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가시적 물체는 시각과는 매우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시각은 물체를 접함으로써 시력을 일으킨다. 따라서, “시력”이라는 것은, 지각된 물체에 의해 “정보를 전달받은” 상태의 감각을 뜻한다. 만약, 가시적 대상을 치워버리거나, 아예, 가시적 대상이 없었다면, 시력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게 됨으로써 시력이 형성되게 하는 물체와 감각을 통해 그 물체의 영상으로 찍히게 된 形相은 같은 실체가 아니다. 가시적 대상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시각적인 능력과도 다르다. 시각적인 능력은, 살아 있는 인간이 가시적 대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이미 그 눈에 들어 있다. 이 감각능력은 물체가 감각에 접할 때, 즉 감각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입수할 때, 그 물체에 의해 발생되는 시력이라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 능력은 그 사람의 생물적 본성에 속하며, 시각을 통해 경험하는 대상들 그 자체와는 전혀 무관하다. ...
나아가서, 마음을 쓰는 관심이라는 것, 즉 우리의 감각을 우리가 보고 있는 물건에 고정시켜 놓고 그것을 연결하는 것은 그 본질상, 가시적 대상과 다른 것은 물론이고(전자는 정신, 후자는 물질), 감각과도 다르고, 시력 그 자체와도 다른 것이다. 관심은 마음에만 속한다. 눈의 감각을 신체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눈이라는 것이 신체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사실은, 정신이 들어 있지 않은 육체 혼자서는 지각을 할 수 없으며, 육체와 합쳐진 영혼이 감각이라고 불리는 신체기관을 통해서 지각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눈이 실명되었다는 것은, 이 감각이 신체적인 손상을 입어서 절단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은 잃게 되었다 할 지라도, 외부의 물체를 보려고 할 때 그 물체에 연결해서 시선을 고정시켜 줄 신체 감각을 이제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뿐이지, 그 사람의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비록, 신체적인 감각이 상실되어 그 시력은 없어졌다 해도,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욕망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마음의 관심이라는 것은 결코 절멸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즉 보이는 물체, 시각행위, 그리고 그 두 가지를 접합시켜 주는 마음의 관심 또는 의도라는 것은 그 속성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그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각이란 그 대상이 아니라, 지각을 하고 있는 그 생명체의 신체(영혼과 신비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의 것이다. 그러나, 시력은 그 보이는 물체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감각은 그 보이는 물체로부터 정보를 제공 받는다. 눈이 성한 사람이라면, 어둠 속에서도 손상되지 않고 건재하고 밝은 곳에서는 물체들로부터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정보를 제공받은 감각을 우리는 “시력”이라고 부른다. 시력이란 가시적 물체 때문에 생기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 물체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력은 그 자체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물체와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시각은 보고 있는 사람 속에 있다.
그러나, “시력”이라고 불리는 감각의 정보화는, 현재 보이는 물체에 의해서만, 즉 어떤 가시적 물체가 있어서 그것이 시각에 각인될 때만 있을 수 있다. 이 물체를 치워버리면 그 가시체가 있는 동안에만 감각 속에 존재하던 그 물체의 形象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시각 그 자체는 어떤 물체가 지각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고,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마치, 물체가 있는 동안에만 그것이 비친 영상이 물 속에 남아 있지만 그 물체가 사라지고 나면 그 영상도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가시체가 감각을 낳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시체는 그 形象을, 다시 말하면 그 유사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가 시각으로 무엇인가를 지각한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우리 감각 속에 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가시체의 形相과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감각 속에 생겨난 形象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러한 감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두 가지의 형상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따로 떼어내서는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 그 가시체와 똑 같은 형상이 우리의 감각에 재현되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것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마치, 밀랍에 도장을 눌렀을 때, 그것을 떼어 내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떼어 낸 후에는 물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따라서 그러기 전부터도 이미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안다.
만일, 그 도장을 액체에 갖다 대고 눌렀다면, 우리는 아무런 상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 그 도장을 떼기 전에도 그것은 액체 위에 形象을 찍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 도장의 形相과는 분명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후자는 말하자면, 도장을 치웠을 때 사라져 버리는 그 形象을 만들어 낸 원인이다. 그리고 도장의 形相, 즉 形象이 만들어지게 하는 원래의 형상은 그 도장 속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체가 치워졌을 때 그 形象도 사라진다는 것 때문에, 물체를 보고 있는 동안 시각이 가시체의 形象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잘못된 생각 때문에, 우리가 물체를 보고 있을 때 그 象이 우리의 감각에 맺힌다는 것과, 바로 그렇게 맺힌 象을 시력이라고 한다는 것을 이해가 느린 사람에게 설득시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이 점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잠시동안 밝은 불빛을 바라 본 후에 눈을 감아 보라, 밝은 색깔의 빛이 점점 달라져가면서 사그라지다가, 완전히 없어져버릴 것이다. 마치, 물체가 우리 눈 앞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빛나는 물체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 감각에 생겼던 象의 잔영이며, 그 색깔이 천천히, 사라져 가면서 변형이 생겨나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격자창을 보고 있었다면, 그 격자무늬가 그 색깔 속에 나타나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印象들이 그 물체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 물체에 의해서 우리의 감각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 분명한 것하다. 