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거꾸로 가는 말(馬)도 있다 - 1

해선녀 2006. 3. 5. 11:17

 

 

우리가 처음으로 시부모님을 모신 것은 이십 여년 전이었다. 그 때,어머님은 자식들의 권유로 지방의 중등학교 교감을 명예퇴직하신 후, 두 분만 강남의 개나리 아파트에 두어 해째 살고 계셨다.  60년대, 교원노조 사건으로 10년을 옥살이 하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다섯 자식들을 혼자서 키우시며 옥바라지하셨던 어머니.  어머니는 또 다시 집에서 게속되는 아버님 '시집살이'에 한창 힘겨워 하시던  때였다. 어머니는 우리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내내, 연애편지를 쓰시듯 내게 거의 일주일에 한 통씩의 편지를 보내셨는데, 한많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회한과 고통을 많이 호소하셨다. 애초에, 소녀 같은 어머니의 낭만과 아버님의 이념적 지성이 도무지 서로 맞지 않아서였을까, 두 분의 사이가 늘 편치 못했다.

 

 어머니는 그 옛날, 동경유학을 하셨던 부잣집 맏딸이셨지만, 맨손으로 피난 내려와서 겨우 교직생활 끝에 집을 장만했을 즈음 아버님이 그렇게 되시면서 그 집마저 변호사비로 다 날리고 고생 고생 끝에 아이들 키워내고 퇴직 후의 여유있는 시간을 겨우 좀 가지실까 하셨던 것인데 꼼작 못하게 또 아버님 시중에 발묶이셧으니,그게 지금 내 나이를 조금 더 된 때였다. 나는 그 때, 공부에 집안일에 생활비 버는 일까지, 정신없는 생활에 어머님께 답장 쓰는 일이 큰 숙제처럼 부담도 되었으나 한국으로 돌아 가면  어떤 식으로든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 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되어 갔다. 어머니는 특히 아버님의 식사시중을 어려워 하셨는데, (가사 선생님이셨지만 어머니는 집에서 요리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나는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대로 가는 것은 두 분 모두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형님에게 의논을 드렸으나, 형님은 '현명하게도' 자신의 '작은 그릇'으로는 두 분을 감당할 수가 없고 파출부를 내내 댈 수도 없으니 마음대로 하라신다. 나는 결혼 후 거의 십년 동안 형님 혼자서 집안 대소사를 다 맡아 치르시도록 우리는 공부한답시고 자식노릇 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우리가 부모를 모시겠다고 했다. 나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때, 중학교 교사 5년 만에 집을 장만해 놓고 갔는데, 우리는 융자를 얻어 세를 내보내고 그 집으로 들어 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이사 전날, 어머님은 부엌에 달린 조그만 방에 아버님의 침대와 티비를 마련해서 넣어 드리고 밤에만 거기서 주무시게 하자고 하신다.

 

난감했다. 거기는 큰아이의 공부방으로 쓰고 건넌방 두 개 중 하나는 남편의 서재로, 다른 하나는 우리들이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공부가 직업인 남편인지라, 나는 신혼시절부터 서재 없으면 안되는 줄 알았다. 아버님은 아들네가 안방을 내어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셨고, 결국 두 분이 안방에서 함께 지내시게 되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각방을 쓰시던 어머니로서는 얼마나 숨통이 막히셨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 때, 어머니의 그런 심정까지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두 분을 모시는 것부터 반대하였지만, 나는 이왕 모시려면, 그럴수록 더욱 한 방에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걱정이 있다면  그저, 혹시 두 분이 아이들 앞에서 불화하는 모습을 보이실까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불화를 보이는 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화목한 집안 분위기 만들기에 전보다 더 신경을 썼다. 두 분께 절대로 경제적인 도움을 비롯해서 아무런 생활의 부담도 드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저 오손도손 잘 지내주시는 것, 그것 하나만 바랬다. 내 딴에는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나들이나 여행도 일부러 자주 가고, 그 때마다 꼭곡 두 분을 모시고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두 분도 점점 행복해 하시는 듯,안방에서 웃음소리가 나고 마음이 놓여가던 즈음, 어느 날 갑자기 두 분은 심하게 다투시더니 기어이 어머니가 작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우리 옆방, 서재로 화장대를 옮기시고 주무시기 시작하시는 게 아닌가. 아버님은 저녁마다 건너 오셔서 몇 번 달래시더니, 결국 포기하셨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직 그런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크지 않았다. 남편은 숨소리도 크게 못내게 되었다며 화를 낸다...

 

joanne님의 클칸에 가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여유와 간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다.(http://blog.daum.net/joannelim'나성 이야기'의 '사람과 사람 사이 2006. 02..)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고 나도 공감하였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서로 좀  떨어져서 바라 볼 수 있고, 숨쉴 수 있있는 '틈', 때로는 서로를 잠시 잊고 지낼 수도 있는 그런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로 너무 오래 붙어 있으면 숨이 막히지 않겠는가?   joanne님은 칼릴 지브란이 ''예언자'에서 부부 사이에도 산들바람이 불게 하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산들바람이 불어들 틈과 여유가 있어야지,...

