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아우구스티누스 변주곡...^^

해선녀 2006. 3. 30. 09:09

 

 

'제 3 장 학습자의 심리 - 9'에 붙여 주신 아래와 같은 순례자님의 꼬리글에 대한 저의 답변을 순례자님이 아우구스티누스로, 저는 에보디우스로 등장하는 대화형식으로 이어 봅니다...^^

 

 

 

순례자: 같은 물건의 같은 부분을 한 사람이 먼저 만진 후에 다른 사람이 만지는 경우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야. 정말 중요한 국면이면서도 느낌의 공유를 전혀 시도해 볼 수가 없는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어떤가? 자네와 내가 손을 맞잡았을 때의 촉감에 대하여 생각해 보세. 내가 느끼는 자네 손의 촉감은 차갑고 억세며, 자네가 느끼는 내 손의 촉감은 따뜻하고 연약하다고 대충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로써 우리 사이의 미묘한 우정의 공감대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나는 내 손의 촉감을, 자네는 자네 손의 촉감을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의 손의 촉감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일세. 그래서 나는 "모든 감각은 착각이다."라는 전제 하에 세상의 감촉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네.    

 

 

에보디우스: 그렇군, 나도 동의하네. 그래도 촉감은 좀 나은 편인데도 도대체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것을 감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에 말이지...그런데, 그러고 보면 그 중 제일 낫다는 시각도 마찬가지일세. 자네는 조금 전에,  내가 자네와 똑같은 것을 보았는지는 나만 안다고 했지만, 사실은,자네가 본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정확히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똑같은 것을 보았는지는 신(神) 밖에 알지 못하겠지. 한 곳에서 똑같은 물건을 바라 보거나 이리 저리 뒤적거리면서 본다고 해도, 내가 자네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각도로 똑같은 순서로 그것을 볼 수 없는 이상, 우리는 똑같은 것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고 해야겠지, 촉감에서와 마찬가지로 말이지

 

아우구스티누스:그렇군. 나도 자네 말에 동의하네...그것은 내가 조금 전에 말한 내면적인 감각, 즉 관심 때문에 더욱 그렇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네. 그 관심이 달라지면, 나 자신조차도 그 물건의 다른 면을 보게 되지 않던가?, 아무튼, 그 물건의 어느 점에 더 관심을 가지고 보는가에 따라서 똑같은 물건이라도 우리는 서로 다른 면을 보게 된다는 것, 그러니까, 내면의 감각은 외면의 감각 그 자체에까지 이미 영향을 준다는 것이지. 우리는 일단, 같은 것을 보고 그것을 다르게 종합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촉감에서 그렇듯이, 모든 감각의 단계에서부터 이미 시시각각 각자 다른 것을 다르게 감각한다고 할 수 밖에 없겠네...

 

에보디우스: 말하자면, 나는 늘 모든 이해는 다 하나의 오해라고 종종 말해 왔는데, 자네는 지금 모든 감각은 다 하나의 착각이라고 말함으로써 생각만이 아니라 감각 대상과 감각 자체가 이미 다르다는 말을 하고 있네.새미님이 사람이 먼저 있고 대상이 있다는 말을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제부터는, 내 눈에 새빨간 것도 자네가 불그스름하다고, 또는 새파랗다고까지 말해도 나는 할 말이 없게 될 모양이네, 그려...하하.. 말한다는 말이 나오니 말이지만, 청각도 마찬가지,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같은 말이나 소리를 서로 다르게 듣고 자기가 들은 것만 맞다고 해왔던가? 아, 자네가 그런 점들을 전제하면서 자네의 것을 즐긴다고 하니 말이네만, 난 솔직히, 그것 때문에 적어도 그것을 알아채린 순간만은 내 감각을 즐기기는 커녕, 정말로 아찔해질 때가 많다네.

 

아우구스티누스: 내가 감각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전혀 다르게 감각되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지? 나도, 솔직히, 그럴 때, 정말 혼란에 빠지곤 한다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아주 날못 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무지 그것을 수용할 수가 없을 것 같을 때가 대부분이지. 그렇지만, 곰곰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 때도 참 많다네.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실이고 나에게는 내가 본 것이 진실이라는 이해의 정도를 지나서, 나도 그 사람의 감각으로 그 대상을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란 말이지. 그것마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중에 다시 깨닫게 될지라도, 나는 그런 순간에 삶의 희열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네.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게도 되지만,그렇게 세상을 더 폭넓게 즐길 수 있게 된 우리 자신도 더 즐기게 된는 것 때문에 우리는 이 곳(카시키아쿰, 친구 베르쿤두스의 시골집)에 모인 것 아닌가...

 

   진정한 이성에 의한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우선 그런 다양한 감각적인 차이부터 즐길 수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네. 그것들 즐기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기피하고 무시하고 억제할 것이므로 그 사람에게는 그만큼 이성적인 판단을 할 대상이 줄어들어서 이성이 발달할 기회도 점점 더  없어져 버리지 않겠는가. 감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아무튼, 나는 이 나이에도, 내 감각조차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삶의 희망과 신비감마저 느끼게 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