그러므로, 그 인상들은 우리가 그 물체를 보고 있는 동안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때에는 그 가시체의 외양-形狀과 너무도 가깝게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印象과 形狀이 사실상으로는 구분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더 명백하고 엄격하게,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印象은 우리의 시각행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가 성격상 서로 다른 것이면서도 어떻게 한데 어우러져서 혼연일체를 이루게 되는가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먼저, 가시체의 形相이 있고, 둘째, 감각에 인상된 그 물체의 形象, 즉, 시력 또는 “정보화된” 감각이 있다. 셋째로는, 마음의 의지로서, 감각을 대상물에 적용하여 감각 속에서 시력을 가지는 능력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즉, 가시적 대상은 우리가 그것과 관련하여 우리 자신의 신체와를 지각하고 있을 때 이외에는 생명체로서의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것은 우리 신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을 거쳐서 영혼으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감각 속에서 만들어져서 정신과 육체의 결합상태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세 번째의 의지라는 것은 오로지 영혼에만 속하는 것이다. , 이 세 가지는 이렇게 서로 다른 실체이면서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처음 두 가지는 이성으로 심사를 했을 때 비로소 구별될 수 있는 것들이다. 나는 지금 처음 두 가지, 보이는 물체의 形相과 그에 의해 감각에 형성되는 映像, 즉, 시력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의지는 그 두 가지를 강하게 연결시키는 것으로, 감각이 정보화될 때 감각을 지각대상에 적용시킬 뿐 아니라, 거기에 감각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신체적 감각에 의해서 지각된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도, 그 象은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의지는 그 기억을 향해서 작용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기억으로부터 내면적으로 정보를 전달받게 된다. 이것은 감각이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그것으로부터 외면적으로 정보화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기억, 내면적 시력,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의지라는 삼위일체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를 한 가지로 모으는 과정을 “思考”라고 부른다. 그 세 가지는 또한 모두 한 가지 실체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감각대상은 물론 사고에 포함되지 않으며, 시력을 생성하도록 정보화되는 신체적 감각도 사고에 포함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의지는 이제, 감각을 정보화시키기 위해 감각을 감각대상에 적용하고 감각 속에 그 대상의 形象을 저장하는 수준을 넘어 선다.. 사고에 들어와서는 외부세계에서 지각된 물리적 대상의 자리에 기억이 위치한다. 기억이란 영혼이 신체감각을 통해 들어온 대상의 形象을 붙들어 놓은 것이다. 감각대상에 의해 감각이 정보화될 때 이루어졌던 외부적 시력대신, 기억에 붙들려 있는 내용을 마음이 응시함으로써, 물리적 대상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내부적 시력이 생기는 것이다. 마음이 회상에 잠길 때, 의지는 마음의 관심을 기억으로 돌려서, 기억에 저장된 것에 의해 마음이 정보화되고 외면적 시력의 경우와 유사한 내면적 시력이 사고 속에서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가 외부적 감각을 정보화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제시된 대상에 감각을 적용시키고, 감각이 정보화되고 나면 그것을 감각대상과 합쳐질 때와 동일한 방식이다. 우리는 감각을 정보화하는 가시체의 形相과 감각이 정보화되었을 때 시력을 생성하는 감각 속에 만들어진 形象을 이성에 의해 구별한다. 마찬기지로, 마음이 이전에 본 적이 있는 대상의 形相에 대해 생각하는 映像(image)이란, 기억 속에 간직된 象과 그것으로부터 기억을 하고 있는(remembering) 마음이 만들어낸 象이 한데 합쳐진 것이다.
그러나, 그 영상은 마치 한 가지로 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이성의 심판이 개입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그것이 두 가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성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기억 속에 원래 들어 있던 것-(印)象은 그것을 회상할 때 마음 속에 만들어진 象, 즉 우리가 기억으로 돌아가서 그 속에서 그것을 찾아낼 때 만들어지는 象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만약, 그것이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다고, 그래서 그것을 기억할 수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회상하는 도중에, 만약 마음이 기억 속에 담겨져 있던 것에 의해 정보화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생각을 한다고 해도 정신적 시력을 갖지 못한다.
1) *: “informed"(informatus))는 앞으로 계속되는 논의 속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감각이 감각되는 물체의 形相(forma)을 접하게 되면, 그 영상이 감각에 찍히게(또는 “刻印”) 된다. 이 때 감각은 감각되는 물체에 의해 “정보가 전달된” 것이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봉인이 밀랍 위에 찍히는 비유를 참고할 것.
2) **역주: 여기서는 가시적 대상은 form itself와는 다르다고 한 것이지만, 후자에 대한 설명을 보면, which is imprinted by the object upon the sense라고 해서 좀 혼란스럽다. 이것은 내가 形相이라고 번역한 것에 해당하는 설명인 것이다. 나는 form itself는 이하에서 形相이라고 번역하였으며 이것도 물론, 가시적 대상과 구분되는 것이다. 이하에서 계속되는 설명을 보면, 아우수스티누스는 사실상, 가시체, 形象, 그리고 form itself, 즉 形相, 이렇게 세 가지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3) **역주: Forma는 영역에서 form, 딱 한 가지로만 영역되어 있어서 한역에 매우 어려움이 있다. form은 形式, 形相, 形象, 形態, 形狀 ,型式에 이르기까지, 가시계와 비가시계를 통틀어서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가시체가 감각에 찍힌 영상을 의미하는 形象 ,그리고 그것을 있게 한 논리적 근거로서 가시체에 원래 내재한다고 믿어지는 形相, 그리고 그 가시체 자체의 물리적 외양을 포괄하는 의미로서의 形狀으로 구별해서 번역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중에(p.156), 이런 구분과 대비의 맥락을 벗어났을 때에는 특히 Form의 비가시적, 순수한 數的인 특성까지 더 강조하여 이것을 形式으로 번역할 것이다.
4) **역주: 여기서부터는 形象이라고 하는 것보다 sense에 각인된 상태라는 점을 특별히 더 강조하여 image-映像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5)**역주: 여기서는 구태여 또 다른 용어 印象(impression)을 등장시키는 것은 映像보다는 象이 찍히는 일,즉, 시각행위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6) 「삼위일체」, ⅺ,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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