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이별연습

해선녀 2004. 4. 16. 06:21

 

 

비 그치고 햇살이 따사롭습니다.  수영을 갔다와서 나른한 정오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실 창가의 책상으로 옵니다. 새들이 와서 모이를 갖다 놓으라고 야단입니다. 많이 주어야 하나, 조금 주어야 하나, 또 좀 고민입니다. 이제 검둥이 녀석 수니도 무섭지 않은지, 코 앞에 와서 웁니다. 검둥이는 불끄러미 바라봅니다. 발코니에 나가 앉아 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면서도 이젠 잠이 들 수도 있습니다. 새들은 화음과 음정과 박자까지 맞추어 가며 예쁜 노래를 부릅니다. 자기들들끼리는 확실히 무슨 말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저 쪽 숲에서는 싸움이 났는지 서너 종류의 새가 모여 고함을 지르고 맞대꾸하고 참견을 하며 난리들입니다. 저득끼리, 어느 정도로 말이 통하는 것일까요? 내가 듣기에는 저리도 단조로운데...


수니는 햇빛에 빛나는 숲을 바라보다가 아파트와 숲 사이의 소로에 이따금씩 지나가는 차들과 매일 아침 쓰레기 수레를 끌고 가는 아저씨, 몰래 와서 새모이를 탐내는 다람쥐들을 참견하는 일 그게 녀석의 일과입니다. 이제 그 아저씨와는 서로 인사를 주고 받습니다. 수니가 먼저 바우와우 짖습니다. 하우와유를 그렇게 말합니다.아저씨는 빨간 베꼬니아 화분과 하얀 새집 사이로 내민 녀석의 주둥이가 햇빛에 빛나는 것을 보고 루돌프 사슴 같다고 합니다. 그는 수니를 루돌프, 루돌프, 이렇게 부릅니다. 루돌프는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아파트 뒷문에서 앞쪽 주차장까지 수레를 끌고 사라질 때까지 난간 사이로 아쉬운 듯 반짝이는 주둥이를 내밀고 바라봅니다. 녀석은 삼층까지 올라온 다람쥐가 모이를 훔쳐 먹는 건 절대 용납 안합니다. 나갔다 들어오면 집을 잘 지키고 있은 선물로 주는 비스켇 과자를 한 번에 두 개만 먹어도 꼭 탈을 내는 식성이 까다로운 녀석.그러니, 먹다 남은 음식은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습니다.


저 녀석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곧 저를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음모를 꾸미고 있는 줄을. 목사님 댁에 갖다 놓을 생각들인데 아직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 댁은 잔디밭이 아주 넓은 작은 주택인데, 사모님이 개를 돌볼 시간이 없습니다. 요즘은 털이 자꾸 빠져서 집안에는 밤에만 들여 놓습니다.조금만 밤기온이 더 따뜻해지면 밖에서 그냥 재울 생각입니다. 이별하는 연습을 하는 거지요. 지금도, 내가 고개를 돌려서 저를 한 번이라도 쳐다봐 주지 않을까,  발코니에서 내 쪽으로만 바라보다가 그냥 잠들었습니다.


헤어짐을 준비하는 동안에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디까? 녀석이 말을 못하는 것이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떠나가면 이 집에 올 사람이 저 새먹이통에 먹이를 넣어 줄지. 그것이 걱정이기도 해서,우리들이 저 새들을 버려 놓은 것이 아닌가도 생각합니다. 겨울이 오면 정말 저 새들이 더 생각나겠지요? 그들 스스로 숲속의 벌레들과 작은 씨앗들을 찾아내는 능력을 우리가 영 망쳐 놓고 가면 안될 것 같습니다. 말을 하여도, 만남과 헤어짐은 그냥 그것일 뿐입니다. 영원한 만남일 것처럼, 꼭 다시 만날 이별인 것처럼.그런 말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느 날 아침. 우리가 이삿짐을 챙기고 훌쩍 떠나고 나면. 녀석은 언젠가 그 전 주인과도 그랬을 것처럼, ‘다 그런 거지, 뭐. 올 것은 오는 것.될 것은 되는 것. Whatever will be will be! 그러면서 또 한 세상 살아가겠지요.새들도 그러겠지요.그 붉은새도, 그토록 내가 저를 사랑했던 것을 기억할까요. 아니 기억조차 없을 테지요. 수니고, 루돌프고, 저 녀석도 내가 저를 불러준 그 이름조차 까맣게 잊을테지요.어리석은 미묘한 말로 수없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다 한숨짓는 우리들보다 더 도가 통했을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들은.... 우리들의 언설로는 형언할 수 없는 말로 새들이 우는 햇빛 따사로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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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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