, 너는 바리톤 목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은, 얼굴에 늘 미소가 떠나지 않는 씩씩한 ROTC 화학도이자 대학 합창반 지휘자였지. 나는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도 다가오는 현실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밤늦게까지 어느 교수연구실에 앉아서 전공도 아닌 영어 소설책이나 철학책 나부랭이(?)에나 심취해 있었고, 너는,그 연구실 바로 위의 실험실에서 밤늦게까지 실험을 하다가, An die Musik이나 Ich Liebe Dich 그리움, 보리밭 같은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친구들과 함께 그 연구실 창문 아래를 지나가곤 했지. 너는 그런 곡들을 피아노로도 곧잘 쳤고 나는 겨우 체르니나 소나티네를 더듬거리던 메조 소프라노, 늘 합창단의 맨가운데 자리에 서서 너의 지휘하는 모습에 쏘옥 빠져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지만, 진짜로 맑고 고운 목소리의 몇몇 소프라노들을 눌 부러워만 하면서, 그저 노래 부르는 것만이 그래도 행복해 죽겟는 그런 어정쩡한 아이였지. 그아이들에게 다정한 눈길을 주면서 발성과 화성과 조옮김에 편곡과 변주까지 자유자재로 하는 너에게 나는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엿지. 나는, 졸업도 제때 못해서 한 학기를 더 늦게, 8월 졸업을 하게 되엇고, 그 학기 동안, 너는 춘천에서 소위로 임관되기 전의 마지막 훈련을 받고 있었지.
나는 춘천을 아주 좋아 햇어. 중학교때부터 제일 친했던 내 친구가 거기서 첫 직장을 얻어 중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다가 그 때 먼저 와서 근무하고 잇던 대학 선배를 만나 나중에 결혼하게 되었던 곳. 나는 그 마지막 학기에도 틈만 나면 그녀를 찾아가곤 햇지. 그 남편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친구인 나에게도 무척 잘 해주엇어...그 마지막 여름방학에도 나는 또 춘천엘 갔고 석양이 뉘엿 뉘엿 지는 무렵, 소양강에서 둥둥 북을 치는 소리와 함께 허연 광목을 물에 듸우면서 진혼굿을 하는 것을 멀리서 바라 보았어. 그 허연 광목이 물빛과 석양빛을 반사하며 오르락 내리락하는 모습이 어찌나 슬픈지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어.누군가, 저 물에 빠져 죽은 게지...아아, 그게 바로 너의 혼을 건지는 굿이엇다는 걸 나는 방학이 끝나고서야 알게 되었던 거야.....
그 날, 제헌절 바로 전 날, 너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임관식을 하루 앞두고 미리 서울로 올라 와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햇지. 나는 괜히 가지도 않을 것 같은 아버지 생신 핑계를 대며 대구로 내려가야 한다고 하엿지. 너는 학생이 무슨 아버지 생신까지 챙겨야 하느냐며 조르다가 에이, 그러면 할 수 없지, 그러면, 내일은 소양강 도강이나 하고 당일날 서울로 올라가는 수 밖에 없겠다고 했어. 부산 출신인 너는 하루종일이라도 물에 떠 있을 수 잇다고 하며 전에도 춘천 떠나기 전에 꼭 소양강을 왕복도강하겠다고 말한 적이 잇었어. 바닷물하고 강물은 다를 텐데...그렇게 말햇었지만, 그 날은 그 말도 하지 못했어. 너는 그 한 학기 동안에도 자주 학교에 왔고 그 때마다 연구실에 쳐박혀 있는 나를 찾아 왓지. 동기들이 모두 졸업하고 떠난 썰렁한 캠퍼스에 가끔 이미 취직한 동기들이 찾아 와서 밥을 사 주기도 했고 나도 그제야 조금 전공과목 공부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지만 매우 슬쓸했어., 너 역시,매번 서울길 끝에 그 강원도 골짜기, 고된 임간훈련으로 돌아가기 전에 위로를 받을 만한 다른 대상이 마땅히 없엇던 것일 테지, 우리는 자연히 친해졌어.
