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인 줄도 모르고 들어선
어이없는 시간들은 지금도 게속중.
신은 우리에게 너무 잔인했다.
병을 고칠 생각에만 몰두해 있는 우리를
재미있어 하며 바라만 보았다.
그의 책장을 이제야 정리한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내 어둔 눈으로.
플라토, 칸트, 헤겔, 비트겐시타인, 오크셧,
그의 책들은 아랫칸에 놓고
모파쌍, 에밀 졸라, 발자크, 스탕달, 빅토르 유고,
아버님의 책들은 윗칸에 놓는다.
67년 10월6일부터 11월 6일까지
미처 반납이 안된 채로 출옥하셨는지,
감옥의 도서출납증에 쓰인 아버님의 함자와
그의 싸인과 간혹 몇 자 낙서들을 어루만지며
떨어져 나가려는 페이지들을 꼭꼭 끼워 주면
삭아 가고 있던 책들이 조용 히말을 건넨다.
그래, 하루에 한 마디씩이라도 우리,
못다 한 이야기들을 책 속에서 나누자.
이건, 비문 아닌가?
산다는 건 비문 속에서 명문을
명문 속에서 비문을 발견하는 일이지.
살아도 산 것만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만이 아니라고,
다 깨달았다는 듯이 떠들기도 하였지만,
이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조차
되짚어 보지 못하고 지냈구나.
신은 여전히 조용히 웃으며 내려다만 보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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