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입동(立冬)에

해선녀 2004. 1. 30. 08:11
오늘도 나는
갈색빛의허접한 일들로 하루를 보냈다.
푸르라니, 무성하니,
달고 섰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무관하다, 무관하다며
나무들은 미련없이 낡은 잎들을 털어내는데
나는 여전히, 오래된 잎들을
주렁주렁 훈장처럼 매달고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하노라,
사랑하노라며,비내리는 도시를 헤매고 다녔다.
 
立冬이라.
나는 언제부터 여기로 오고 있었지?
내가 푸른 잎이었을 때도
나는 내가 여기로 올 줄을 알고 있었던가?
 
황혼에 이르러서 보면
지나간 일들이 다 꿈 같지만
때가 되면 어김없이,잎들은 떨어져 내리고...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든,
여기, 이 곳에서. 그렇게 묻고 서 있는
너 자신만은 그래도 믿으라고
외줄에 아슬하게 걸린 잎 하나가
유언처럼 내게 말한다
빈센트는 그 말마저 믿을 수 없어서
귀를 잘라 본 것이었을까?
 
그래. 나는 지금 황혼,
그리고, 立冬에 서 있다.
소리내어 말해 보지만, 아, 여전히.
무엇이 달라진 것인지 알 수가 없네.
그만하면 너도 중증이야.
계절이 오고 가도 마음 설레이지도 않는
오래 묵은 계절 하나를
너도 네 안에 가지고 있네.
 
그 잎은 내게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낙하해 갔다.
한 번쯤, 그 치마폭을 마지막으로나풀거리며
비상하는 듯이도 보였지만,
그 잎은 젖은 흙 속에 곧장 파 묻혀
다시는 바람에 이리 저리
휘날려 가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03/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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