우리는 차도 같이 마시고 산책도 하고,한 번은 극장에도 같이 갔지. 말하자면 그게 데이트였는데, 나는 아직도 그걸 특별히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어릴 때부터 남자들이 많은 집안에서 컸고 중고등학교 때도 남자 아이들과 함께 특별활동이나 써클 활동을 많이 해왔던 터에, 우리 과에는 나만 빼고 다 남학생들뿐이어서 늘 남학생들과 어울려 다녔으니까...그 때쯤, 너는 몇 번인가 내 손을 잡으려 하기 시작했지. 나는 그것이 영 소화가 안되었던 거야. 그 때만 해도, 나는 손을 잡는 건 결혼을 약속하는 거라고 생각햇으니까....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거지만, 그 땐 손도 한 번 안 잡아 본 사람들이 내게 청혼부터 하기도 햇으니까...ㅎㅎ 서울에 하루 미리 온다는 건 그래서 내게 큰 부담이엇지...내가 너를 좋아한 건 사실이고, 너보다도 훨씬 더 좋아한 아이도 있었지만, 난 도무지, 그런 식의 사랑이라는 건 소설 속에서나 어렴풋이 그 실체를 느꼈을뿐,내가 그것을 해낼 거라고는 도무지 생각이 안되는 아주 늦된 아이엿지....
개학이 되어 학교 앞 다방에서 너네 과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어. 네가 소양강을 건느다가 다른 친구들은 건너편에서 일단 쉬엇다가 다시 건너 오는데 너는 쉬지 않고 계속 다시 건너 갔다고. 중간에 네가 허우적거렸지만 친구들은 장난인 줄 알고 좀 지체하다가 보트를 저어 너를 구하려 갔다고. 너는 마지막으로 손을 한 번 잡앗다가는 영영 놓치고 말았다고... 나는 심한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렸어. 내가 너를 오라고만 했던들,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었다는 생각과 네가 나를 좋아하도록, 내가 너에게 은근히 요사를 부린 것이 아니엇던가 하는 생각, 그리고 너의 혼이 그 광목을 타고 올라가고 있던 바로 그 때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것을 바라 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참 죄스러웠어. 나는 너에게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바로 며칠 후에 아무 생각없이 춘천에 갔던 거야...그리고 그렇게 집에서는 연락처도 모르는 친구한테부터 들려 놀다가 대구에 내려 갔을 때, 병약하셨던 아버지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이미 삼우제 날이 되어 있었던 거야....아, 지금 이 말을 하는 순간, 처음으로 너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이 바로 며칠 사이였다는 것이 기억나네....
네가 졸업하던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밤늦게까지 실험실에서 지낼 너희들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나는 버스를 타고 그 밀리는 광화문통을 지나 양념에 잰 갈비 한 통을 일부러 갖다 준 적도 있었지. 그 때 내가 있던 언니네는 명절이면 커다란 다라이에 갈비를 몇 관씩 재었으니까...어느 날은 언니네 집까지 나를 바래다 주고는 차도 마시고 갓지....그 날, 너를 다시 배웅하고 라일락 향기가 포져 나오는 언니네 담장을 돌아 들어 오면서 저 애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 것 아닐까? 이러다가 너와 결혼하게 되면 키스를 어떻게 하지? 우린 둘이 다 안경을 끼고 턱까지 나왓잖아..이런 엉뚱한 생각을 한 기억이 생생해....너는 언니네 집에까지 와서 차를 마신 몇 안되는 친구들 중의 한 사람이엇고 언니도 그랫던 너를 기억하지... 순진한 너는 너에게 잘 해주는 나에게 가까이 오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고,대학원에도 수석으로 합격해서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고 임관하면 육군본부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을 마칠 수 있게 되었다고 내게 말하면서 기뻐했지....늘 싱긋이 웃는 너의 미소와 내가 좋아했던 그 첼로처럼 깊고 그윽한 음성, 그리고 너의 머리 속에 가득햇을 그 콩나물 대가리들과 화학기호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어...
그랬으니, 이만큼 세월이 흘러도,춘천을 생각하면 곧바로 너를 떠울리는 것은 너무 당연해...더구나, 그 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달리는 유리창에 부딪쳐 안타깝게 기어 오르던 눈발들은 정말 너의 혼불 같았어. 그것을 사진기에 담는다고 담았지만 그 감동을 다 담을 수는 없었네...너는 그 때 그 빛나는 석양 무렵에, 그 하얀 광목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다가 하얀 눈이 되어 다시 그 의암호수와 소양강 위에 흔적도 없이 떨어져 내리기를 삼십 여년 계속해 온 것이 아닐까? 그 날은 마치 그 옛날, 네가 씨익 웃는 얼굴로 나를 찾아 와서 용두동 그 개천둑을 따라 걸으면서 흥얼흥얼 그 낮은 바리톤으로 노래를 불렀을 때처럼, 의암호반을 같이 걷자고 한 것이 아니엇을까? 슬그머니 떨쳐 내어진 손이 부끄러워 주머니에 그 손을 스윽 넣고 걷던 그 때처럼 그렇게 소리도 없이 조용히 차디찬 차창을 떠나 바람 속으로 사라져 간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