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여행하는 나무 한 그루

해선녀 2014. 1. 3. 12:28

 

 

나는 끊임없이 땅에게서 해에게로 해에게서 땅에게로 오르내리며 여행하는 나무 한 그루. 어떤 이는 나에게서 내 뿌리 밑의 흙냄새를 맡기도 하고, 어떤 이는 내 가지 끝에서 반짝이고 있는 햇살을 만나고 가기도 한다.  나는 지금 그 가지 끝에 꽃 몇 송이를 피운 후, 뿌리 속에서 잠들어 있는 중. 언제, 꽃을 피워 본 적이라도 있었던지를 묻지 말라. 물관을 타고 체관을 타고 꾸준히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꽃이라면 한 꽃이다.

 

그렇다고, 늙은 꽃이라고는 하지 말라. 숲속 다른 나무들의 내음에 취해, 한 마리 작은 새의 소리와 꽃향기에 반해서, 나는 끝없이 길을 택하고 취하며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걸어 간다. 내가 나중에 다시 이 숲에 온다면, 그 새도 꽃도 보이지 않아 따뜻한 햇살을 따라 저 쪽 길로 가게 될 지도 모르지만, 내 가지와 뿌리가 갈림길에 당도하는 것과, 꽃과 새와 양광이 어느 순간에 거기 있고 없음이 우연인지 필연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 어떤 만남들로든, 순간마다 내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가만 중요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하늘과 땅에게로 손발을 조용히 뻗으며 내 영혼의 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하여, 내가 쓰는 글들은 내가 어떤 새와 꽃과 나무를 만났던지, 혹은 만나고 싶은지, 과거를 정리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려는 구체적인 공간과 시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무슨 짓을 하고 있든 간에, 내가 그 순간마다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  가고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제옆구리 제가 꼬집어 보듯, 확인하는 일이다.

 

갈급해 하지도 않는글들, 그것은 이제 남은 내 삶의 산책길에서 주워 든 낙엽 한 장를 들여다 보듯, 문득 만난 단어 하나, 떠오른 이미지 하나를 붙들고 요리 조리 만지작거리며 애완하는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그 안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디에라도 가닿을 수 있는 길이 들어 있고, 과거도 미래도 손금처럼 다 보인다. 그렇다고, 뜬구름속에서만 산다고 말하지 말라. 내게 온기와 여운을 남기고 떠났던 새들은 지금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그리운 마음 여전하지만, 자주 가려워지는 내 겨드랑이부터 긁고 가난한 은행계좌라도 제법 잘 관리하면서, 올해도, 내 밥 내가 짓고 국도 제법 잘 끓이며 살고 있을 테니까...하하...

 

 

 

 

 

 

42060

'노을 비낀 숲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하철에서 본 어느 노인의 말없는 말  (0) 2014.01.21
만남의 미학  (0) 2014.01.06
歸家  (0) 2013.12.24
겨울, 칩거의 계절에...  (0) 2013.12.16
초겨울 산책길에서  (0) 201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