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겨울, 칩거의 계절에...

해선녀 2013. 12. 16. 15:22

앞뒤좌우, 여닐곱의 사람들 중에 스마트 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이 넷이었다. 그들은 지금 여기, 지하철 속에 있지 않다. 뉴욕의 어느 쇼핑몰, 아니면, 아프리카 오지라도 뒤지고 있는 것일까? 그다지 춥지 않은 날이어서, 너무 큰 장우산을 그냥 손에 들고 마을버스를 줄서서 기다리면서 살짝 스미는 가랑비를 맞고 섰다. 앞뒷사람의 우산에서 가끔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파카 위에 떨어진다. 나도 우산을 펴면 내 비를 그들이 맞게 되겠지. 내가 너무 다가가면 저 할매가 비맞으려나, 뒷사람도 그런 생각인 듯, 조금 사이가 떴다.

 

버스가 왔을 때, 정류장 지붕아래 벤치에서 비 피하며 앉아 있던 젊은이가 재빨리 그 사이에 끼어 들어 차를 타고 의자를 차지한다. 내 뒤에 섰던 그 어른은 내 곁에 흔들리며 섰다. 젊은이는 줄은 서지 않았지만, 자기가 먼저 와 있었다는 거겠지. 벤치는 늘 줄서기를 모호하게 한다. .그는 여전히 스마폰에 눈을 박고 있다. 그 어른에게, 여기 앉으세요,하니, 웃으며 마다 한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노인들이 그래도 좀  멀리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 젊은이는 지금, 광대한 우주를 날아 다니며 손가락 한 개로 세상을 다 관장하고 있지 않은가? 이까짓, 지하굴 속을 달리고 있는 두더쥐들의 시선이나 좁아터진 마을버스 안의 상황논리에 갇히지 말 일이다.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주말엔 이 겨울 처음으로 눈이 펑펑 오더니 꽁꽁 얼어 붙었다. 여린 눈에, 미끄러울 언덕길에, 망서리다가, 우리 눈나쁜 사람들을 위한 후원 음악회에 결국, 안 가고, 후원금만 조금 보내기로 한다. 내가 사는 방법이 이렇게 계속 달라져 가고 있다. 특히, 먹는 일, 입는 일, 나가 다니는 일에 드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인다. 그래서 남는 시간은 가많히 앉아 있더라도,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해도,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너무 빨리 지나가서, 냉장고의 음식을 미처 다 못먹고 버리게 되고, 계절옷을 제때 못입고 다시 넣게 된다. 느리고 더뎌져 가는 내 탓도 있지만, 도무지, 자연도 세상도 너무 빨리 변한다. 인생은 문틈 사이로 흘깃 지나가는 흰망아지처럼 빨리 지나간다고, 장자가 그랬다던가? 언젠가, 기차가 오른쪽에서 와서 왼쪽으로 사라지는 음향을 배경음악으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것도, 아마,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들에 대한 상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장자의 망아지도 그렇고, 그 기차도 그렇고, 사실은,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은 자연도, 세상도, 내 인생도 아니고, 그 모든 것들을 건성 건성 흘려 보내고만 있는 나 자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장자도 그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문안, 이 쪽에 엄연히 존재하는, 저 망아지의 달음질을 빠안히 내다 보고 있는 삶의 진실, 실재, (그것을 道라고 하든, 불성이라고 하든, 혹은,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든...)을 생각해 보라. 주마간산, 무엇엔가에 홀려 달려만 가고 있는 저 망아지같은 나 자신을...회전목마처럼, 있던 자리에 돌아 오고 또 돌아 오면서도, 그 손바닥에서 놀고 있는 이 진짜 삶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 채, 앞발을 치켜 들고 뒷발을 구르며 하늘아래 새로워 보이는 것에 홀려 소리치며 달려 간다. 사랑이니 미움이니, 기쁨이니 슬픔이니, 정의니 불의니가 다 그 순간만의 자기도취이고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이치를 망각하게 하는 허무한 놀음이 아니었던지? 그러고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밀고 밀리며 히힝거리고 으르렁대는 국내정치는 그래도 얼마나 양반인가, 북한의 장성택 처형을 보면서,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내 말도 그 문틈에서 비쳐 나오는 빛을 흘깃이라도 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은 월요일, 날이 다시 따뜻해졌다면서, 공치러 가자는 전화가 왔다. 복지관의 모든 수업이 지난 주로 다 끝났지만, 방학 동안에도 운동만은 계속하자는 친구다. 운동감각이 유난히 둔하다는 그녀는 공치기가 잘 늘지는 않지만, 일년회비를 내고 멀리서도 거의 매일 나오더니, 이 연습장과 프로님이 좋다며 아예, 이 동네로 가족을 다 데리고 이사를 왔다. 하긴, 강남의 아파트가 재건축될 때까지 전세를 살고 있는 중이라니 쉽게 옮기겠지만, 그녀는 영 실명이 되어도 공을 칠 것 같다. 새봄엔 이태리 여행도 간단다. 눈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세상을 좀더 많이 보아 두어야 한다며...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그럴 걸, 지금이라도? 생각도 해보지만, 일부러 그걸 위해 길을 나설 생각은 못한다.아무튼,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정진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다만, 어떤 것에든 그것에 매몰되고 중독되지만 않는다면...내겐 그럴 체력도 시력도 이제 없지만, 원래부터 나는 열정형도 못되었다. 천상, 달려가는 말과 어슬렁거리는 곰 사이에서 어중간, 왔다리 갔다리하는 돼지랄까...ㅎ 그저, 그녀 덕분에, 운동을 조금 더 할 기회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마음의 평화를 스스로 깨트리지 않는 정도로만, 무엇이라도 하면서 존재하고 있음이 행복하다.

 

바이얼린 샘이 지금 보면대를 주문해 주셨다. 나하고는 상관없을 줄 알고 내다 버린 것들을 다시 사들일 수 있게 되는 것도 기쁨이라면 기쁨이다. 얼마나 쓰게 될 지 모르지만, 한 손으로 전자확대기를 몇 번이고 갖다 대면서라도 아직은 악보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게 고맙다. 이러다가, 나도, 전혀 배울 것 같지 않던, 점자악보까지 배우게 될까?  더 이상 돼지가 아닌 열정의 말이 되어서?  실제로, 오랫동안 음악계에서 활동하셨던 복지관 친구 한 분이 한글점자부터 배우면서 저술을 시작하고 음악점자도 배우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엉터리로라도, 소리로 듣고 느끼는 만큼만 끄적이고 켜고 불어 볼 수 있어도 그 즐거움이 어딘가... 그러고 보니, 내년이 말해라던가? 내년엔, 다나의 동생이 태어날 예정이다. 다나도 활발하지만, 그보다 더 활발한 동생이 생길 모양인가?  태오도 내년엔 말을 더 잘 타게 되면 좋겠구나...멀리 있는 아이들 생각을 자주 떠올리며, 혼자서 고물 고물,사브작 사브작,  이 칩거의 겨울도 즐기겠지만, 오, 제발, 너무 얼어 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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