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제 4 장 학습의 과정 - 9 理性의 진보와 자유교양학과

해선녀 2008. 12. 19. 19:32

 

 

理性의 진보와 자유교양학과

 

 

27) 우리가 지금까지 탐색해 본 바에 의하면, 감각적 지각에도 이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력과 청력의 경우, 그 자체로서는 물론이고, 그에 수반되는 쾌락들에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의 이성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있다. 그 외의 다른 감각들에 대해서는, 그에 수반되는 쾌락들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합리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것들은 오히려, 단순히 생명체로서의 유목적적인 기능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주로 사물의 각 부분들간의 조화에서 오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 조화를 “합리적인 것”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청각에 있어서, “적절한” 조화라고 하거나, 어떤 리듬음악이 “합리적으로 작곡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 음악이 “듣기 좋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아름다운 물체가 우리를 매혹할 때의 색깔, 또는 맑고 투명한 소리로 튕겨지는 현의 소리 그 자체에 대해 우리는 “합리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시각적인 쾌락과 청각적인 쾌락에 대해서 그 量的 對比와 운율 또는 박자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그것을 합리적이다 아니다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 건물을 돌아보면서28)*,, 어느 벽면이 그 면의 어느 한 쪽에만 문이 한 개 나 있고 건물의 거의 중앙 부분에 또 한 개의 문이 나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이 어쩐지 눈에 거슬린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어떤 건물에,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면서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 있어 보이면 우리는 일종의 시각적 손상 같은 것을 입는 것이다. 반면에, 창문 세 개가 건물 벽 한 가운데에 한 개, 그리고 그 양쪽으로 하나씩 배치되어 있어서 목욕탕 전체에 똑같은 간격으로 빛을 골고루 비쳐 주고 있는 벽면을 보게 될 때에는 얼마나 기분이 좋고 편안해지는가!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건축가들은 “계획”이라는 말을 하게 되고 비대칭적으로 배치된 부분들에 대해 “무계획”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29).*

 

위에서 지적된 원리들은 매우 널리 알려진 것으로, 거의 모든 예술작품이나 생산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음악에 있어서의 운율이 모든 듣기 좋은 소리의 원인이라는 것과, 소리를 들을 때 느껴지는 즐거움에는 반드시 理性의 요소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람 앞에서 어떤 의미있는 몸동작을 보여주고 있는 무용수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量的對比-율동(measure)"(modus)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동작을 보고 우리의 눈이 즐거워질 수도 있겠지만, 그 춤은 지금 우리에게 육감적인 쾌락 그 이상의 다른 무엇을 매우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다“(reasonab.le)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그 무용수가 날개 달린 비너스와 망또 입은 큐피드의 춤을 추고 있다 하자. 그런데, 그가 뛰어난 몸짓과 자세로 그 춤을 추고 있다고 하면, 동작 자체로서는 우리 눈에 거슬릴 것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몸짓이 결국 우리의 눈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30)*  차라리, 그 동작이 우아하지 못하였다면, 우아한 동작은 영혼이 그런 신체와의 연관으로 인해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는 視覺에 관계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눈을 거슬렀다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감각을 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그 감각을 통해 경험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와는 관게가 없는 일이다. 동작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데도, 우리의 마음은 그 동작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의 아름다움에서 즐거움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이 점은 청각에서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으로서, 청각이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리고 매혹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소리는 그것을 듣고 있는 귀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전달하려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Quid tantum Oceano properent se tingere soles Hiberni vel quae tardis mora noctibus obstet"

(Vergil, Georgics 0-481)

 

"겨울 해는 그리 쉬이도 바다 속에 빠지더니, 어인 일로 밤은 이리도 더디 가는고.“

(버어질의 전원 서사시, 게오르기카, 0-481)

 

 

이런 싯귀를 들을 때, 그 운율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과 그 속에 담긴 생각을 감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우리는 절대로, “그 소리 참 적절하다“라고 하는 말을 “그 정서가 참 적절하게 표현되었다“라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합리성의 원칙이 나타나는 세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첫째는 행위의 목적에서, 둘째는 언어표현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쾌락에서 나타난다. 첫 번째 것은 생각이 없는 행위는 없다는 것, 두 번째는 가르치는 일의 합리성,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생각하는 행위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말한다. 첫 번째 것은 善을 행하는 것, 뒤의 두 가지는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知的 訓練에 관한 것이다. 우리 내면의 합리적 원칙 즉, 理性을 사용하고 이성적인 것을 창조하고 추구하는 요소는 理性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만남 속에서 키워지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쏟아낼 수 있지 않는 한,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즉, 의미를 가진 소리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감각을 대화의 매개체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는, 상대방의 마음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는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다시 입과 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을 표시하고 구별해낼 수 있는 방법으로서 알파벹 문자들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사물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생각했더라면 그런 인간적인 성취들이 다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물의 수가 유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수를 세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 유용성이 인식되면서 문자와 산술이 발전되었으며, 그와 함께 복사술과 계산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 시기는, 그리스어로 그것을 어떻게 불렀는지 당장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바로우(Varro)31)*가 “문자”(litteratio)라고 불렀던 문학 교과목이 생겼던, 말하자면, 문법의 유아기였다.

