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석거리는 골조만 남은 지친 머리를 차창에 기대었다.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가로등들이 휘날리는 머리카락 밑을 지나가더니 그 골조마저 통째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창밖으로 빨려나가서 머리 속이 마침내 뻥 뚫려버리고 말았다. 뚫린 구멍 사이로 아득한 수평선 위로 솟은 크레인이 보이고, 빠져 달아났던 내 골조가 이제는 엿가락처럼 흐물흐물 늘어진 채로 그 꼭대기에 걸려 나를 아련히 바라보면서 아직도, 해안선을 따라 돋아나고 잇는 소금버캐라도 긁어 올려 보려는 듯, 발끝을 애처로이 날름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럴 것도 없을 것을. 온 하늘에 쏟아져 누운 붉은 노을이 수평선 아래로 어울너울 흘러 내려가면서 부글부글 녹아내린 소금 버캐에서 증류된 이슬방울들이 내 마른 이마 위로 벌써 도르르 도르르 굴러 내리고 있었던 것을. 아, 나는 언제까지 내 해안을 저렇게 긁어내며 집어 던졌다가는 또 다시 끌어 올리는 끝도 없는 크레인의 노작을 계속하려고 했을까?
이제는 더 이상 아니야.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없이 다 비우고 돌아가고 있는 걸. 야망도 미련도 원망도 기다림도 의심마저도....그냥, 존재할 뿐이야. 내가 내 안에서 ..세상으로부터 아무 것도 더 긁어오려고, 또는 퍼다 나르려고, 더 이상 애를 태우거나 머뭇거릴 것도 없어. 나는 이제 나 자신이면 충분해..옆에서 아파트값 내릴 걱정을 하는 사람, 다른 찜질방과 그 곳을 비교하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들의 그런 모습도, 그렇군요, 맞장구도 쳐 가며 그 속에서 있는 내 모습도, 그냥 좋았다, 벌거벗은 몸뚱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상체를 숙이고 엉뎅이를 높이 든 어느 여인의 모습은 핸리 무어의 어느 조각작품 같기도 했다. 나도 저런 포즈로 명상을 해 볼까? 맑은 기운이 내 안에 가득 차올랐다. 이럴 것을, 진작에 이럴 것을...
벌써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길바닥이 울퉁불퉁, 내 발결음을 불안하게 하였고, 나는 그냥 기억으로부터 오는 길바닥에 대한 믿음 하나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도는 발밑에서 폭신하기까지 했다. 버캐 묻은 크레인이 부스스 그 높은 깃을 세우며 다시 철커덕 철커덕 따라올 것 같은, 속이 다 삭아 녹아내리던 그 골조가 다시 내 해안에 석출되었다가 부서져내려 앙금처럼 여기 저기 들어붙을 것 같은, 그런 염려는 이제 더 이상 없어 보였다. 적어도 지금은... 세상은 믿을 만했다. 내가 길 위에 돌출된 무엇엔가 걸려 넘어진다 해도, 나는 아무 것도 탓하지 않으리라. 나 자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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