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밖에서부터 벌써, 이상한 느낌이 드네요. 주인이 어
디 갔을까? 문을 흔들어 봅니다. 아, 누가 있어요 뒤꼍을
돌아 나오고 있는 저 얼굴, 아니, 저 얼굴은? 많이 본 듯
도 하고 낯선 듯도 합니다.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예. 손님이시군요. 여기 자주 오셨지요? 저도 여기 단골
이지요. 금방 돌아오실까요? 모르신다고요? 노을 속으로
떠나셨다더라구요? 어쩌면 영 안돌아올 지도...?하하. 그
래요. 아마. 저 노을 속에 날아 오른 그 많은 우연의 깃털
들을 주워서 베낭에 넣어 가지고 돌아 올 걸요. 크고 작
고, 반짝이고 부스스한, 온갖 깃털들을 들여다 보며 깃털
의 주인이 무슨 새였던가, 어떻게 살다 갔을까, 돌아와서
는 다시 연구에 몰두할 거예요.
전에도 종종 그랬답니다. 노을이 저렇게 붉을 때면, 자신
도 모르게 깃털이 되어 구름 속으로 훅 날아올랐다가는,
그렇게 다시, 노을이 붉을 때면 돌아오시곤 했지요. 노을
병이라고 한 번은 그러시더라구요. 하하.저도 매번, 이번
에는 안돌아오실 지도 모른다. 불안한 생각도 들었답니
다.
아, 샘물이나 한 그릇 마십시다. 저것 보세요. 샘 안에 수박 한 덩이가 두례박에 담겨 있군요. 하하, 우리들 누군
가가 오면 건져 먹으라고... 어어, 시원하다. 샘물 맛은
여기 것이 일품이지요. 저는 돌아갈 때마다 한 통씩 담아
가지고 간답니다. 오늘은 이 수박이나 먹으면서 우리 이
야기나 나누어요. 저녁식사는 뭐, 수제비로 하지요. 오늘
은 제가 끓일 게요.
전에도 종종 그랬던 걸요. 손님께서는 저 텃밭에서 호박
과 고추를 좀 따 오시겠어요? 손님께서도 여기를 무척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주 뵈었어요.
님, 우리가 여기서 만나게 된 건 우연일까요? 님도 어디
서 이 여인숙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신 거예요? 저는 어
느 바람 부는 날, 하얗고 반짝이는 깃털 하나가 제 창문
턱에 와 앉았지 뭐예요. 그 깃털에 써져 있는 주소는 뭐
라고 말할까, 좀은 야릇하기도 하였지요 처음엔, 하하.
그래도, 저는 그 주소지가 궁금해졌어요. 제가 좋아하는
'노을'이라는 글짜 때문이었지요. 님도 그러셨다구요?
아하, 노을이라는 것이 우리를 여기로 오게 한 이유였군
요. 손님은 아직 저보다 한참 젊으신데, 어찌 노을을? 아,
예. 노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구요? 하긴 그렇
지요. 우린 알고 보면 모두, 노을 속에서 태어나서 노을
에서 살다가 노을 속으로 돌아가는 존재들인지도 모르지
요. 노을은 언제나 아름답거든요. 대지와 하늘 사이의 웅
장한 협주곡 같은 불타는 노을이든, 그 둘 사이의 농밀하
던 대화를 이제는 지긋이 바라보며 음미하는 은근한 노
을이든, 노을은 어느 때나 아름답습니다. 그렇지요?
그래도, 그렇지. '노을'이라는 말이 너무 쓸쓸하다거나.
센치멘탈하다거나, 심지어 너무 유치하다는 생각으로,
그 깃털편지를 그냥 휙 던져버리고 만 사람들도 많았을
테지요. 어찌어찌 해서 이 여인숙을 찾아 들었다가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여기에 묵을 생각은 커녕, 제대로 주
인을 만나보지도 않고 서둘러 떠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지요.
님이나, 저나, 우린 다 알고 보면 이런 저런 양상으로 노
을병이 든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하필이면 저 아프
리카 오지의 주소를 보고도 굳이 그 곳으로 찾아가는 사
람들만 오지병이 든 사람들이 아니라구요. 그런 곳을 찾
아 그 사람들과 평생을 지낸 시바이쪄 박사만큼이나 그
런 병이 심하게 든 건 아니라도, 아프리카라는 주소만 보
고, 어떤 정도로든 그냥 지나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아
프리카병이 든 환자들이지요.환자들이라고 하니, 좀 그
렇기는 하네요. 노을병이라니. 노을은 아름다운 것이라
면서 무슨 병인가... 하하,
저의 이 말에 오히려 님께서 열을 올리시네요. 예. 세상
의 모든 매니아들이 다 환자들이란 말씀이... 예. 님도 그
럼 무슨 환자이신지요? 아, 음악병 환자요? 저요? 저는,
에구, 저는 무슨 병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없는, 아주 복
잡한 병이랍니다. 의사 말, 합병증이 많아서 원래의 병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조차 알 수 없답니다.
그래도 저는 노을병 환자라고 해 둡시다. 저는 그 이름이
제일 좋거든요. 이 병이야말로, 끝까지 그냥 앓고 싶은
병이지요. 하하.예. 님 수제비가 아주 구수한 냄새를 풍
기네요. 너무 퍼지기 전에, 우리 어서 이걸 먹읍시다. 아
이구, 양이 아주 많네요. 지금 누구, 다른 손님이 오시면
함께 들고 싶구만. 우리. 많이 들고, 저 수박도 건져 먹고
있어요. 혹시 알아요. 갑자기 떠난 주인님까지도 이 수제
비 맛이 그리워 금방 다시 돌아오실 지...
아이. 그러지 말고, 저 노을 스러져 무색 무감한 깊은 구
름 속에 푹 파묻혀한 동안 지내시다가 슬슬, 이승으로 돌
아오는 제비의 깃털 하나 꽂고 돌아 오셔도 될 텐데. 주
워 모았던 다른 깃털들마저, 아, '이 세상엔 우연이란 없
다'하면서, 다 저 구름 속에 날려 버리고 혼자서 돌아오
셔도 될 텐데...아니. 정말, 아프리카로라도 가신 게 아닐
까? 저 쪽 방에 시바이쩌와 아프리카 어쩌구 하는 책이
있는 것을 저도 보았거든요. 아이구, 우리. 어서 저 평상
으로 나갑시다. 저 수제비 퍼담을게요. 님은 상을
차리시지요...
03/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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