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Augustine의 교육론(번역)

제 4 장 학습의 과정 - 7 절대적 진리 : 플라톤의 영향

해선녀 2008. 12. 9. 10:33

 

 

 

절대적 진리 : 플라톤의 영향

 

 

 

  15)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서도 플라톤은 누구보다도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연하게도, 그들 모두의 빛을 상실케 했을 정도로, 대단한 빛을 발한 사람이다. 그는 아테네의 좋은 가문 출신으로서, 뛰어난 능력으로 동료학생들을 훨씬 앞질러 갔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과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만 가지고는 철학이 완성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갈 수만 있다면 될수록 많은 나라로, 특별히 뛰어난 어떤 학문이 있다고 하는 곳마다 찾아다니면서 여행을 하였다.  16) * 그래서 플라톤은 이집트에 가서 높은 평판 아래 가르쳐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배웠다. 이집트에서 이태리로 와서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명성이 있는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뛰어난 교사들의 가르침 아래 더 편안하게, 당시 한창 번성하고 있었던 이태리 철학의 모든 것을 마스터하였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가 배운 것들이나 자신의 탁월한 지성의 힘으로 파악한 모든 것에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와서, 거의 모든 대화편에 그를 대화자로 등장시키게 되었다. 도덕적 문제에 관한 토론들도 모두 소크라테스의 매력을 그대로 풍기면서 이끌어 갔다. 지혜에 관한 연구는 행위(action)와 사유(contemplation)에 관한 것이다. 그 학문의 한 부분은 “행위적”이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한 부분은 “사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행위적인 부분은 삶의 행위에, 즉, 도덕적 규범에 관한 것이고, 사유적인 부분은 자연의 인과법칙과 절대적 진리의 탐구에 관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학문의 행위적인 부분에, 피타고라스는 그가 알고 있는 그 많은 지식을 동원하여 사유적인 부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플라톤은 두 부분을 하나로 합치고 다시 그것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철학을 완성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 첫 부분은 도덕적인 부분으로서, 원칙상 행위에 관한 학문이다. 두 번째는 자연적인 부분으로서, 사유로 발전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합리적인 부분으로서,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데 대한 학문이다. 세 번째 것은 행위와 사유에 다 같이 필수적이지만, 그 자체로서 진리에 대한 탐구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지는 학문은 앞에서, 지혜의 연구는 행위와 사유의 연구로 나누어진다는 말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 철학의 각 부분의 성격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즉, 모든 행위의 목표를 무엇으로 이해하고 믿고 있었으며, 모든 자연적 사물들의 원인과 이해의 근원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였는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매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생각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책에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했던 것처럼 토론의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소크라테스도 그러했듯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지식이나 의견이 무엇인지를 항상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플라톤의 견해를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는 그의 저작들 가운데서 그가 나타낸 견해들을 상기하면서, 그것이 그 자신의 견해였든, 아니면 그가 받아들인 다른 사람의 견해였든 간에, 그것을 이 책에 소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모든 이교적인 철학자들 위에 우뚝 선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었던 플라톤은 당연히 그랬겠지만, 뛰어난 통찰력과 진리에 입각해서 그를 충분히 이해한 사람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신은 모든 존재의 원인이자, 이해의 궁극적 원리이며, 삶의 질서를 이끌어 가는 법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 것은 자연철학의 관심대상이고, 두 번째는 합리적 철학, 세 번째는 도덕철학의 대상이다. 플라톤 자신이 현명한 사람이란 신을 모방할 줄 알고, 또한 신을 알고 사랑하면서 신과 함께 있는 것으로 행복한 사람을 말한다고 한 바에야, 우리가 이에서 더, 다른 철학자를 찾아나서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다른 어떤 철학자도, 플라톤 학파들보다 더 기독교인과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17)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고 남다른 명성과 명예를 누렸다고 할 만한 철학자들이라면 누구든지, 모든 신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신에 대한 그들의 탐구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초월할 수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변하는 것은 절대로 신의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최고의 신에 대한 탐구에 관한 한, 모든 영혼들과 모든 변화하는 것들을 다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모든 변하는 대상들은, 그것이 그 자체일 수 있게 해주는 그 形相(form)을 오로지 신으로부터 부여받는다는 것과, 신은 불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形相의 존재방식이나 본질이 어떻건 간에, 그것은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 세상 전체를 생각해 보자. 그 가시적인 모양과, 質과, 그 질서 있는 움직임들을, 그리고 하늘에서 땅까지, 그 속에 가득 찬 모든 요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 곳에 있는 모든 생명들의 삶을 바라보라. 나무들처럼, 우리들에게 자양분을 공급하고 부패를 막아주는 생명체도 있고, 동물들처럼 감각적 지각능력을 더 가지고 있는 생명체도 있다. 거기에, 그 모든 것들보다도 더 우수한, 지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도 있으며, 또한 아무런 자양분도 취하지 않고도 존재하고, 느끼고, 이해하는, 예컨대, 천사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모든 생명의 형상들은 다 신으로부터 그 존재를 부여받은 것일 뿐이며, 신은 다만, 존재할 뿐이다. 오로지 신에게 있어서만이, 존재한다는 것과 살아있다는 것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별개의 일이 아니다. 신은 살아 있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삶과 앎 역시, 신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으로서, 신은, 앎이 없는 삶이 없는, 그런 존재이다. 신에 있어서는 앎과 행복 역시 차이가 없는 것으로서, 행복 없는 앎은 없다. 신에게는 삶과 앎과 행복함이 곧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이다.

