數의 근본 의미
21) 아우구스티누스 : 모든 이성적인 존재들이 각기 자기의 이성을 가지고 볼 수 있도록 열려 있으면서, 음식이나 음료처럼 그것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쓴다고 그것이 어떻게도 달라지지 않는 것,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있든지 말든지, 순수한 전체로서 항상 그대로 남아 있는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잘 생각해보고 말해보게. 자네는 절대로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에보디우스 : 나는 그런 것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만 말해 보겠네. 數의 원리와 그 진리는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 열려 있는 것이라고 알고 있네. 그렇기 때문에, 셈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이성과 지성을 동원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하네. 어떤 사람은 쉽게 알아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어렵게,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못 알아내고 말기도 하지. 그렇지만 數의 진리란 그것을 알아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동일한 것으로서, 변하는 것이 아니어서, 말하자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자양분이 섭취되어버리듯이 흡수되고 마는 그런 것이 아니지. 셈을 할 때 실수를 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진리는 그대로 진리로서 완전하게 존재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오류를 범하게 되는 때문이지.
아우구스티누스 : 자네 말이 정말로 맞네, 나는 자네가 이런 문제에 대해 경험이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대답을 빨리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겠네. 그런데, 만일 數라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감각을 통해서 우리가 접한 물체들로부터 끌어내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네는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자네의 생각도 혹시 그런가?
에보 : 그런 의견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겠네. 내가 감각을 가지고 수를 지각한다고 해도, 그 수의 각 부분과 그 상호관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무엇인가 하는 것만은 신체감각으로 파악될 수는 없을 것이네. 하다못해, 덧셈이나 뺄셈을 하다가 틀린 답에 도달한 사람에게 내가 거짓 답을 가르쳐 주려고 해도 거기엔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도움이 필요한 것이지. 신체감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들 예컨대, 하늘, 땅 그 안의 모든 지각대상들에 관한 한, 그것들은 언제까지 존재할 수 있는지를 알 도리가 없는 것들이지만, “7+3=10”이라는 것은, 현재도 그럴 뿐 아니라, 항상 그런 것이니까. “7+3=10”이 “10”이 아니었던 적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지. 그것은 수의 불멸하는 진리로서 나에게나, 다른 모든 이성적 존재에게나, 다 똑같은 것, 내가 말한 바로 그런 것이지.
아우 : 자네의 대답은 확실한 진리라고 생각해서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네. 그런데, 모든 수의 이름은 어떤 단위에 대해서 그것이 몇 배인가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수라는 것이 신체감각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네. 예컨대, 어떤 수가 어떤 단위의 두 배가 되면 둘이라고 하고, 세 배가 되면 셋이라고 하지. 1단위의 열 배이면 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수의 이름과 그 값은 그것이 가지는 단위의 수라는 것이지. 누구든지 단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감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네.
그런데, 우리가 감각으로 접하는 모든 것은 실제로 하나가 아닌 다수의 어떤 것으로 되어 있지. 그것들은 다 물리적인 대상들로서, 수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네. 미세하고 애매한 대상들은 우선 논외로 하고, 어떤 작은 물체든지, 모든 것들은 분명히 오른쪽과 왼쪽, 위, 아래 어느 한 쪽 부분과 다른 쪽 부분, 끌 부분 그리고 중간 부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네. 그러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진실로 딱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아.
단위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셀 수가 없다네. 단위라는 것은 물리적인 환경 속에서는 찾아내려고 해도 찾아 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잇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찾으려고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네. 그는 그것을 그런 데서 찾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 또는 그것이 그런 곳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잇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모든 물리적 대상들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단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물체의 여러 부분들을 셀 수가 없다는 말일세. 그렇다네, 내가 단위라는 것을 어떻게 배우든지 간에, 그것은 신체감각을 통해서는 결코 아니네.
