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제 3 장 학습자의 심리 - 11

해선녀 2006. 4. 8. 10:56

 


 

그러나, 이 두 가지 映像 -기억이 가지고 있는 인상과 그 기억으로부터 꺼내어져서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정보화된 象- 은 매우 가깝게 밀착되어 있어서 마치 동일체처럼 보인다. 그 둘은 서로 매우 닮은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의 관심이 다른 데로 돌려져서 그 기억 속에서 지각된 것에 대한 “응시”를 그만 두게 되면, 그 전까지 그의 마음에 인상지어져 있던 어떤 것도 그의 정신적인 시야 속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마음은 이제 새로운 관심거리에 의해 정보화되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 속에 남겨졌던 것은 여전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고 마음은 언젠가 다시 그것에로 관심을 돌릴 수도 있다. 우리가 그것을 회상하고 다시 그것에로 돌아가면, 마음은 그에 의해 다시 정보화되어 다시 동일체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의 印象과 마음의 관심간의 관계는 특정 장소에 놓여 있는 어떤 물체와 신체감각간의 관계와 같다.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의 정신적 시력과 그 기억 속에 박혀 있는 물체의 印象, 즉 마음의 관심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영상과의 관계는 물체를 바라보는 사람의 신체적 시력과 감각을 정보화시키는 물체의 形狀간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시체를 신체적인 시력에 연결시켜서 본질이 서로 다른 그 세 가지를 한데 묶으려는 마음의 의지는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영상, 즉 기억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정신적 시력에 연결시키는, 회상하는 마음의 의지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세 가지의 통합이 일어나지만, 그 세 가지는 사실상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은, 바로 하나이자 동일한 실체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는 오로지 하나의 전체가 존재할 뿐이고, 그 전체는 바로, 하나로서 존재하는 마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체의 形相과 그 외양-形狀이 눈앞에서 사라지게 되면, 의지는 그 사람의 감각을 다시 그것으로 향하게 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기억 속의 영상이 망각되고 나면, 의지는 마음을 정보화할 수 있도록 마음의 관심을 끌어 모을 대상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잊어 버린 것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아직 한 번도 지각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까지도 상상을 할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마음은 그것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대상을 늘이거나 줄여 놓기도 하고, 때로는 멋대로 바꾸고 재구성해 놓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종종 자기가 익히 알아 왔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상상하기도 하고, 스스로  누차 생각하면서 확인해 왔던 것에 대해서조차 그 한계를 넘어서 버리곤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릇된 정보를 주거나 속일 수 있다는 것, 또는 자기 자신마저도 속이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기억이 보유해 온 것과 우리가 회상하면서 그 기억 속에서 꺼내 온 것은, 그 두 가지가 결합되어 있을 때는 똑같은 것으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상 상당히 다르다. 그것은 기억의 대상인 물리적 形象들은 신체감각을 통해 그 形相들이 기억창고에 단지 印象만 된 것)이므로 우리가 지각한 것 그대로의 숫자와 크기, 모양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지만, 생각 속에서 보는 것은, 기억 속에 있던 것에서 꺼내오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수가 달라지고, 실로 무한한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그대로, 오로지 한 개의 태양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원하기만 한다면, 나는 두 개나 세 개의 태양, 혹은 원하는 만큼의 많은 태양을 생각할 수가 있다. 여러 개의 태양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내 마음은 실제로 내가 보아 온 하나의 태양에 대한 원래의 기억에서부터 그렇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태양의 크기는 내가 실제로 본 그 크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을 더 크거나 더 작게 기억한다고 하면, 나는 사실, 이미 내가 본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말인즉슨 기억한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좋을 대로, 그것을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사실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실제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것이 움직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것이 가만히 있기를 원하면 꼼짝 않고 가만히 있는 것으로, 또는 내가 원하는 어떤 방향으로든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는 둥글다고 기억은 하면서도, 네모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초록색 태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태양을 초록색으로 기억하지 않으면서도, 내 멋대로 원하는 색깔의 태양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태양에 대해서와 꼭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런 것이다.


