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的 理解의 秀越性
12) 이제, 우리의 理性이 얼마만큼, 찰나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아름다운 하늘, 질서정연한 별자리, 그 밝은 빛, 밤과 낮의 교차, 달의 운행, 사계절의 변화, 사계절의 똑같은 달 수, 그 모양과 수를 어김없이 반복하고 있는 씨앗들 속에 숨어있는 놀라운 잠재력....우리는 이런 것들을 그냥 무심히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은 저마다의 한계와 특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깊은 생각 없이 맹목적인 호기심으로만 대해서는 안될 것이다.우리는 영원히 존재하는 불멸의 대상들을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가야 할 것이다. 우선, 맨 먼저 관심을 가지고 보아야 할 것은, 감각을 통해 그 모든 현상들을 지각할 수 있는 생명의 본질이다. 그것은 신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신체보다 우위에 있는 필수조건이다. 생명이 없다면, 어떠한 것도, 제 아무리 가시적인 광채를 가지고 밝게 빛난다고 해도,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생명이 있는 것은 생명이 없는 물체보다 낫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비이성적인 동물도 생명이 있다는 것과 감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 가진 가장 뛰어난 특질은 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감각자료들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보다 더 시력이 좋고, 다른 신체적 감각에 있어서도 더 예민한 동물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마음이 물리적 대상들에 대해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감각적인 기능이 아니라 이성적인 기능이다. 동물은 우리가 가진 가장 뛰어난 바로 이 특질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판단을 하는 인간이 그 판단의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성을 가진 생명은 감각적 자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감각 그 자체에 대해서도 판단을 한다. 예컨대, 이성은 강물 속에 들어있는 노가 실제로는 똑바른 것인데 왜 굽혀져 보이는지를 알 뿐 아니라, 왜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이는가 하는 것도 아는 것이다.
시력은 단지 사실에 대한 보고만 할 수 있을 뿐, 그에 대해 판단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감각적 지각을 하는 생명이 그 신체보다 더 우월한 것처럼, 이성은 그 두 가지보다 더 우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만약 이성이 어떤 다른 것의 도움이 없이 그 자신에 대한 판단을 해 나갈 수 있다고 하면, (물론 이성도 언제나 똑같은 수준의 능력을 보여 주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면 이성도 항상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틀림없지만) 이성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성적인 능력도 숙련될수록, 더 훌륭한 판단을 할 수 있으며, 그 숙련의 정도는 그것이 어떤 技藝(arts)나 학문, 또는 지혜와 얼마만큼 관련되어 있는가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이제 우리는 기예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기예란 경험에 의해서 습득되는 것이라기보다도,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그냥 진흙으로 된 돌맹이보다도 석회와 모래로 이루어진 물질이 굳어겨서 된 돌맹이가 더 단단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떤 좋은 점이 있는가? 건물을 지을 때, 똑같은 어떤 모양을 반복적으로 배치해서 짓는 사람은 어떤 점에서 훌륭한가? 그러지 않고, 어떤 한 가지 모양을 건물의 한 가운데 오도록 배치하는 사람은 어떤가? 이런 것은 감각적인 지식이기는 하지만, 역시 이성과 진리의 문제에 매우 근접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왜 두 개의 창문이 아래위로가 아니고, 옆으로 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을 때에는 그 크기를 같게 할 것이지, 왜 다르게 해놓았느냐고 걱정을 하면서, 반대로, 그것들이 아래위로 배치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두 배로 더 크게 되어 있어도 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가? 우리의 감각은 왜 창문이 두 개밖에 없을 때는 그 크기가 달라도 아무렇지 않다가, 세 개일 때에는 왜 그것들을 다 똑같게 하든지 아니면, 가운데 것을 제일 크게 하든지 제일 작게 하든지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밝혀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의 본성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승인여부를 검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어떤 것을 하나만 놓고 볼 때에는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다가도 그보다 더 나은 것과 대비가 될 때에는, 왜 그것을 거부하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는 기예라는 것은 대체로 말해서, 우리 마음에 들었던 적이 있는 경험에 대한 기억에다가, 신체적인 기술과 활동을 보탠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도 예술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자신이 그것을 만들지는 못해도 평가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것 역시 훌륭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모든 예술을 통틀어서, 볼수록 기분이 좋고 통일감이 있으면서, 아름답게 보이는 것, 우리는 그것을 균형이라고 한다. 균형에는 동일성과 통일성이 있다. 균형은 같은 부분들이 연속적으로 반복되거나, 같지 않은 부분들이 연속적으로 반복되거나, 질서 있게 배열된 것이다.
