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잊고 있었던 내 단추들

해선녀 2014. 1. 29. 18:01

 

 

요즘, 내 블로그에 들어 와서 로그인을 하면, 코른골트의 바이얼린 협주곡이 들리곤 한다. 이게 웬일인가? 2년여 전, 다음음악샵에서 음원사와의 저작권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아서라던가, 그 이후에 사오는 음악은 개별 글의 배경음악으로는 쓸 수 없다기에, 언제 해결될 날 있겠지 하며, 그 이전에 사다 놓은 4백개 가까운 음악만을 밑천으로 개별 글 배경음악으로 올리며 기다리는 동안에 블로그배경음악은 영 잊어버리다시피 하고 지내다가, 작년 여름, 새음악으로 블로그 배경음악이라도 올리려고 저 음악을 사서 올려도 어쩐 일인지 내 컴에서는 들리지 않아서 그대로 둔 채로 다시 잊어 버리고 지내던 참이었다. 

 

그러니, 하이팻츠의 저 연주는 그 동안 내내 내 불방에서 들리고 있었는데, 나만 못듣고 있었다는 말인가? 다른 분들은 그 동안, 로그인 상태로 내 방에 들어 오면 이걸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로그오프 상태에서도? 신기하여, 들락날락해가며 실험해 보니, 처음에는 로그온을 해야 들리지만, 다른 방에 갔다 오면 안 들리게 되어서 로그오프를 해야 다시 들리고, 온상태에서 들리고 있을 때는 오프를 해도 계속 들리다가 다른 데를 갔다 오면 또 안 들려서 로그온을 또 해야 한다. 그 때, 저 음악을 블로그 배경음악으로라도 올리고 싶었던 건, 그걸 듣고 좋아서 '음악에'라는 시를 끄적거렸는데, 그 글의 배경음악으로는 못올리니, 블로그 배경음악으로라도 올려야 들을 수 있어서도 그랬지만, 내가 태어났던 47년에 녹음되었다는 것에도 특별한 정이 갔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 동안 안 들리던 그 음악이 이제사 내 귀에 다시 들리게 되는 건 무슨 조화일까? 누가 나에게 새 단추를 주었는데도 나는 받은 줄도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내가 원래부터 있던 어떤 단추를 건드렸다는 말인가? 반가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눌렀을 수도 있는 단추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제 자신에 달려 있는데도, 자기만 모르고 지내 온 단추들의 존재까지 뒤늦게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죽을 땐 파노라마처럼 그 일생이 눈앞을 지나간다는 말도 있지만, 살아 온 세월 동안, 알면서도 억누르고 외면하면서 꽉 잠그고 있던 무의식의 단추들이 한꺼번에 족쇄 풀리듯, 다 열리게 되는 때문이 아닐까? 현실에서는 의식하지 않았던 심상들이 꿈속에서는 풀려 나오듯...

 

그러고 보면, 내가 잊어버리고 있는 단추는 이 블로그에서만 해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우선, 이제 노안이 심해져서, 배색이 너무 흐린 내 블로그의 글을 잘 읽을 수 없다는 불친들이 더러 있었음에도, 나는 저걸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서 미련과 게으름을 부리며 4년이나 그대로 방치해 왔다. 그러다가, 그야말로, '임자'를 만났다고 할까, '할매가 무슨 멋이냐, 글이란 읽히기 위해서 쓰는 것이니, 어서 흑백으로 바꾸어서 읽기나 좋게 해놔라'고 강력 질타하는 불로거가 나타났다. 이 불동네에 새로 이사온 분인데, 처음부터 그 어투가 하도 막강해서 좀 거부감이 일었지만, 그 솔직함을 일단 접수하고 나도, 한 수 더 떠서, '자칭, 삼류시인이라면서, 그 방의 음악과 그림들이 너무 요란해서, 그 시들을 스스로 삼류화하고 있다'고 역공까지 했던 터였다. 그는 당장, 그 치장들을 치워 버렸었다. 그래, 이번엔 내가 져 줘야 할 차례이기도 하지...블로그의 색상을 흑백으로 바꿨다. 1대1, 길가다 만난 사람들이 갑자기 동해서 한바탕 총쏘기 퍼포먼스를 벌이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침 뚝 떼고 돌아서 가다가 혼자 킥킥 웃는 장면쯤 될까? 초면에, 서로의 잘못 낀 단추부터 지적질한 것이다.불질 십년 여에 이런 재미있는 일도 있다니...ㅎ