2)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무는 하나도 없고 올리브로만 뒤덮여 있는 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산의 모습, 나무, 그리고 올리브에 대해서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 기억들을 몽땅 다 잊어버렸다면,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하는지 알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어떤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할 수가 없다. 물리적인 대상에 대해 생각하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거나, 지난 일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거나, 혹은 미래의 어떤 일에 대한 예측을 듣고 있거나 간에, 누구든지 자기의 기억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그는 생각 속에서, 응시하고 있는 모든 형상들의 한계와 크기를 기억으로부터 찾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색깔이나 물리적 형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소리, 맛본 적이 없는 맛, 맡아 본 적이 없는 냄새, 만져 본 적이 없는 물체의 촉감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지각해 보지 않은 물리적 대상을 생각해낼 수 없다고 본다면,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지각한다는 것이 물리적 대상의 범위 내에 한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 내용의 범위 안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감각은 우리가 지각하는 물체로부터 그 形象을 끌어 낸다.  기억은 감각으로부터 이 형상을 받아들여 놓고, 마음의 예리한 시력은 우리가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 기억으로부터 그 형상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3)그러고 보면, 가시적 물체의 形狀에서부터 생각하는 사람의 정신적 시력(시야) 속에 형성되는 形象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하나가 다음 하나를 낳는 관계에 있는, 정확히 네 가지의 형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가시체)의 형상(形狀-역자주)이 있고, 그로부터 그것을 보는 사람의 감각에 형상이 찍힌다.(印象-역자주) 거기에서 기억 속에 만들어지는 형상이 생기게 되고(形象-역자주), 그 기억 속의 형상으로부터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속의 시력(시야)에 또 다른 형상이 생기는 것이다.(映像-역자주) 의지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고 볼 수 있는 이 모든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첫째로는, 사물의 形狀을 신체감각 속에 만들어지는 형상(印象)에 연결시키고, 이 형상을 다시, 그것으로부터 기억 속에 만들어지는 形象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으로부터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속의 시력에 만들어지는 形象에 그것을 결합시키는 것이다.4)**  이 연결의 두 번째 고리는 첫 번째 것에 더 가까이 있기는 하면서도 세 번째 것에 더 유사하다.

 

시력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 종류는 지각하는 사람의 시력이고, 두 번째 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시력이다. 생각하는 사람의 시력이 생길 때에는, 지각하는 사람의 시력 속에 있는 것에 상당하는 어떤 것이 그의 기억 속에 생긴 것이다.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시력은 스스로 이 기억 속의 이미지로 관심을 모은다. 그것은 지각하는 과정에서 눈이 물체를 향하는 것과 똑같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나는 두 가지에 들어있는 삼위일체성에 대해 관심을 촉구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지각하는 사람의 시력이 지각대상에 의해 정보화될 때 나타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기억에 의해 정보화될 때 생기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 있는 또 한 가지의 삼위일체성은 지각하는 사람의 감각 속에 만들어진 形象이 기억에 전달될 때 일어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그것을 시력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것을 제외하고 있다.5)*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의지는 말하자면, 부모와 자식 사이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 기관인 셈이다. 따라서, 의지 자체의 근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부모”나 “자식” 중 어느 하나만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한 것 그대로만 기억할 수 있고, 실제로 기억하고 있는 것 그대로만 생각할 수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 우리가 지각한 것을 확실히,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사실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있는 것인가? 그 이유는, 내가 힘들여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의지는 생각하는 사람의 정신적 시력을,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통로를 지나 정보화하는 동안에, 자기 좋을 대로 이리저리 갖다 붙이기도 하고 떼어 놓기도 하면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려고 할 때, 의지는 우리의 기억에서,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끌어내어 오도록 마음을 부추기게된다. 그렇게 한 것들을 하나의 시력으로 모아 나가다 보면, 그것은 실제 외부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우리가 실제로 지각해 본 기억이 없는 것, 다시 말하면, 결국 “사실이 아닌” 것을 만들어 내게 된다.


