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가을 몽유도

해선녀 2004. 1. 2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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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나는 다시 일없이 거리를 걷고 싶은 병이 도진다. 바람 
스산히 부는 날, 을씨년스럽게 비내리는 날, 햇살이 너무 밝은 날에도
일없이 나가 여기 저기를 기웃거릴 이유는 충분히 있다.
낙엽 그림이 전각된 간판, 빛바랜 하얀 격자무늬 창살,뭉툭한 
쇠문고리가 달린 집도 안으로 들어가 볼 이유는 충분히 된다.
 
구석 자리에 앉아 주위를 천천히 살펴 보면, 나처럼 그저 한가한 
품새인 사람도 두엇 보이고 삶의 가닥을 잡느라 골몰한 듯한 사람도 
두엇 보이고 삶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듯한 사람도 두엇 보이고
묵은 샹송이 흐느끼는 공간 커피 냄새가 상주하는 공간에서 나는 그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죽인다.
 
내가 정물이 되고 늙은 흐스티스가 되고 커피향이 되고 음악이 
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그 속에 녹아 있는 것이 좋다.
거리를 다시 나서면, 내가 낙엽지는 가로수가 되고 행인1이 되고 
노점상2가 되고 걸인을 보면 나도 걸인이 된다.
 
나는 내가 무엇이었던가를 모르겠을 때. 이제 와 굳이 알 것도 
없어 보일 때,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좋을 것 같을 때. 그렇게 생각없이 흘러갈 때가 좋다.
아무 것으로도 나를 건져 올리지도 못하는 치기어린 가을병이다.
 
 
03/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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