 

이성은 이제 더 진보되어, 그와 같이 문자로 표시할 수 있게 된 소리들 중에서도 어떤 것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쉽고 분명하게 발음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입을 열어서 아무 것으로도 입을 막지 않은 채로 소리를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것은 입술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움직여서 압력을 주면서 소리를 내어야 하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소리들과 연결시켜 주지 않으면 발음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성은 그런 문자들을 차례대로 모음, 반모음, 그리고 묵음이라고 불렀다. 이성은 그 후, 음절도 발견하게 되고, 단어의 여덟 가지 종류와 형태도 분류해 내는가 하면, 단어의 사용과 그 조합과정을 지배하는 원리들을 조심스럽게 만들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는, 數와 양적 대비를 소리와 음절의 다양한 길이에 적용함으로써, 어떤 소리와 음절은 다른 것들보다 그 길이(quantitiy)가32)*  두 배로 더 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성은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그 규칙을 밝혀 내었다.

 

이 단계에 와서 문법교과가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문법”이라는 이름 자체는, 그것이 문자에 대한 관심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그래서 라틴어로는 그것을 literature라고 한 것이다) 나타낸다. 그러나, 어떤 글이든지 그것이 씌여지기까지는 인간이 꼭 기억해 두기 위한 어떤 내용이 있었다는 점 때문에, 그것은 어차피, 역사에 관한 관심으로까지 진전될 수밖에 없었다....

 

문법 교과가 완성되고 조직된 후, 이성은 바로 그 교과를 생겨나게 한 知的 能力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하기 시작했다. 즉, 定義上, 분류와 종합이라고 할 이성적 능력은, 문법이라는 교과를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일 뿐 아니라, 여타의 오류도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지켜주는 기능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은 학문의 연장과 도구라고 불리어지는 것들 그 자체를 분류하고 표시하고 조직하는 일을 먼저 시작하지 않고는, 어떤 다른 교과도 구성해나갈 수가 없었다.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변증법”(논리학)이라고 일컫는 학문 중의 학문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변증법은 학문을 가르치는 방법과 학습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훈련으로서, 이성은 변증법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현재 그 자신이 무엇이고, 무엇이 되고 싶어하며, 또한 무엇이 될 능력이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은 앎이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한 교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앎에 도달하게 해주려는 소망을 담고 있는 교과일 뿐 아니라, 그 앎을 실현해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교과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무엇이 선하고 이로우며 영예로운 것인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순수한 진리에 입각해서 그것을 판단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감각과 습관만을 좇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는 敎授(instruction)의 방법으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깊은 感動을 일으키는 방법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이성은 그러한 感化를 일으키기 위한 교과에 “수사학”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 놓았다. 그것은 지적 통합성 자체보다도 현실적인 필요성을 더 추구하는 교과로서, 그 무릎 위에는 사람들이 유혹을 느낄 만한 갖가지 것들이 가득 쌓여 있어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이롭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나누어 주고 있다.

 

여기까지가 여러 가지 기호들로 표현되고 “합리성”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인간의 이성이라는 능력이 자유교양학과라는 것을 통해 이루어낸 것들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은 神性的 最高幸福의 경지 즉, 瞑想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것을 원하게 되었다. 한 편으로는 그 높은 경지에서부터 굴러 떨어질까 발밑을 조심해가면서, 이성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헤쳐 나갈 길을 만들고 질서정연한 절차를 마련해 내었다. 이성이 바라건대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눈으로 보지 않고도, 그 순수성이 내비쳐지는 그런 아름다움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데는 감각이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자기들이 진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시끄럽게 떠들어대다가도, 자신들의 다른 어떤 목적이 있을 때는 이성을 불러대곤 하는 감각이라는 것에로, 이성은 잠시 눈을 돌려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

 