앞에서도 보았듯이,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물리적 대상들 즉, 진실로 단순한 하나라는, 그런 것이 아닌 것들 뿐이지. 단위라는 것은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감각을 통해서 수를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며, 적어도, 이해를 통해서 배우는 것들은 결코 감각을 통해서 알 수가 없다는 것일세. 수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에 대한 몇 곱절인가 하는 것으로 정의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신체감각으로는 감지될 수가 없는 것이지. 조그만 물체의 半은 또 다시 半으로 쪼개어질 수 있고 그 물체 속에는 그 두 부분이 다 들어 있지만, 그 둘은 그냥 둘인 것만은 아니라네.22)* 그렇지만, “둘”이라고 불리는 수는 실제로, 단위의 두 배를 말하지만, 그 半인 순수하고 단순한 하나라는 단위 그 자체는, 두 쪽으로, 세 쪽으로, 또는 몇 개의 부분들로 다시 나뉘어질 수가 없다네. 순수하고 단순한 단위, 그 자체는 말이지.
수열을 보면, 2라는 수가 1 다음에 오고, 그 둘을 놓고 비교할 때 전자는 후자의 두 배라는 것을 알 수 있네. 그런데, 그 다음에는 2의 두 배인 4가 곧바로 오지 않고, 3이라는 수가 그 사이에 오지 않는가. 이러한 원리는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고정적인 법칙으로서, 그 뒤의 수열 전체에 계속 이어진다네, 1이라는 수 즉, 모든 수의 제일 첫 번째 다음에는 곧바로 그 두 배인 2가 따르지만, 두 번째 수 즉, 그 2의 두 배인 수는 2로부터 두 번째에 오고, 세 번째 수 즉, 3의 두 배인 수는 3으로부터 세 번째에 오고, 다시 4의 두 배인 수는 4에서부터 네 번째 수라네. 이런 식으로 수의 배열 전체가 처음의 두 수, 1과 2의 관계에 대한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야. 그것은 어떤 수의 두 배는 그 수가 수열의 처음에서부터 몇 번째에 오는지, 정확하게 그 거리만큼 그 수로부터 떨어져있다는 원리라네.
우리는 이렇게 고정적이고 확실한, 어김없는 수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수라는 것은 워낙 무한하기 때문에 신체감각으로서 그 전체를 다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네. 이 원리가 모든 수에 다 해당된다는 것을 정말 어떻게 아는가? 이렇게 확실하고 틀림없는 수의 진리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신비적인 환상이나 이미지 때문에 알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실제로 신체감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우리 내면의 빛에 의해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이라네.
신으로부터 훌륭한 능력을 부여받아, 어리석은 왜곡과 편견의 구름을 헤치고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 그들은 이러한 진리에 대해 토론을 하면서, 수의 법칙에 대한 진리는 신체감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이성의 정밀한 검토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순수하게 남아 있으면서 항상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네. 우리는 물론 각자의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제나름대로 그것을 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어떤 침해를 받거나 변질되는 일이 없네. 어쨌건, 자네가 나의 질문에 대답할 때, 일단 수의 법칙과 진리를 먼저 생각하게 된 것만 해도, 나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네. 성경에서도 “지혜와 수에 대해 알아보고 탐색하여, 그것을 찾아내고자, 나는 모든 정신을 쏟았노라”23)* *라고 하면서, 지혜와 수를 연결시키고 있음은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네.