 

  18)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 모두 이와 같은 신의 불변하는 본질과 그 존재의 단순성 때문이었다는 것과, 신은 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서도 창조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물질이 아니면 생명이며, 생명은 물질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물질의 形相은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생명의 形相은 단지 앎의 대상으로만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可知的인 형상을 감각적인 형상보다 더 선호하였다. “감각적”이란, 신체적인 시각이나 촉각을 가지고 감지하는 것, “가지적”이란, 마음의 눈으로만 이해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예컨대 모양이 어떤가 하는 것처럼, 대상의 質에 관한 것이든, 노래를 얼마나 잘 부르는가하는 것처럼 대상의 운동에 관한 것이든 간에, 모든 물리적인 대상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평가를 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 속에 그러한 대상들 자체보다 더 우월한, 대상의 形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릴 수가 없을 것이다. 延長과 소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는, 대상의 形相이라는 것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마음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은 또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감각적인 대상들의 형상에 대해 평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아둔한 사람보다는 명민한 사람이, 숙련이 덜 된 사람보다는 숙련이 잘 된 사람이, 연습을 덜 한 사람보다 연습을 더 한 사람이 더 훌륭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같은 사람이라도, 경험을 쌓고 나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판단이 생길 것이다. 무엇이든지, 증감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점에 대해 생각해 본 재능 있는 학자들은 결국, 그와 같이 변화하는 형상을 가지고 있는 대상들로부터는 사물의 제1원리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정신과 물질이 다 같이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形相이 없이는, 그것들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이 세상에서 영구적으로 제1형상이라는 것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따라서 더하느니 덜하느니 하는 그 어떤 비교의 대상도 되는 일이 없는 그런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렇게 불변하는 “어떤 것”, 그 자체는 창조된 것이 아니면서 거기에서 모든 것들이 연유되는 그것에서, 불변하는 사물의 제1원리가 발견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처럼, 창조물들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그러한 비가시적인 신에 대한 인식이 그들에게 생기게 되었다는 것은, 신이 그들에게, 신이 알고 있는 바 그대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불변하는 진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과, 변하지 않고 항상 진리인 모든 것들이 거기에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가 없다. 이러한 진리는 당신의 것도 내 것도 아니며, 어떤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 당신은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열려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동일한 조건으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마치 어느 순간에, 싹 걷혀버릴 수도 있지만, 여전히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도록 열려있는, 빛과도 같은 것이다. 동일한 조건으로, 이성적이고 가지적인 모든 존재들 앞에 개방되어 있는 그것을, 그 중 어느 한 사람만의 소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조금 전에, 신체감각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도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눈이나 귀로 함께 감각했던 경험의 내용은, 예컨대, 당신과 내가 동시에 보고 들었던 색깔이나 소리는, 한 개인의 눈이나 귀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두 사람 모두의 감각에 동시에 열려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과 내가 각자의 마음을 가지고 함께 바라 본 그것이, 우리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의 마음에만 속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본 것을 어느 한 사람의 눈에 속한다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사실상 제3의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우리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야기하면서 거기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바라보려고 했던 진리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보다도 더 우월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진리는 우리의 마음과 동일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가, 열등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진리가 마음보다 더 열등한 것이라면, 마치 물리적 대상들이 우리보다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에 따라 어떤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 판단을 할 것이다. 물리적 대상들에 대해 우리는 “이러저러하다” 또는 “아니다”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생겨 있는지를 아는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되어 있어야 하는지도 안다. “이건 별로 하얗지도 않아”라든가, “이건 제대로 된 사각형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물리적인 대상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대해서도, “그다지 능률적이지 못해”라든가, “그리 온순하지 않아”, “그리 열심이 아니야”라고, 도덕적 기준에 따른 평가를 내린다. 그것은 또한, 모든 사람이 함께 알고 있는 진리의 내면적 규칙에 따른 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진리의 내면적 규칙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평가를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영원한 것이 찰나적인 것보다 우월하다”라든가, “셋 더하기 일곱은 열이다.”라고 말할 때, 아무도 그것이 그래야 된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 뿐인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내면적 규칙을 검토하거나 수정하지는 않고 다만, 그것을 발견하는데서 기쁨을 느낄 뿐이다. 진리가 우리의 마음과 동급에 불과하다면, 진리도 변화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때에 따라 진리를 더 잘 보기도 하고 덜 보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은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그 자체 안에서, 우리가 그것을 더 잘 본다고 더 나아지고 덜 본다고 어디가 더 모자라게 되는 그런 일이 없이, 항상 변치 않고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항상 온전하고 썩지 않으며, 그것을 향하고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그 빛이 비치는 것으로 기쁨을 주고, 그것으로부터 돌아앉은 사람에게는 맹목이라는 것으로 벌을 준다. 우리는 진리라는 기준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이지,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아”라든가, “그 사람은 알만큼 다 알고 있어”라고 말한다. 마음이 그 불변하는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나아갈수록, 진리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우리 마음보다 열등한 것도 동등한 것도 아니라고 하면, 결론적으로 진리는 마음보다 더 우월하고 뛰어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