 

나도 사실은, 요즘, 동영상 음악을 개별 글의 배경음악으로 자꾸 올리면서 내 단추들이 정신없이 늘어나서 불안심리가 가중되고 있었다. 동영상의 시각적 유혹 때문에, 나 스스로도 내 글에 집중이 안된다는 자각...소리로만 듣는 음악도, 글의 분위기를 도와 줄 때도 있지만, 글읽는 신경을 분산시키곤 하는 판에, 삼가 조심할 일이다.나이탓인가, 현실에서도, 동시에 여러가지를 즐기는 능력이 확실히 떨어졌다. 사는 일이 원래 다 그런 것을, 내가 너무 오래 모든 것을 다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오만과 욕심을부려 왔다. 한 가지에 집중하려면 다른 것은 그만큼 내려 놓아야 한다. 이제 먹을 식구도 없는데, 시장엘 가면, 아직도 양팔 가득 사들고 와야 안심인 이 강박증.  동영상도 즐기고 싶으면 따로 즐길 일이지, 왜 종합선물세트처럼 글마다 안고 가려고 하는가? 비워야 한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고도 하지만, 다른 무엇으로 채우기 위함도 아니고, 비움은 그저 비움이어야 한다.

 

흑백으로 돌려는 놓았어도. 나는 고색대비를 써서 남들과는 반대로, 흑색바탕에 흰글씨로 보아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어떤 글짜들은 어두운 색으로 어둠 속에묻혀 있거나 아예, 숨어 있어서 일일이 키보드를 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남들에게도 완전 검은 글씨가 아닐 것 같다. 언젠가 다시 손을 봐야겠지만, 지금은 돋보기로 보거나, 마우스나 키보드로 단추들을 찾아 듣는다. 암중모색이지만, 정전 속에서 단추들을 찾아내는 기쁨도 크다. 어차피, 전맹이 되면 모니터를 켜지도 않고 컴을 하니, 나도 미리 연습 좀 해둔다고 나쁠 건 없다. 

 

이제 새 단추들을 찾아 다니는 일보다는 내 오랜 단추들을 다시 찾아 어루만지며 정리해야 할 때다. 죽음 앞에서야 파노라마처럼 내 인생을 다 뒤돌아 보는 건 너무 늦다. 지금, 내가 즐겨 듣는 인터넷 음악방송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바흐의 명징함, 바그너의 화려함(color), 베토벤의...뭐라더라? 잠깐 놓쳤다. 멘트가 바뀌었다. 어제까지는 스트라빈스키의 그 단호함(cut) 브람스의 그 무게감(weight), 모짜르트의 그 재기발랄함(brilliance)이라는 보석들을 함께 나누자고 하더니...브람스는 내겐 따스함으로 느껴졌는데, 당시 엔터테이너쪽이었던 로씨니에 비해 브람스나 베토벤은 무게감쪽이었다는 그 진행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그들의 음악과 삶이 그렇게 간추려지듯이, 아직도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거나 숨어 있는 내 삶의 오래된 단추들도 어떻게든 간추려질 수 있을까? 아직은 너저분함? 너절함? 느긋함이나 넉넉함까지는 몰라도, 널널함? 이제 그 젊은날의 칼칼함은 다 지나간 지 오래니, 'ㅋ'소리는 아닐 테고, 나지락 나지락, 저렇게 세월없이 늘어지는 'ㄴ'소리들의 동네 근처에는 왔겠지? 난 그게 좋다. ㅎㅎ

 

 

 

음악에: http://blog.daum.net/ihskang/1373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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