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 새로 이사 온 분이 텃밭을 제법 크게 만들었다. 그 씨앗들, 싹이라도 좀 텄으면 좋겠는데, 농부들도 애가 다 타 타들어가도록 가뭄이 심한 판이니, 이를 어쩌나? 남편은 전원형, 부인은 아파트형?퇴촌에서 잠시, 전원생활을 한 끝에, 한 번만 더 전원생활을 해보자고 남편이 부인에게 졸랐다니, 마지못해 따라 온 듯해서 내가 다 미안하다. 주말마다 지금 살고 있는 분당에서 양평으로 와서 집과 마당과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동네 대리점 사람이 65만원에 완전교체하라던 지하수 모터를 기어이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본사 A/S를 불러서, 내가 출장비 10만원만 내어도 되게 해주기까지 했다. 양평의 업자들이 서로 짜고, 외지인들에게 그렇게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많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이번에 알았다. 고구마 수확도 하면 갖다 주겠다며 웃는 모습이 참 건강하다.
거실앞 놀이터에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오늘따라 많아졌다. 생태연못의 분수와 폭포 소리가 자꾸 나다 말다 하는 것이, 분수를 켜고 폭포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신이 날 수 밖에. 작년 여름엔 한참 잘 울어대던 개구리들 울음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던 게 생각난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일부러 쫓아낸 것 같다. 누군가,아파트 온라인 까페에 개구리 울음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썼던 것 도 같다. 올해는 내가 미리, 개구리들도 다시 놀러 오게 해달라고 글을 올려 볼까? 새소리, 풀벌레 소리와는 달리, 하긴, 개구리들은 좀 시끄러울 수도 있지. 한밥중 늦게까지 잡도 안 자고 떠드는 녀석들이 꽤나 많으니, 나같은 백수할매나 친구삼아 듣기 좋지, 일하러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나 불면증인 사람들에겐 듣기 고역일 수도 있겠다.
창문에 연보라색 노을이 한가득이다. 하루중 이 시간을 제일 좋아하지만, 특히, 노을이 너무 황홀할 땐 마음 아픈 기억 하나가 자주 떠오른다. 누구못지 않은 감성을 가지셨던 시어머니가 마지막엔 아무 생각도 없는 백치처럼 되어 큰집으로 옮겨 가신 후, 우리는 죽음밖에 더 이상 희망이 없었던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그 날, 섭지코지의 저녁노을 속에서 들었다.구름과 노을과 바다가 완전히 한 덩어리가 된 채, 온천지가 불타오르던 그 노을 속에서, 그는 과연, 미쳐 버린 것이었을까? 포도주 한 병을 사 들고 호텔방으로 돌아온 그는 덩실덩실,내 손을 잡아 끌며 춤을 추었다. 당신, 제 정신이야? 말했지만, 나는 말리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았다. 그는 쓰러져 울었고 나는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이튿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형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어릴 때부터 그 형과 어머니에 대한원망이 많았던 그를 다 이해해 주지 못했던 나는 그들과 무슨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꾸 그를 설득하려 했다. 당신의 마음도 잘 알지만, 어떻든, 아버님 옥바라지해 가며 다섯 자식을 혼자서 교직생활로 꿋굿이 지켜 내신 어머니와 그 큰아들이 아닌가? 그는 '도덕군자연' 하는 나를 늘 답답해 했다. 나는 그가 그 매듭으로부터 풀려 나와야만, 진짜 그가 원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버님의 민주화 운동과 10년의 수형생활로 인한 가족의 고난이말할 수 없었지만,형제들 중에서는 가장 마음이 힘들었던 사람은 역시, 가장 마음이 여리고 착하면서도 생각이 깊은 그와 맏딸이었다고 나는 늘 생각한다. 정신적으로, 아버님만 존경했던 그는 너무 늦게 자유로워졌다.
이제 곧, 청보라색, 그리고는 검은 색 하늘에보석같은 가로등 불빛이 반짝일 것이다. 섭지코지에 하나 둘 켜졌던 그 가로등들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는 뎅, 뎅, 뎅, 괘종시계가 울릴 것이다. 내가 그라고 생각하고 싶어서 하나 사다 세워 놓고, Amnesia(망각)라는 그의 인터넷 이름을 써 넣은 괘종시계가 이제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늘 저녁 나의 기도는 양평의 그 남자가 제발, 그 부인을 잘 설득하고 달래어 그 집에서 오래 살아 주기를. 퇴원하면 오랫동안 원했던대로 꼭 양평에 집을 짓고, 고구마라도 구워 먹으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겠다고, 환자복 위에 코트 하나 걸치고 병원에서 외출하여 그 집터를 계약했던 그를 대신하여. 혼자서는 눈어두워 거기서 살 수 없지만, 로버트 프로스트처럼 파이프 담배 입에 물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그를 바라 보며, 나도 시 한 줄 쓰는 꿈을 놓치지 않고 살리라던 내 꿈을 대신하여. 그래도, 그 부인은 지금 분당에서 논술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적인 일 때문에 그렇지, 어쩌면 나보다 더 낭만적이고 자연을 좋아하는 국문학도가 아닐까?