이성은 제일 먼저 귀(耳)를 살펴보았다. 귀들은 이성이 최초에 문법과 변증법, 수사학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해주었던 언어야말로, 바로 자기들의 소유물이라고 떠들어대었다. 그러나 분별력의 명수인 이성은 소리라는 것과 그 소리에 의해 표현된 의미라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성은, 귀에 해당하는 부분은 오로지 이 소리뿐이라는 것과, 소리에는 생명체가 가진 목소리, 관악기를 불 때 나는 소리, 사물이 부딪치는 소리로 대별되는 세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성은 희비극의 배우들, 합창단을 비롯해서 일반적으로 음악을 위해 자기 목소리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리가 첫째 부류에 속하고, 플루트 같은 관악기가 두 번째, 기타, 라이어, 심벌즈 등의 모든 타악기들이 세 번째 부류의 소리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성은 그와 같은 모든 소리들도, 체계적으로 정의된 음의 장단과 높고 낮은 액센트33)*에 따른 다양한 형식으로 잘 분류되지 않은 채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성은 이것이 바로 문법학자들이 음절에 대한 면밀한 연구 끝에 “韻脚”(feet) 또는 “음의 강약”(accents)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길고 짧은 음절이 거의 동일한 비율로 섞여 있음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성은 그러한 韻脚들을 조직해서 확고한 형식으로 분류해 보려고 했다. 우선, 귀에 들리는 그대로, “句”와 “節”로 구분을 했다. 그리고, 운율의 흐름이 그 형식에 나타나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보다 더 이상 연장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성은 운율이 되풀이되는 지점의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바로 詩의 句節이라는 개념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경계로 표시되지는 않으면서도 합리적인 운각의 조직이 있는 흐름이 있어 보이면 그것을 “리듬”이라고 하였고, 라틴어로는 간단하게 “수”(numerus)라고 불렀다.

 

이렇게 이성적인 작용에 의해 시인들이 생겨났으며, 그들이 소리로만이 아니라, 그 언어와 내용이 의미 있는 작품을 썼다는 것,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이성적인 한계 내에서 어떠한 상상이든지 바라는 만큼 펼쳐나갈 수 있는 자유와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는 결국 기본적인 문법 훈련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또한 문법학자들로 하여금 시인들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잇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성은 이 네 번째 단계에서는34)* 리듬에서나 調音에서나, 數가 가장 큰 변수로서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완성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성은 數의 본질에 대해 세밀하게 검토한 결과, 특히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을 이성이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數의 도움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數의 신성함과 영원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성은 갈수록 그러한 數의 훌륭함과 순수함이 사람의 목소리라는 신체적 요소에 결부됨으로써 타락되어 가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우리가 마음으로 보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현재로서 존재하며 영원불변하는 것이며, 數는 바로 그런 것에 속하는 것임에 반해, 소리라는 것은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되는 것으로서,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그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성의 호의로, 시인들은 당연하게도, 음악의 신 뮤즈는 쥬피터와 머큐리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는 그럴 듯한 이야기도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래서,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두 가지 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이것에다가 사람들은 “music”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이성은 이제 시각에 대해서도 연구하기 시작했다. 땅과 하늘을 다 뒤져보아도 모든 쾌락의 근원은 결국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이성은 알아내었다. 거기에서 좀더 분석해 들어가서, 그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락의 근원은 바로 形式이며, 그 形式은 量的 對比에 기인하고, 양적 대비는 또한 數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성은 이제, 線 또는 圓등의 물리적인 형태나 모양들이 과연 얼마만큼 우리가 지성으로 추상해낸 내용에 가까울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성은 그런 도형들은 우리의 지성으로 도달하게 된 것들에 비해 매우 열등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알게 되는 그런 것은 마음으로 알게 되는 것에 견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성은 그와 같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들을 하나의 교과로 묶어서 그것을 "기하학"이라고 이름지었다.

 

그 다음으로는 하늘의 움직임이 우리의 이성의 관심을 끌게 되어 세밀한 관찰이 시작되었다. 역시, 계절의 규칙적인 연결, 불변하는 별들의 항로, 그리고 변함 없는 별들간의 간격 등을 관찰한 결과로, 이성은 여기에서도 양적 대비와 수가 그 완전한 통제원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성은 자연현상들을 계속 정의하고 분석하여 자료들을 전체적인 체계로 묶어 감으로써 천문학이라는, 차라리 종교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큰 버팀목이 되지만 지적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었던 학문을 탄생시키게 되었다.35)*  이리하여, 이 모든 학과들에서 이성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수가 들어 있으며, 그것은 사고와 명상을 통하여 절대진리라고 확인된 부분에서는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는 달리, 감각적 자료들에는 오로지 그러한 절대진리의 그림자나 흔적만 있을 뿐이지, 實在 그 자체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성은 이제 눈을 들어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영혼의 불멸성을 확인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성은 모든 것에 대한 면밀한 검토 끝에 그 자신의 힘이 매우 위대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무엇이든지 이성이 해낼 수 있는 일은 다 數를 가지고 해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굉장한 영감이 떠오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모든 계산을 할 수 있게 하는 수의 원리라는 것이 곧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數는 이성의 그 모든 노력의 목적지에 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마치, 프로테우스(Proteus)36)* 가 그 손안에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절대진리의 지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수의 원리에 이성은 전심전력을 쏟았다.

