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피곤해선지 초저녁부터 잠이 들어 밤새도록 뒤죽박죽 꿈을 꾸었다.
맑은 계곡물을 건너 가는데, 물 속에 수 천년 전의 것이라는 샘의 흔적이 보인다. 손을 넣어 어릴 적 아버지가 사다 주신 붉고 초록빛 날개를 가진 장난감 새 한 마리를 건진다. 바위 위에 올려 놓는데 친구가 입에 쏘옥 넣었다 뺐다 한다. 다른 친구도 따라 한다.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다. 툇마루에 빠알갛게 빛나는 고춧가루 한 자루가 있다. 여고 교실 안에서 아이들은 시험을 보고 있는데 나는 복도에서 온갖 그릇들을 늘어 놓고 앉아서 김장 양념을 한 다라이 버무리고 있다. 며느리에게도 좀 보내 줄까 생각한다. 수위 아저씨한테 혼날까 조마조마하다. 두어 친구들이 나와서 도와 준다. 난 아직 교실에 들어 가지도 않앗는데 저네들은 답안을 다 섯다 한다.
갓 결혼한 수련의로 한창 바쁠 여조카가 발가벗은 뒷모습을 보이며 앉는다. 엉뎅이를 살래살래 흔드는 모습이 르노와르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 옆에는 작은 사내아이 하나가 있다. 잔치 분위기...시가 식구도 친정식구도 다 둘러 앉아 감탄하며 본다. 돌아가신 엄마도 내 옆에 뵤인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고 있다. 다음 과는 부동산 정책이란다. 이런 공부도 해보면 재미있을까? 아니, 내가 이런 걸 외울 수가 있기나 한가/ 남편은 한 쪽 구석에서 철학 책을 읽으며 기다려 준다. 옆방은 무슨 자연과학 연구실 서가의 책들 앞에 빵들이 놓여 있다. 빵 한 봉지를 다 나누어 먹고서야 내일 아침 그걸 알게 될 빵 주인에게 미안해진다.
나뭇꾼이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에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삶은 핫독 한 개, 삶은 계란 한 개, 구운 빵에 쨈 바른 빵 한 쪽, 꿀 넣고 갈은 도마도 쥬스 한 컵, 커피.... 영 잘 어울리지도 않는것들인데 웬일로 다 먹는다. 이것 저것 챙기려면 챙길 수도 있는데 오늘은 이런 어수선한 마음으로 도시락을 쌀 수가 없을 것 같다. 커피를 들고 햇살이 비쳐 들기 시작하는 뒷베란다 창가로 간다. 새들이 바로 앞에서 재재거린다. 산봉우리가 또렸하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어제 김치 담으려다 만 소금통이 그냥 나와 있다. 창 아래 장 안에 들여 놓으려니 너무 무겁다. 장 아랫쪽에 놓으려니 그 안쪽에 스텐 수저가 잔뜩 든 상자가 있다. 이젠 많은 손님 을 한꺼번에 집에서 치를 일이 없을 듯해서 그릇들은 대충 업앴는데 수저만 어쩡쩡하게 남은 것이다. 내친 김에, 매일 쓰는 수저통에 같은 것으로만 바꾸어 넣고 나머지는 망서리다가 또 다른 장에 넣어 둔다. 나중에 또 언제 치우려고?
어머니가 돌아 가시기 일년 전쯤부터 부쩍 더 자주 장과 서랍들을 정리하곤 하셧다. 얘, 이거 너 입겟니? 예, 입을 게요, 고마워요...무조건 받아 두었다가 내가 쓰기도 하고 넣어 두기도 하고...언젠가는 다시 달라시기도 하고 마지막에 정신이 혼미해지신 후부터는 내가 몰래 훔쳐 간 것으로 생각하시기도 한다. 어머니는 워낙 멋쟁이이셔서 돌 아 가시고 나서 보니 어머니의 물건들은 모두 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아직 너무도 많앗다. 딸 셋을 불러 좋은 것은 다 가져 가게 하고 많이 버렸는데도 어머니 돌아가신지 7년째인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옷과 소지품들을 다 버리지 못하고 쓰고 있는 것이 많다...
나도 정리할 것들이 너무 많다. 갈수록 어머니가 왜 그렇게 정리하시던가를 알겠다. 백수가 몸살한다더니, 즘 이것 저것 배우러 다닌답시고, 일상이 너무 어수선하다. 서랍들 중에서도 속옷서랍을 닫을 때마다 아무리 바빠도 손이 한 번 더 가는 것은 내가 이대로 나가서 혹시 무슨 일을 당하면 누군가가 이걸 치울 때 어떻게 생각할까가 걱정되는 것이다. 그건 오래 전부터 그랫다.사는 것이 갈수록 좋게 말해서 자유롭고 나쁘게 말해서 무게획이고 되는대로이니 내가 이렇게 살다가 더 이상 추스릴 수도 없게 구제불능이 되는 것 아닐까 은근히 걱정되기도 한다. 오늘도 나갈 일이 잇던 것을 취소하고 자중하며 밀린 다림질이나 하려 하는 마음이지만 또 모르겟다. 오후가 되면 무슨 일이 어떻게 될 지. 나뭇꾼이 점심을 먹으러 들어 올 것인지 물어 보지도 않앗다. 그도 오게 되면 오고 말게 되면 말 것이다...그저 저 꿈을 깨듯이 아무 거나 아무 때나, 그야말로, '하게 되면 하고 말게 되면 마는' 것이 아닐까...그런 말을 제일 싫어햇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