양평의 짐을 일부는 용인으로, 일부는 빈이엄마의 친정인 완도로 보내는 과정에서 긁히고 찍힌 마루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제대로 짐정리도 못한 채, 여러 방법을 알아 보던 끝에, 어제, 마루 땜방수리 공사로 모든 일이 끝났다. 내 눈으로는 지금도 거의 알아 볼 수도 없지만, 대충, 2, 3년이 지나면, 땜방한 곳이 그리 표나지 않을 것이다. 양평집 마루는 내 눈으로 보지도 않았지만, 강화마루라, 여기만큼 많이 상하지 않았겠지, 그저 눈감는 마음이다. 다행히, 아주 착하고 성실한 마루업자를 만났고, 미안해 하는 빈이엄마의 마음을 잘 읽고 반성한 그녀의 '제부씨'도 열심히 오가며 뒷마무리를 잘 해 주었다. 사실, 짐을 너무 험하게 다루어서 그리 되었다는 것조차 부인하는 듯한 자세로 나올 땐 기가 막혔지만, 살살 대하면서 보니, 그도 참 악의는 없는 사람이다.
완도사람들, 섬사람들의 기질이 대개 그런가? 천방지축 행동하고 나오는대로 '쥐깨서'(지껄여서) 탈이지, 나중엔 고분해지고 이것 저것, 내가 부탁한 잔손질까지 두 말 않고 해 준다. 노래를 흥얼흥얼 불러 가며 기발한 아이디어도 내놓는가 하면,손재주도 좋은, 본질이 낙천가인 사람이었다.혹시, 이 사람이 끝까지 오리발 내밀면 어쩌나 하고, 다나 외할머니께 부탁해서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척하고 따라 나가서, 그의 차번호 사진을 찍어 둔 것이 소용없게 되었다. 수리공은 내가 데려 왔지만, 수리비는 그가 잘 협상하여 지불했다. 가져 간 살림들을 잘 쓰고 있다고 인사까지 한다. 잘 써주시면 제가 고맙지요. 자신이 쓰는 것도 아니고, 장모님댁까지, 그 먼 길을 실어다 준 착한 사위. 살아갈수록, 들여다 보게 되는 나와 너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사이들이 참 재미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아, 반가워라. 열흘도 넘게, 제자리에 들어가지 못하는 짐들과 책들 속에 들어 앉아 내내 어수선한 속에서도, 켄트로 이사갈 준비로 바쁜 태오네와 이번 여름학기 강의를 못딴 에비 대신 에미가 처음으로 파트타임 일을 시작했다는 다나네 소식들과 문재인 정부의 조각 소식에까지 마음이 쏠려 있눈 중에도 문득문득, 자꾸 기다려지던 그 소리. 아, 연못의 물이 채워지니, 어디선가, 너희들도 기다렸다가 찾아 온 건가? 그래, 올여름도 우리,함께 지내자. 설마, 작년에 너희들을 연못에서 쫓아낸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올해는 그 사람 생각도 좀 달라졌겠지? 근거 없는 비관보다도, 이 근거없는 낙관 하나는 너희들에게 배워서 나쁠 것이 없지. 이 아름다운 초여름 저녁에. 여기까지 써놓고 잠들었는데, 한기를 느껴 일어나니 새벽 3시. 린 창문으로 아직도 한 녀석이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내 불 켜진 창문을 바라 보고 있었을까? 창문을 닫고, 불도 끄고, 이 컴도 끄고 다시 들어가 자야겠다. 개굴아, 잘 자, 이제 진짜, 굳 나잇.
'노을 비낀 숲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성산을 바라 보며 (0) | 2017.07.30 |
---|---|
진짜 사랑 (0) | 2017.07.13 |
책정리 (0) | 2017.06.11 |
초여름, 줄장미들이 나에게 (0) | 2017.06.01 |
요즘 / 욕심, 그리고... (0) | 2017.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