24)지헤로워지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마음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에 온 정신을 다 기울여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관심을 집중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찰나적인 것에 우리의 영혼이 매달려서 쾌락만 추구하고 있는 일이 없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영혼을 지켜보아야 한다. 시간적 공간적 한계 내에 있는 모든 존재들에 대한 욕망을 멀리하고, 그 영혼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만을 붙잡으려 하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지혜는 지금까지 겪어 온 것으로부터 당신이 얻어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당신에게 속삭여 줄 것이다. 당신의 마음 내면에서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지혜는 당신이 마음 바깥의 사물들에게로 눈을 돌릴 때마다 당신을 되돌려 놓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감각적인 기쁨과 슬픔을 가져다주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다 數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러한 事物의 形式을 보게 해 줄 것이다. 25)* 당신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묻겠지만,당신 내면을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안에 외부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지 않고서는 감각자료들에 대한 그 모든 판단을 내릴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제,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는 그 위에서, 반짝이면서 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헤엄쳐 다니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라. 그 모든 것들이 다 數를 이룸으로써25)* 形式을 갖는다. 그들에게서 數를 빼버리면 남는 것이 없다. 그들이 모두 數的 關係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 수를 있게 한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대체 누가 그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는가? 모든 물리적 형태들을 만들어 내는 사람은 결국, 그 작품의 기초가 되는數를 가지고 있어서, 그 수에 맞추어서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들은 자신의 팔다리와 연장들을 움직일 때마다 그들 내면의 수의 개념에 맞추어서 사물들을, 최대한으로 수의 완성을 이루도록 만들어낸다. 그들은 그 사물들과 감각적인 교류를 계속하면서, 초월적인 수를 바라보는 내면의 기준에 그것들이 맞아 들어올 때까지 지켜보는 것이다.
따라서, 한 작가의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바로 數라고 할 수 있다. 손발들도 리듬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손발이 별다른 할 일이 없이,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하는 특별한 목표가 없이, 단지 쾌락을 위해서 사지를 움직이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춤춘다고 한다. 그 춤추는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數가 “그건 바로 나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람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게 하는 신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를 생각해보자. 거기에도 공간적 형식 속의 數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체적 동작이 어째서 아름다울 수 있는지도 연구해 보면 거기에는 시간적 형식 속의 數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의 형식들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거기에 시간과 공간이 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이 사실적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數라는 것이 엄연히 살아있다. 數가 살고 있는 장소는 공간적으로 규정해낼 수도 없고, 몇 날 몇 일이라는 식으로, 그 기간을 말할 도리는 더욱 없다. 사람들이 匠人이 되기 위해 기예를 연마한다고 할 때, 그들의 팔과 다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시간 속에서만 작동한다. 그들의 기능이 발전되는 것은 오직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가능하다는 뜻이다. 어쨌든, 영원한 數를 발견해내기 위해서는 匠人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진리의 은밀한 거처로부터, 그 비밀스러운 안식처로부터, 지혜가 비쳐 나올 것이다. 만일 진리가 당신의 미약한 시력 앞에서 어디로인가로 사라져버리더라도, 지혜는 원래 그 스스로의 모습을 비추어 주었던 곳으로 마음의 눈을 돌려서 다시 집중하게 한다. 당신은 잠시 시선을 놓쳐버린 것일 뿐, 다시 기운을 얻어 건강해지면 그 시력을 되찾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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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자유의지」, ⅱ, 20-24.
22)* : 즉, 그것들은 계속해서 작은 부분들로 더 쪼개질 수 있는 것이다.
23)*:: 앞의 p.128 주석 8)* 참조. 아우구스티누스는 희랍어판, 「전도서」, 7:25의 “지혜와 수”(Sapientiam et numerum)를 따르고 있다. 반면에, 불가타성서(Vulgate - 4세기의 라틴어 성서_역주)에는 “지혜와 사물의 이치”라고 되어 있다.
24): 「자유의지」, ⅱ, 41-42
25)** : 여기서의 形式에 가장 가까운 form의 번역은 앞에서의 形相이다.( p.16, 18, 101~) 거기에서는 form을 가시적, 비가시적인 여러 다른 번역들, 形態, 型式, 像, 象 形象, 등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形相이라고 번역한 것이었다고 하면, 여기서의 形式은 오로지, 외부세계의 가시적 대상들과 영혼의 내면세계의 비가시적 실체를 가시적 內容과 비가시적 形式으로 대비시킨 개념으로 파악한 것이다.
26)* 모든 물리적 현상들 예컨대, 음악이나 춤에서의 형태와 동작에도 數的 關係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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