 

지금이라면, 나는 어머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칼릴 지브란을 빌지 않아도, 우선 나부터, 남편의 세 끼 식사시중을 며칠만 계속하고 나면 지쳐 버리는 것이다. 나라도, 남편 은퇴 후 내내 그렇게 살아야 할 때가 된다면 식사를 아주 간소화하든지 무슨 수라도 내고 싶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나는 지금이라면 방 문제는, 어쩌면, 큰아이를 서재에서 공부하고 거기서 자게 하고라도,  아버님이  그 부엌방에서 잠만 주무시면 어떻겠느냐고 권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아버님은 내가 아침에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마루와 마당을 쓸고 안방청소까지 하시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무리 잠만 주무신다고 해도 그렇지, 아버님이 부엌방을 쓰시다니..그러다 보면 점점 그 방이 아버님 방으로 굳어지고 아버님 체신이 말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어머님이 그 방에 가시라고는 더욱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서재를 없애고 딱 붙은 두 건넌방을 두 분이 쓰시게 했다면 모를까...

 

아무튼, 단간방에라도 시부모를 모실 수 있다고 호기있게 나갔던 내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 후, 결국 그 문제 때문에 터져 나온 사건 하나로,일년 반 반에, 두 분은 아파트로 돌아가셨고 곧 이어 아버님이 전립선 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모든 사회활동을 접으시고 늘 책만 보시면서  감옥에서 손대셨던 번역(프랑스 문학사)일에 몰두하셨으므로 하루종일 안방 차지셨다. 늘 내가 해드리는대로 다 고마워 하셨고, 식사도 남김없이 다 잘 드시고 무엇이라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시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아버님은 너무 완고하셔서 나도 힘들었으니, 감성이 풍부하고 예민하신 어머니가 24시간 함께 계시는 것은 정말 숨이 막히셨던 것이다...어머니는 거의 매일 외출하셨다.'아무리 우리가 잘 모신다고 해도, 어머니 계시는 공간이 편치 않으셨으니 말해 무엇하리...그러나 어머니는 정면으로 그런 말씀을 다시 꺼내시지는 않으셨고,어찌 어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셨던 것 같다. 우리 형편이 그렇지 못하다는 걸 너무 잘 아셨으니까...

 

그러나, 그 내놓고 말하지 못하신 그 생각, 그 집념이 어느 날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터져 나와서 결국 갑작스럽게 우리의 동거는 끝이 났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어른을 모신다는, 그것도 안방에 함께 모신다는 미명 하에 어머니를 그렇게 터져 나오지 않으면 안되도폭 밀어 부쳤던 것이다. 결혼 십년 동안,공부보다도 생활비를 버는 일에 더 주력하엿다가 이제 남편이 제법 벌어 오기 시작했으니, 나도 좀 마음의 여유를 가져도 되었으련만, 이 답답한 성격이, 나는 여전히, 친구들 만나러 나가거나 영화 한 편 보러 가는 것 같은 데는 관심도 없었고, 집과 시간강사 강의 나가는 학교 사이에만 뱅뱅 돌았다. 어쩌다 상품권이 생겨도 그냥 어머니에게  드리고는 백화점 같은 곳엔 주로, 어머니 혼자 다녀 오시기를 바랐다. 나는 한 번 나가면 하루종일, 그러고도 또 바꾸러 다니시는 어머니와 늘 동행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머니는 '분위기 있는 곳'들을 무척 좋아하시고 내가 어머니의 헌 옷을 받아 입어도 '프랑스제냐?'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멋쟁이셨다. 그림 그리기도 좋아하셔서 문화교실 수강증을 끊어 드렸는데,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누드 그림은 차마 못그리시겠다시며 그만 두셨다. 늘 레이스 뜨게질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손자들 입성이며 내 조끼도 짜 주셨고 수예작품들이 아주 많았다. 아버님이 돌아 가신 후, 어머니는 과천으로 옮겨서 혼자 오래 사셨는데, 경로당에 아파트 아이들을 모아서 한문도 오랫동안 가르치셔서 과천시장 표창장도 여러 번 타셨다. 

 

그러나, 나중에 더 연로하신 후에 내가 다시 모셨을 때는 어머니도 혼자만의 공간보다도 '사람 숨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함게 사는 공간을 그리워 하실 때이셨다.  처음 모셨을 때 너무 어머니를 집안일로부터 소외시킨 것이 아닌가 하여 이번에는 어머니에게 마늘도 같이 까자고 하고 나물도 같이 다듬자고 하려 했으나. 지저분한 것들을 안방으로 들고 가기도 그렇고 주방이나 거실로 나오시라고 하기도 그렇고...여의치 않았다.  더욱 조심스러운 어머니의 벽...혼자만의 공간 속에서 그리움에 너무 오래 잦아드셨을까? 여든 두 살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나보다 더 높은 구두를 신으시고 긴치마에 한들한들 걸으시는 모습이 늘 보라색 들꽃 같으시던 으셨던 어머니, 손잡고 숲길을 걸으면서 '솔베이지 송'과 '오 대니 보이'를 함께 부르면 눈물로 목이 메이시던 어머니, 이젠 이 집이 천국 같다시며 하찮은 음식도 그리 좋아하시며 드시던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는 곧 폐결핵에 걸렸고 다 나으신 후엔,너머셔서 조금 다치셧는데, 그 후로 점점 더 불면증과 불안증과 악몽에 시달리시며 입퇴원을 거듭하신지 9개월 만에 돌아가셧다. 그것도 다시 모신지 꼭 일년 반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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