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기억 범위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많은 저서에서 그것을 영혼이 무한한 능력과 비물질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로 언급하고 있다. 다음의 발췌문에는 「참회록」의 10권에서부터 뽑은, 이 주제에 관한 유명한 글이 들어 있다.
우리는 존재하여 살아 있으며, 또한 그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도, 우리는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억이나 이해, 또는 의지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기억력이 기가 막히게 뛰어났던 심플리시우스에게 버어질의 「아네이드」의 각 권 마지막 두 번째 줄이 무엇인가를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는 즉시,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대답해 주었다. 우리는 그 각각의 줄 바로 앞의 줄들도 외워 보라고 하였고, 그는 다시 그렇게 해냈다. 우리는 그가 버어질의 시를 거꾸로 외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그가 원하는 어느 곳에서든지 시작해서 한 번 해 보라고 하였더니, 그것까지도 그는 해냈다.
우리는 그가 산문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가 외울 수 있는 키케로의 웅변을 가지고 해 보라고 했다. 그는 그것도 우리가 하라는 데까지 다 했다. 우리가 경탄해 마지 않자, 그는 이 실험을 하기 전에는 자기도 정말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신 앞에서 맹세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실험 때문에 그는 그의 기억의 범위를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가 그 자신의 능력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직접 실험하고 테스트해 보는 것을 통해서였던 것이다. 그는 확실히 실험해 보기 이전의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그 자신의 능력을 진작 알지 못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종종, 나중에 기억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일단 생각이 났을 때 그것을 메모해 두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내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경혐을 하곤 한다. 그제서야, 자기가 기억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것과 잊어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메모해 두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다른 때에, 갑자기 그것이 우리 마음에 떠 오르는 일이 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틀림없는 우리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해낼 수 있었을 때에는, 그 바로 전의 우리 자신 꼭 그대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에게 거부당했다가, 다시 그 자신 앞에 새로이 나타나 자신을 회복하게 되는 것인가? 기억 속에 간직해 두었던 것을 더듬어 보아도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마치 다른 곳에 보내어진 다른 사람과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곳에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찾는다고 하는 것도, 그냥 우리 자신이라는 어떤 별개의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내면 이외의 어떤 곳에서 자신을 찾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을 찾는다는 말인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란 단지, 우리 자신의 본질,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의 것으로서의 본질인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본질이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탐구의 대상이다. 나는 종종 내게 주어진 어떤 물체에 대해, 내가 생각만 해 본다면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에 대해 생각은 해 보았는데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의지에 관한 한, 우리는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유혹에는 넘어가고 어떤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는지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인간의 본질에 대해 우리가 무지했다는 이야기를, 옛날에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가 실제로 그렇게 무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우리의 신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생활에 속하는 여러 가지 사실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나의 본성적 작용(감각적 지각능력)의 단계를 넘어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창조주 당신에게로 가까이 나아 갈 것이다. 그리하여, 저 너른 기억의 들판과 마당으로, 온갖 종류의 셀 수 없이 많은, 감각이 가져다 놓은 이미지의 창고로 들어 설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모든 것들, 감각으로 받아들인 모든 것들에 무엇인가를 보태기도 하고, 수정도 해서, 거기에 쌓아 둘 것이다. 무리는 아직 망각 속에 삼켜지지 않고 묻혀버리지 않은 채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그 기억의 창고에 맡겨 둘 것이다..
그 기억의 창고에 들어서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오도록 시킨다. 어떤 것은 금방 나오고, 어떤 것은 찾는데 시간이 걸리며, 또 어떤 것은 더 깊은 곳에 있는 창고에서 겨우 끌어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한꺼번에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어떨 때는 다른 것을 찾고 있는데, “혹시, 우리를 찾고 있지 않아요?” 하는 듯이, 우리에게 덮쳐오는 것도 있다. 그래도, 나는 정말로 원하는 것이 그 숨어 있던 곳에서 발견되어 나올 때가지, 마음의 손을 내저어 그 다른 것들을 기억의 전면에서부터 쓸어내어 버린다. 어떤 것들은 순순히 나타나 주기도 해서, 찾아지는 즉시 자리를 잡는다. 먼저 나온 것은 뒤에 나온 것에게 자리를 비켜 주면서,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보관된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모든 것은 기억창고 속에 분명하게 분류되어서 보관되며, 제각기 자기 칸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예컨대, 물체의 빛과 모양, 색깔은 눈을 통해서 들어가고, 냄새는 코, 맛은 입을 거쳐서 들어간다. 온 몸에 퍼져 있는 촉각을 통해서는 단단하고 부드러움, 차고 더움, 부드럽고 거칠음, 무겁고 가벼움 등의 인상이 외부로부터나 내 신체의 내부로부터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은밀한 장소, 광대한 기억의 휴식처에 수용되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회상되고 재검토된다. 그것들은 제각기 자기의 문을 통해 들어가서 보관되지만, 그 때는 이미 물체 자체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에 대한 이미지일 뿐이며, 그 이미지들이 다음에 회상될 수 있도록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이 어떤 감각을 통해서 포착되고 간직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조직되는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어둠과 침묵 속에 들어앉아 있을 때에도도, 우리는 기억 속에 있는 색깔을 회상할 수가 있다. 나는 흑과 백, 그리고 어떤 것이든지, 원하는 대로의 색깔을 다 구별할 수 있다. 내가 그것을 기억하려고 애쓰고 있는 동안에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 경우에도, 그것은 그 색깔의 이미지를 방해하지 못한다. 소리들 역시, 기억 속, 색깔이 들어 있는 곳과는 다른 어떤 곳에 보관되어 있다. 그 소리들도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불러들일 수 있고, 내가 부르면 즉시 온다. 