 

그것은 전에 우리가 학문주의 철학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알피우스(Alpyus)가 언급했던 원리이다. 우리가 세고 있는 물체들은 수의 원리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물체들은 그 자체로서 진리가 아니고 우리를 기만하는 이미지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그 쪽으로만 돌려놓음으로써, 이미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절대적 수의 원리조차 우리의 마음에서 빠져나가게 해버릴 때가 많다. 이와 같은 기만적인 이미지들에 넋을 뺏기지 않고, 교과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단위들로 구성해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교육받은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신에 관한 것들에 대해 연구한다면 헛된 일이 아니다. 神聖性은 단지 믿음의 대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명상과 이해를 통해서 가지게 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 자신의 욕망의 노예로 남아 찰나적인 것을 탐하여 마지않는 사람은 그에게 가능한 실수란 실수는 모두 저지르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야, 그 모든 현세적인 것을 다 포기하고 순수한 삶을 살려고 해도, 그것은 여전할 것이다.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답할 수 있기 전에는 말이다.

 

“無”란 무엇인가,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물”이란 무엇이며,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란 무엇인가? “물체”란 무엇을 의미하고, “물체의 형식”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간”은 무엇이며, “시간”은 무엇인가? “공간 속에서” 혹은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공간 속의” 움직임이라는 것과 “공간 속에” 있지 않는 움직임이란 무엇인가? “안정적인 움직임”은 무엇이며, “영원”이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어떤 “장소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시간적인 것이 아닌 것”과 “항상 존재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과 “어떤 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때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런 모든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하는 한, 그는 여전히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_ 그렇다고 해서, 神에 대한 지식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오히려 무지할 때 더 잘 알게 되는 것이니까_ 영혼에 대해 탐구하고 논의하고자 한다면, 그는 매우 먼 데까지 헤매게 될 것이다. 오히려, 단순하고 명료한 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영혼에 대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서, 數는 훌륭한 능력을 타고난 사람, 경륜이 있거나 좋은 환경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 그리고 모든 욕망을 버리고 방금 언급한 학문들에 제대로 정진해 온 그런 사람들에게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유교양학과목들은 實在에 대한 이해와 명상 그 자체만을 위해서 공부하기도 하지만, 실질적인 필요 때문에도 배우기 때문에, 타고난 능력이 있거나, 어릴 때부터 꾸준히 전자의 목적에 집중해서 공부해 온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마스터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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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질서의 원리」, ⅱ, 33-34.

28)*: 이 토론은 카씨키아쿰에 있었던 베레쿤두스의 시골집, 목욕실이 있던 건물에서 했던 것임.

29)*: *: 라틴어로는 ratio로서 理性을 뜻한다.

30)*: 즉, 그 춤은 이교도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31)*: : Marcus Terentius Varro(116-27 B. C. )는 「disciplinarum Libri Novem」(知的 陶冶에 관한 9권의 책)이라는, 자유교양학과에 대한 권위 있는 저서를 남겼다.

32)*: : 여기서 문자 그대로는, “범위(extent)”, “크기”라는 뜻인 “Qantity"(Quantitas)는 모음과 음절의 길이에 관한 문법적인 의미로만 쓰였다.

33)*:  라틴어에서 액센트의 “높고 낮음”이라는 것은 주로, 음의 고저가 아닌, 음의 강약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34)*:  이것은 음악의 단계로서, 고전적 문화에서는 항상 詩와 가깝게 연결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 앞의 세 단계는 차례대로, 문법(산수 포함), 변증법, 수사학이었으며, 그 뒤로, 기하학과 천문학을 합쳐서 7교양학과를 이루었다.

35)*: :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문학이 사이비 과학인 점성술과 매우 가깝다는 점에서 천문학을 그다지 믿지 않았으며, 나중에 그의 다른 자유교양학과 목록에서는 그것을 아예 빼버리기도 하였다.

36)*: : 바다의 노인 프로테우스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신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메네라우스(Meneraus)는 트로이에서 돌아오면서 그를 붙잡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줄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Homer, 「Odyssey」, ⅳ, 354-569. Vergil의 전원시 「Gorgics」, ⅳ, 388 ff에도 프로테우스가 나온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절친한 친구 알피우스는 카씨키아쿰의 대화에 참여했으며, 여기서 그가 언급했다는 것은 대화편 「反아카데미론」, ⅲ, 5, 11에서 나왔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