예컨대, 검은 색의 백조를 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6)*  그러니까, 아무도 검은 색의 백조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백조를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아 온 백조의 모양을 다른 물체에서 보아 온 검은 색에다가 갖다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양과 색깔을 따로 보아 온  것들을 각각 따로 기억할 수 있다. 나는 발이 네 개 달린 새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새를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보아 온 날개 달린 새들의 모양에다가, 역시 내가 보아 온 두 개의 다리를 더 보탬으로써, 그렇게 생긴 새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각각 따로 본 기억이 있는 어떤 것을 한데 붙여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는, 실제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원하는 만큼의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요소를 기억으로부터 꺼내서 그것들을 조합함으로써 기억의 안내 하에서 우리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기억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물체 같은 것을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으로 어떤 물체를 확대하여, 우리의 눈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거대한 세상의 크기로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성은 또한 상상으로는 미치지 못할, 더욱 광대한 크기의 세계로까지 우리를 인도해 나간다. 이런 식으로, 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數의 무한성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물리적 대상의 한계 속에서만 생각하는 사람의 시력으로는 그 무한성이라는 것을 도저히 인식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 아무리 미세한 원자까지도 무한히 많은 수로 쪼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기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입자에 이르고 나면, 이성으로는 더 계속해서 쪼개어 나갈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의 생각으로는, 더 이상으로 가늘고 섬세한 대상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들은 실제로 기억하고 있는 것, 또는 그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조합된 것 이외의 물리적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7)실제로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가? 그것은 우리에게 실제로 본 것으로부터 어떤 것을 빼버리거나, 어떤 것을 거기에 보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설명을 하겠는가? 그런 능력은 마음에 붙박혀 있는 능력으로, 마음이 가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따라 다니는 능력이다. 그 능력에는 數에 대한 특정한 적용방식이 있다. 그 방식을 사용하면 예컨대, 우리 눈에 익숙하고 잘 알아왔던 까마귀라는 이미지도, 우리가 좋을 대로 어떤 다른 이미지로든지, 심지어 우리가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이미지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 일상적인 사고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런 엉뚱한 형상이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드는 것은 마음의 그런 능력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마음은 그 감각이 감지해 준 어떤 물체의 형상에서 어떤 부분을 빼기도 하고 보태기도 하면서, 어떤 감각을 통해서도 전체로서 감지된 적이 없었던 그런 것을 상상 속에서 새로이 만들어낼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각 부분은 모두 다른 여러 대상들로부터 언젠가 감지된 적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하다 못해 조그만 물컵 속에 들어있는 모습으로라도 물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후부터는, 바다라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딸기나 체리의 맛에 대해서는, 그 후 이태리에서 그 맛을 실제로 보게 되기 전까지는 그 맛을 생각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들은, 빛이나 색깔에 대한 감각적인 경험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으므로, 빛이나 색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한 질문에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 또한 당연할 것이다.

 

 

 


1) 「삼위일체」, ⅺ, 13.

2) 「삼위일체」, ⅺ, 4.

3) 「삼위일체」, ⅺ, 16-17.

4) **역주: 지금까지, form을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로 세분해서 번역해 놓기도 했지만, 사실상 그 구분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 形相은 물론, 사물이 지각되어 가시체의 영역을 넘어선 첫 단계부터 시작해서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여기서 말하는 네 단계 어디서나 그 논리적 실체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象, 또는 形象 역시, 때에 따라서는 印象과 映像을 다 포함하는가 하면, 映像도 印象 이후의 모든 단계를 포괄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단지, 사물-지각-생각의 연결과정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5) *: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고 있는 두 가지의 심리학적인 삼위일체성은 다음과 같다. 1)지각 대상의 形狀과 감각적 지각능력,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연결하는(copulat) 의지, 2)기억 속의 形象과, 사고능력,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연결하는 의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외시키고 있는 다른 삼위일체는 감각에 찍인 형상이 의지에 의해 기억 속에 저장되는 形象으로 바뀌는 과정이다. 따라서, 형상은 연속적으로 네 가지로 나타난다. 물체의 형상, 감각에 찍힌 형상, 기억 속에 저장된 형상, 그리고 사고 속에 생긴 형상이 그것이다.

6) * 아우구스티누스는 호주 서부에 검은 백조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7) 「A.D. 389부터 네브리디우스에게 보낸 편지」, ⅶ,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