내 혀가 가만히 있고 목소리 역시 쉬고 있을 때에도, 나는 마음대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색깔의 이미지는 기억 속에 남아 있으면서, 다른 보관물들, 귀를 통해서 들여온 것들을 재검하고 있는 곳에 와서 끼어 들지 않는다. 나는 다른 감각을 통해 들여와서 보관해 놓은 것들도 모두 이렇게 회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 냄새도 맡지 않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백합의 향기와 바이올렛의 향기를 구별할 수 있다. 새로 산 술보다도 꿀을 더 좋아할 수 있고, 거칠은 물건보다 부드러운 물건을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아무 것도 맛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고, 다만 기억을 되살리는 것만으로 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내가 잊어버린 것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내 눈 앞에 바라 볼 수 있게 해 주는, 내 기억의 위대한 궁전 안에서 나는 은밀히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만나 회상해 볼 수도 있다. 내가 과거에 무엇을 했으며,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했는지, 그리고 그 때,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하는 것을, 내가 직접 체험했던 것이든지, 다른 사람의 권위를 내가 인정함으로써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이든지 간에, 모두 거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창고에서, 나는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것, 또는 그 경험의 결과로 ale게 된 것들, 그리고 그와 유사한 것들을 여러 가지 찾아내어서 과거의 사건 속으로 짜 넣을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나는 미래의 행위들을 예측하기도 하고, 그 결과와 희망을 생각해 보기도 하며, 그러다가 다시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눈 앞에 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이렇게 할 거야” 라고, 나는 내 마음 속 광활한 휴식처, 그 많은 것들의 이미지로 가득 찬 곳에서 다짐하면서, “그러면 이러저러한 것이 일어날 거야” 라든지,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날까?”, “제발, 이러저러한 일만은 일어나지 맙소서!” 라고 혼자 말한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 말하고, 그럴 때, 내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이미지가 내 기억창고에서 꺼내어져서 내 앞에 전개된다. 그 이미지들이 내 앞에 실제로 나타나지 않고는 그것들에 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기억의 힘은 진실로 대단하고 위대한 것이어서,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광대무변한 성전과도 같다. 감히 누가 이 깊은 곳을 침범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 마음의 능력이자, 내 본성의 한 부분이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를 완전하게 알 수 없으며, 따라서 마음은 그 자신을 담기에 너무 비좁다고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담기지 않는 부분이,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마음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는 것인가? 마음이 그 자체를 다 담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가? 이런 생각을 하니, 내게 커다란 경외심이 일어났다.
나는 경악감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거센 파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 둘러싸인 대양, 그리고 별들의 운행을 바라보면서 경탄해 마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연구하지 않는다. 내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내가 그것들을 내 눈으로 바라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 속 기억으로, 그 산과 파도, 강, 그리고 별들을 내가 본 그대로, 그리고 그러리라고 믿기만 하였던 태양을, 내가 실제로 보고 있는 듯이 광활하게, 내면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실제 내 눈으로 그것들을 보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들 자체가 내 안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였고, 내 안에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미지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각각 내 감각들 중의 어느 것을 통해서 나에게 인상으로 받아들여졌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기억의 그 무한한 용량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비단 이미지들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모든 자유교양학문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 때 내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그 학문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학문의 실체이다. 문학, 토론기술, 온갖 종류의 질문 등, 무엇이든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다 그 기억 속에 들어 있다. 나는 그것들의 이미지만 붙들고 앉아 있고, 실체는 외부에 남겨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런 것에 대해 듣고 있었을 때에는, 마치, 목소리를 듣고 있을 때 그런 것처럼, 내 귀에 그 인상만 남기고 나중에 그것을 회상이나 할 수 있도록 흔적을 남기고 지나가는, 그 소리만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후각을 건드리고 지나가서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나중에 우리가 다시 생각해 낼 수 있도록 그 이미지만 기억에 남겨 놓는 향기 같은 것도 아니었다. 위장 속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지만, 기억 속에서 아직도 그 맛이 남아 있는 음식 같은 것도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없으면서도 기억 속에서 상상할 수 있는, 촉각경험으로 알게 된 그런 것도 역시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모두, 그 실체가 기억 속으로 들여놓아진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만이, 놀라운 속도로 감지되어 훌륭한 캐비닛 속에 간직되었다가, 우리가 그것들을 회상할 때, 희안하게도 되살려지는, 그런 것들일 뿐이다.
이제, 어떤 사람이 지금 세 가지 질문, 즉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 그 말들의 이미지를 우선 받아들이고 있으면서, 그 소리들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려서 지금 여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나는 내 어떤 감각으로도, 지금 그 소리들의 실체를 경험할 수가 없다. 나는 그 소리들의 이미지를 전달 받으면서, 오로지 마음으로서만, 그 실체를 볼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기억 속에 실체 자체를 쌓아 가고 있다. 그 이미지가 아닌 것이다. 이제, 그 실체야말로, 어떤 통로로 내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이것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1) 「영혼과 그 기원」, ⅳ, 9-12.
2) 「참회록」, ⅹ, 8-14.
3) *: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서 그의 잘 알려진, 언어(상징)와 개념(실체)의 구분을 보여 주고 있다. 자유교양학과의 제 1원리는 절대성이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로는,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는 학습할 수 없고, 신이 인간에게 직접 통화함으로써 학습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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