사실 물리적 대상들 중에서 완전히 동일하거나 꼭 닮은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어떤 물체를 아무리 세밀하게 들여다본다고 해도, 그것이 진정으로 똑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모든 사물은 다 같이,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또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항상 변화하고 움직이는 과정에 있다. 모든 물체는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부분들은 각기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그렇게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 물체들은 구별되기도 한다. 진정한 동일성과 유사성, 근본적인 통일성이라는 것은 신체적인 눈, 혹은 다른 어떤 감각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단지 마음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그것들을 물리적 대상들 속에서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으며, 또한 그렇게 대상들 속에서 발견된 동일성은 완전한 동일성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만들어진”13)* 것이 아니어야 “완전한” 것이라고 하는 말이 옳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마음으로) 아는 것이다.
감각을 통해서 인식되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선 우리는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맥락 속에 들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신체와 신체의 움직임이 그렇다. 그러나 마음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동일성과 통일성이라는 것은 감각적 정보들을 바탕으로 그러한 물리적 대상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판단할 때 그 기준(standard)이 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기준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바퀴가 둥글다는 판단은 할 수 있으면서 항아리가 작다는 것은 판단할 수 없다든가, 항아리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있지만 조그만 동전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물리적 대상들의 시간과 운동에 대해서도, 해(year)라는 것은 다 똑같은 만큼의 시간으로 나뉘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면서, 달(month)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똑같은 시간으로 나뉘어진 것이라는 판단을 할 수 없다든지, 달(months)은 다 똑같은 시간이라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날(days)에 대해서는 그런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동일한 운동이란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든, 단지 몇 시간, 몇 분 동안만 계속되든, 동일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판단되는 것임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작든 크든 간에, 모든 대상들의 모양과 운동이 동일성, 유사성, 또는 균형성 등의 동일한 기준에 의해 판단되고 있다면, 그 기준이라는 것 자체는 그 모든 대상들보다 더 큰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 적용의 범위가 더 크다는 뜻이다. 이 말은 기준이라는 것은 공간과 시간의 관점에서 더 크고 작고 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그것이 그런 관점에서 더 큰 것이라면, 그것으로 작은 물체들을 잴 수가 없게 되고, 반대로, 그것이 더 작은 것이라면, 그것으로 큰 것들을 잴 수가 없다. 우리는 네모라는 절대기준을 가지고 네모난 시장, 네모난 돌맹이, 네모난 책상, 보석 등을 다 잴 수가 있다. 그리고 동일성이라는 기준으로, 기어가는 개미의 발이나 걸어가고 있는 코끼리의 다리의 움직임의 상동성(균형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준이 적용되는 범위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큰 것이 사실이지만, 기준 그 자체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말할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처럼, 기준이라는 것은 모든 기예를 다 지배하는 것이며, 완전히 불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기준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면서도,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면서 실수를 거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 그 자체는 우리의 마음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며,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합리적인 영혼보다 위에 있는, 그 불변하는 본질이라는 것이 바로 神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원천적인 지혜가 있는 그 곳에, 원천적인 생명과 본질이 들어 있다. 신 안에 불변하는 진리, 우리가 곧, 法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모든 기예를 지배하는 法일 뿐 아니라, 만능의 창조주 자신의 기예인 것이다. 영혼은 물질적 대상들의 외양이나 움직임을 대상들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원만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한 편으로, 영혼 자신의 본성이 그 판단 대상들보다는 우월하다는 것을 동시에 알게 된다. 영혼은 또한, 영혼이 판단할 때 그 기준이 되어 줄 뿐 그 자체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는, 그 (불변하는) 본성들이야말로, 영혼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절대적 동일성이라는 것을 나의 신체적인 눈으로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본다. 그래서, 나는 우리 몸의 양쪽에 붙어있는 사지들이 왜 서로 똑같아야 하는가 라는 그런 말도 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그 본성의 한계 내에서 내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에 더 가까울수록, 더 훌륭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린다. 