 

  19) 最高善을 알게 되고 그것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은 오직 진리에 입각해서 그럴 수 있으며, 그럴 때 그것은 곧 지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고선을 진리 안에서 인식하고 거기에서 최대한으로 그것을 찾아내어 향유해야 한다. 최고선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진실로 행복하다. 진실로 모든 善으로 향해 가는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진리뿐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그것을 깨닫고 나면,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혹은 한꺼번에, 그것들을 자기 스스로 찾아내어 향유하게 된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기쁜 마음으로, 바라 볼 대상을 스스로 골라내어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보라. 그들 중에는, 남다른 열의와 건강, 뛰어난 시력으로, 더욱 큰 기쁨을 가지고 태양을 향해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다.

 

태양은 그러한 시력을 가지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모든 다른 대상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 보여 줄 것이다. 즉, 뛰어난 정신적 시력을 가진 사람이 그 확고한 이성으로 진실되고 불변하는 많은 것들을 알아내고 나면, 당연히 그 사람은 그 진리 쪽으로 돌아서게 되며, 진리는 그에게 모든 실체를 드러내 주게 된다. 그는 그 진리를 향하여, 모든 다른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그 진리 가운데서 그 모든 것들을 향유한다. 그가 어떤 즐거움이든 찾아냈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적 진리에 그것이 얼마나 더 가까이 갔는가에 달린 것이다.

 

촉각, 후각, 미각 등의 감각들은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진리에 근접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이유는 모든 언어는 듣는 사람 전체에게 동시에, 하나의 전체로서 들리고, 각 개인에게도 각각 하나의 전체로서 동시에 들리기 때문이다. 시각의 대상인 사물의 형태도,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똑같은 크기로 보인다. 시각과 청각은 물론, 서로 다른 점도 상당히 있지만 이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정확히 말해서는, 언어도 완전히 똑같은 순간에 하나의 전체로서 말해지지는 못한다. 일정한 시간의 연장 즉, 일부분은 먼저 발음되고 또 일부분은 나중에 발음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가시적 형태 역시, 공간 속에서 어떤 연장을 가지면서 펼쳐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한 지점에 하나의 전체로서 놓여 있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우리로부터 떨어져 나갈 수도 있고, 우리가 그것을 즐기려고 해도, 어떤 장애가 그것을 막을 수 있다.

 

어떤 멋있는 가수가 아무리 영원히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해도,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서로 더 잘 들으려고 경쟁을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공연장이 더 미어지도록 몰려들어서 서로 그 가수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자리다툼을 할 것이다. 설사,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해도 그들은 그의 목소리를 꽉 붙잡아 둘 수는 없으므로, 결국 소리는 모두 찰나적일 뿐이다. 내가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다고 해도, 태양이 서쪽으로 넘어 가버리거나 구름 속에 가려져 버리면, 어쩔 수 없이 태양은 나를 버리고 가고 만다. 그러저러한 장애물들이 태양을 바라보는 내 기쁨을 본의 아니게 놓쳐버리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빛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듣는 기쁨을 하나도 뺏기지 않게 된다고 한들, 그런 기쁨은 동물들도 누릴 수 있는 것들인 바에야, 그런 경험들을 특별히 나에게만 주어지는 이득이라고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와는 달리, 진리와 지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 가까이 감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려는 욕망은 아무리 그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빽빽이 몰려든다고 해도 그 때문에 내가 그로부터 차단 당하는 일은 없다. 그 아름다움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옮겨가 버리는 것도 아니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다고, 그늘에 가린다고, 신체적으로 감각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으며, 진리를 사랑하고 그 쪽으로 향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것은 영원히 있다. 그것은 우주공간 어느 곳에도 자리하고 있지 않으면서, 또한 도처에, 어디에든지 존재한다. 진리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들은 외부로부터 오지만, 그 가르침은 항상 우리 내부에서 생겨난다. 20) * 진리는 그것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을 더 훌륭하게 변화시키지만, 진리를 더 나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평가를 가할 수 없으며, 진리 없이는 그런 훌륭한 판단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의 마음보다 더 우월한 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의 마음이 제각기, 진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힘을 빌어서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현명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진리에 의해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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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신의 도시」, vⅲ, 4-5.

16)* : 플라톤의 많은 여행지에 대한 근거는 확실치 않는 것이 많다. 플라톤 자신이 말한 것으로는, 이태리와 시칠리로 갔던 것을 알 수 있다. A.E. Taylor, [Plato, The Man and His Work], pp.3-9(Methuen, 6th ed,, 1949 참조).

17): 「신의 도시」, ⅷ, 6.

18): 「자유의지」, ⅱ, 33-34.

19): 「자유의지」, ⅱ, 36-38.

20)*: 이것은 라틴어로 간명하게, “[Veritas] foris admonet, intus docet”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