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폐허에 비

해선녀 2004. 1. 30. 10:56
 
포크레인이 덮쳤을 때 할머니는 거품을 물고 큰방에 드러누우셨다. 
기어이 장정들이 할머니를 들고 나갔을 때 아이는 울며 따라 갔다. 
옆집에 살던 갈래머리 순이는 아침나절 벌써 떠나버린 게 틀림없다. 
아이는 오늘 철거반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순이에게 갈 
곳을 물었었다. 순이는 모른다고만 했었는데, 아침까지도, 큰 눈만 
꿈벅거리면서 아이네 집 마당에도 들락거리고 있었는데, 이 난리 
통에도 그 집 식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가 실려간 곳은 동사무소 아래 노인정이었다. 내동댕이치다시피
할머니를 내려 놓은 장정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현장으로 
내뺐다. 집나간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일 없기를 바랐었는데, 
엊저녁에도 술이 곤드레가 된 아빠는 절대 걱정마라고 소리 소리 
지르면서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지금까지 어느 집에서 자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고물 가구 몇 개가 나동그라져 있는 공동변소 옆에서
 순이가   며칠 전에 헐렸던 슈퍼집 안마당에 누워 있는 아빠를 어제 
밤에 보았다고 말해 주었지만, 아이가 갔을 때는 소주병 두 개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기절하다시피 울던 할머니가 아이의 어깨를 잡고 집마당으로 다시
들어섰을 때는 이미 집이 반쯤 넘어간 상태였다. 안에 있던 이불과 
냄비, 아직 한 번도 들고 다니지도 못한 큰아빠가 사다주신 아이의 
책가방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마당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정들은 
고집 부려 보았자, 비만 더 맞을 것이니, 짐들을 용달차에 실어줄 
빨리 치우기나 하라고 소리질렀다. 이 집 양반은 어디로 갔느냐고 
용달차 아저씨는 꿍얼대면서 선심이나 쓰는 듯 이불보따리부터 들고 
나갔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리둥절한 아이의 마음은 아랑곳 않고 용달차는
할머니와 아이를 운전석 옆에 한데 꾸겨 넣었다. 할머니는 이제 체념
한 듯 말했다. 우리 아들, 느리 오거든 꼭 빨리 찾으러 오라고 해 
줘요. 걱정 말고 떠나시라고 소리지르는 사람은 바로 만화방 주인
이었던 아빠 친구 이씨였다. 그 집도 이번 주 안으로 허물 것이라고 
했는데. 저 사람은 재개발 조합 사무실 앞에서 저번에 아빠한테 
멱살을 잡히고 주먹으로 맞아 눈두덩이 시퍼랬던 건데, 언제부터 
저렇게 멀쩡해졌지? 


차가 움직이면서부터 아무 말이 없어지신 할머니는 차가 가파른
골목을 내려 가면서 아이가 앞으로 쏠려 떨어질까봐 두 팔로 힘주어 
끌어안고 있었다.  큰 눈만 둥그렇게 뜨고 아이는 할머니 눈치만 
보았다. 동사무소 옆에 무료급식으로 점심밥을 얻으러 오던 조그만 
건물이 있었다. 차가 그 앞에 섰을 때, 아이가 먼저 내리고 할머니도 
따라 내리시더니 언제 그렇게 힘이 생기셨는지 재빠른 걸음으로 
급식소 문안으로 들어 가신다. 아이네 집 작은 방 만한 방이 하나 
달려 있고, 입식 주방에는 싱크대와 냉장고, 가스레인지까지 갖춰진 
이 건물은 외관부터 아이네 집보다 훨씬 멋이 있었다. 싱크대엔 수도
꼭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할머니는 금방 새로 이사온 집을 둘러 본 사람처럼, 아이를 손짓해서
들어오게 하시더니 아이의 젖은 옷부터 벗기신다. 안심의 눈빛이 
역력하다. 운전수 아저씨는 눈 깜박할 사이에 짐을 주방 안에 잔뜩 
쌓아 놓고 가버리고 할머니는 아이 윗도리부터 하나 찾아내 입히고 
짐을 챙기기 시작하셨다. 그래도 그 이씨 아저씨가 우리를 여기에 
머물 수 있게 힘을 써 주었단다. 아이는 하릴없이 주방의 싱크대 
물을 틀어보고 냉장고 문도 열어 보고 그러다가 동사무소 뒷마당으로 
통하는 급식소 주방 뒷문으로 빠져 나갔다. 