마음속에 있는 그것들이 왜 그렇게 되어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더구나, 그것들이 마치 다르게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듯이,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14) 사람들은 순전히 인간적인 쾌락 그 자체에 목표를 두고 있는 한, 가시적 대상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쾌락을 가져다주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는, 가시적인 대상 보다 더 높은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만일, 어떤 석공이 아치를 한 개 만들고 난 후에 그와 똑같은 다른 아치를 한 개 더 만들어서 마주 보게 세우고 있을 때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를 그에게 물어 본다면, 아마도 그는 건물의 똑같은 부분은 서로 대응하는 위치에 두어야 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어째서 그런가를 다시 묻는다면, 그는 그래야 그것이 더 보기가 좋고 아름다우며, 보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진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는 그 이상 더 말하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말 것이다. 그는 문제의 포인트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내면의 눈을 가진 사람 즉, 신체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것을 묻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끝까지 밀어 부쳐서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말하게 하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인간적인 쾌락에 대한 어떤 판단을 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고 있을 때 그는 감각적인 쾌락의 수준을 넘어 그 족쇄를 벗어 던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판단은 쾌락에 관한 것이지만, 결코 그 쾌락을 판단의 준거로 삼고 있지 않다. 나는 우선, 물리적 대상들이 쾌락을 가져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답기 때문에 쾌락을 가져오는 것인지를 물을 것이다. 그 질문에는 틀림없이, 물체는 아름답기 때문에 쾌락을 주는 것이라는 대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아름다운가를 물을 것이다. 그가 잘 알아듣지 못하면, 나는 그 물체는 그 부분들이 서로 유사하고 조화가 잘 이루어진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가 라고 물을 것이다.
그가 이것에 동의하면, 나는 물체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하면 그 통일성을 완전하게 이를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게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왜곡시키게 되는지를 물어 볼 것이다. 물론 주의 깊게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어떤 물리적 형체나 대상이든지, 조금씩은 다 통일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아름다운 물체라 할지라도, 그 부분들은 다 각각의 작은 공간들로 다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결국 그 부분들 자체로는 통일성을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을 수 있다. 만약 이런 점이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당신은 어디에서 그런 통일성을 볼 수 있느냐, 흑은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런 통일성을 보지 못한다면, 그는 도대체, 물리적인 형체들이 무엇을 모방하려고 하는지, 무엇을 아직 이루지 못하고 있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를 물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 물리적 대상들에게 “네게서 어떤 통일성도 찾아볼 수 없으니, 너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야. 마찬가지 논리로, ”네가 바로 그 통일성 자체라고 한다면, 너는 물리적 대상도 아닌 거야.”라고 말하겠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이 대상들에 대해 그렇다고 판단하고 있는 그 통일성에 대한 지식을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얻었는가? 당신이 통일성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 대상들에 대해 그것이 있다, 없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없다. 그런데, 당신이 그것을 당신 신체의 눈으로 본다고 하면, 당신은 물체들이 통일성의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히 그렇지는 못하다는 그런 말을 실제로 할 수가 없다. 신체의 눈으로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물리적 대상들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통일성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어디서 보는가? 만약, 그것을 여기 우리의 몸이 있는 이 곳에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저 어떤 동방의 나라에서, 물리적 대상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보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통일성이라는 원리는 어떤 공간 속에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판단을 내리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디서든지 다 보이는 것이다. 공간상으로는 아무 곳에도 없으면서, 그 힘은 도처에 다 존재하는 그런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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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진정한 종교」, 52-57.
13* :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에서 “완전한” 것이란 정신적인 것, 비물질적인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들이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는 “완전하게 만들어진” 것(per-factus)이다. 그는 “완전한”(perfactus)이라는 말을 "만들어진(factus) 것이 아닌"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4): 「진정한 종교」, 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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