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여, 허구한 날, 고장난 냉장고나 티비 삽니다. 컴퓨터 삽니다, 확성기 소리 높혀 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그대여, 저녁이면, 시장통 한 구석에서 그러구러한 친구 만나 막걸리 몇 잔에 헛소리나 지껄이다가, 신나면, 그 날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질러 버리는 저지레나 하고 산다던 그대여. 그대는 아는가, 그대의 소탈하던 그 목소리가 지금, 본의 아니게 국민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하다고, 기대에 부응치 못해서 유감이라고 말하고 있는 저 위엄있는 소리보다 더 듣기 좋다는 것을? 그 어떤 비단결같은 말보다도 그대의 그 소리가 더 진실이라는 것을? 이렇게 멀리 이사 와, 거짓없는 그 목소리에 그대도 모르는 그대의 시가 들어 있었음을 생각하는 사람 하나 여기 있다. 그 봉천동, 언덕길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니던 그 소리가 곧 시였음을 생각하는 사람 하나 여기 있다.
그대의 희망과 절망, 꿈과 낭만과 회한과 미련은 그 진실의 목소리를 타고 나비처럼, 벌 한 마리처럼 날아 다닌다. 이 풍진 세상의 꽃들 위로 훗날, 언제 다시 날아 올 것이라는 약속같은 건 없이, 오직, 가볍게, 가볍게, 날아 다닌다. 오늘의 고장난 컴퓨터 한 대가 주는 꿀 한 모금같은 기쁨을 생의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내일이면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잊어버리듯, 떠나 보낼 것이면서도, 아끼며, 불안해 하며, 또한 감사하며 날고 있다. 아카시아 향기가 온동네 가득할 유월, 지금쯤, 뒷덜미가 따끔거려 올 이 한 나절, 오늘도, 그대는 그 하얀 트럭을 끌고, 휘적휘적, 그대만의 시를 읊으며 그 동네를 날고 있을 것이다. 그리워라. 이사 온 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 그대의 질박하지만 구성졌던 그 시가 그리워라.
'노을 비낀 숲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감(靈感)의 시대 (0) | 2015.07.06 |
---|---|
시인 (0) | 2015.06.26 |
하늘을 나는 새 (0) | 2015.06.15 |
용인의 유월 아침에 (0) | 2015.06.09 |
자작(自酌)하는 봄날 저녁에 (0) | 2015.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