아, 이 문은 우리만 쓸 수 있는 문이 아닌가! 아이는 동사무소 건물
뒷편에 있는 작은 문을 보았다. 긴장이 되었지만 손잡이를 돌렸다. 
종이박스들이 쌓여 있는 꺽어진 통로가 보였다. 그 사이로 들어가니 
또 사잇문이 있다. 아, 이 문은? 아이는 입술이 말라 왔지만, 그 
문을 또 손대고 말았다. 거기는 두 개나 되는 깨끗한 화장실이었다. 
그 문은 바로 아이가 동사무소에 따라 와서 화장실을 갔을 때마다 
손잡이를 돌려 보곤 했던 그 문인데, 늘 잠겨 있어서 그 안이 궁금
해했던 그 문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제 짐작대로 맞았다는 것이 
기뻤다. 이젠 동사무소 뒷마당에서 동사무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 된 것이다.  


아이는 동사무소 안으로 쪼르르 들어 가서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맞았다. 후덥지근하던 장마의 습기가 거기서는 다 걷어내어지고 시원한 
정수기 물과 푹신한 소파까지, 아이가 할머니 따라 늘 오고 싶었던 
이유들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얼굴이 하얗고 동그란 눈이 예쁜 
언니도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아이는 이제 이 곳이 자기들이 사는 
집에서 가게도 운영하는 슈퍼집처럼, 이제 우리 집 같이 정답게 
생각되었다. 여기 오신 손님들이 다 우리 집에 오신 거란 말이야. 
여기 직원들은 다 우리 식구가 아닌가. 그 생각을 하면서, 아이는 
넓은 동사부소 안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그래, 저기 저 아저씨는 
외삼촌 같고, 저 누나는 큰집 큰 누나, 저 등굽은 아저씨는 바로 
우리 큰아버지...


그 때 동사무소 문이 살그머니 열리면서 할머니가 두리번거리면서
들어 오셨다. 할머니는 사무실 사람들이 들을까봐 목소리를 낮추며 
아이를 불렀다. 너, 여기 왜 들어 왔어, 응? 이놈의 자식아, 에구.
..할머니는 동사무소 앞문으로 아이를 끌고 나와 골목 밖에 나가서야 
큰 목소리로 야단을 치셨다. 눈이 휘둥그래진 아이의 손을 잡아 
끌면서 할머니는 말했다. 이 눔아, 눈치도 없이, 니가 거기 자꾸 
들락거리면, 동사무소에서 싫어한단 말이야. 당장 쫓겨나고 싶어서 
그래?


할머니가 겨우 라면 한 개를 물을 많이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려 놓으
셨다. 가스레인지. 그건 정말 신기했다. 한꺼번에 냄비를 세 개나 
올려 놓을 수 있는, 석유냄새 같은 것도 내지 않고 탁, 소리만 나면 
불꽃이 새파랗게 올라온다. 할머니는 당장, 또 아이가 불낼 걱정부터 
하신다. 할머니 없을 때, 너 이거 켰다간, 큰일 날 줄 알아라. 
불이라도 나서 여기를 쫓겨나면 우린 정말 갈 데가 없어. 알았지?


라면을 먹고 아이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까지도 비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는 슬슬 살던 집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우리가 여기 온 것도 모르고 계실까?  집이 있던 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이미 진흙 구덩이가 푹푹 패이고 누런 황토물이 자동차 
바퀴자국을 따라 아래로 도랑을 이루면서 흘러내려 오고 있었다. 
아이는 우산도 없이, 골목길을 더듬어 올라갔다. 아, 순이네는 정말 
가버렸을까? 어디로? 마음이 급해져서 바지가랭이가 흙탕물에 다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는 뛰어 올라갔다. 맞은편에서 내려오고 
있던 승용차가 아이를 가까스로 피해 내려가고 아이는 머리카락에서, 
눈에서 물이 줄줄 흐르는 채로 집있던 곳을 향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올라갔다. 


집은 완전히 넘어져서 블럭담과 부서진 문짝과 합판조각들이 뒤엉킨
채 커다란 트럭에 포크레인으로 퍼담기고 있었다. 순이네 집은 아직 
블럭 담들이 덜 부셔진 채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아이가 그려놓았던 
강아지와 해바라기, 그리고,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려 웃는 순이 
얼굴이 비에 푹 젖은 채, 빨간 크레용 색깔이 더 선명해져서 웃고 
있었다. 그 담장  밑에서 순이가 앉아서 공기놀이를 했었는데, 잡풀
들만 아직 그 곳에서 비를 맞고 있다. 아이가 집 있는 데로 가까이 
가려고 순이 얼굴 옆으로 붙어서 푹 패인 도랑을 건너가려고 하였을 
때, 만화방 이씨 아저씨가 아이를 보고 마주 나왔다. 야, 너 잘 왔다. 
할머니는 거기 계시지? 너, 아빠한테 가 볼래? 아빠요? 그래. 너네 
아빠, 지금 요 아래 병원에 계시는데, 내가 잘 돌보고 있어.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은 말고. 우선 약속해, 너네 할머니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고, 나 따라 올래?


아이가 골목밖 한길에 있는 병원 이층 병실에서 아빠를 보았을 때,
아빠는 얼굴이 평소보다 반쯤 더 커 보였다. 부어서 그래, 술 때문에. 
어제 너무 많이 드셨거든. 이제 며칠 후면 집으로 가실거야. 할머니
한테도 그렇게 말씀드려. 알았지? 그러고, 아빠한테, 급식소에 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아이가 급식소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 놓는 
동안 내내, 아빠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눈물만 자꾸 
줄줄 흘리셨다. 무슨 영문인지, 아이는 자꾸만 아빠가 많이 다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어디 아파? 아니, 그냥, 술 때문이지. 
이제, 술 안 먹을 거야. 그런데, 왜 울어? 좀 일어나 봐. 아니, 아직
 허리가 좀 아파서 그래. 어제밤에 너무 찬 땅바닥에 누워 있었거든.
 할머니한테 그렇게 말씀드려. 짐 정리해 놓고 천천히 오시라고 해.


아이는 병원 문을 나서면서 아빠가 준 봉투와 이씨 아저씨가 준 천원
짜리 두 개를 만져 보았다. 할머니한테 꼭 갖다드려. 편지야. 이걸 
열어 보았자, 글자를 아직 잘 읽을 수도 없고 표시가 나버리겠지? 
무슨 일일까? 왜 아빠는 일어나지도 못하실까? 이씨 아저씨는 왜 
갑자기 저렇게 나 한테 친절하시지? 만화방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었는데. 


할머니는 편지를 읽으시고 나서도 굳게 입을 다무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니, 하여튼, 우린 여기서 일단 오래 머물고 봐야 돼. 여기 
좋지? 오래 살고 싶으면, 너 절대로 동사무소에 들락거리고 그러지 마. 
애들 데리고 와도 안돼. 나가서만 놀아. 알았지? 옷이 또 다 젖었구나. 
이게 뭐야. 갈아 입고 먼저 자거라. 요 하고 이불 여기 있다.  


어디로 가서 논단 말이지? 이 동네는 부잣집 아이들이라 나하고 놀아
주지도 않는데. 동사무소 뒷문으로 들어가면 숨바꼭질을 해도 숨을 
곳이 많겠던데. 그 종이박스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라면그림은 
아니였고, 국수? 통조림? 아이는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지만, 
할머니가 저 짐을 다 챙겨 놓고 주무시기만 해봐라. 나는 또 웃동네 
올라가서 순이네 집이 다 무너졌나, 꼭 보고 올 거야. 순이 얼굴이 
다 부서지면 어떻게 하지? 순이는 다시 오지 않을까?  걱정이 자꾸 
되었다. 썰렁하고 습기가 가득 찬 방이었지만, 함석지붕에 비 떨어지는 
소리와 할머니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면서 곤한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엄마 얼굴이 아빠 얼굴보다 더 선명하게 둥 
떠올랐다가 아이의 불을 비벼주고 있었다.
 

2001. 7. 1. 해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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