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침묵과 수다 사이 2

해선녀 2014. 2. 14. 14:44

 

 

침묵과 수다,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미덕도 부덕도 아니다. 실수를 두려워 하는 침묵은 용기없음과 솔직하지 못함일 뿐이다.  침묵이 곧 명상도 아니고, 수다가 곧 소통도 아니다. 세상의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우리를 道로 이끌지 못한다.

 

이 말을 했다가 나중에 어떻게 될까, 유불리의 계산부터 하는 사람은 진실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고 언제나 상황 속에서 유리한 쪽으로만 택하려고 눈치를 보면서 침묵한다.  그런 사람이 '명상'을 한들, 그 길은 사통팔달하는 대로로 나와지지 못하고 골목에서 골목으로 바람만 피해 다니다가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서 평생 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는 완벽한 파숫꾼이 되거나 사유의 화석 쪼가리들만 한 보따리 안고 살기도 한다.  

 

그에 비해, 수다하는 사람은 오히려 순진하다. 그들은 했던 말을 또 하면서라도,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상대방에게 계속 이입시키려 하지만, 대개는 논리의 일관성이 없고 사실적 근거를 대는 데도 서투르다. 조금이라도 어떤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끝없이 이어 가는 그들의 수다는 종종 피곤하지만 악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주의는 침묵과 수다, 어느 쪽에도 다 있다. 침묵하는 완벽주의는 자신의 말이 언제나 완전한 진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고, 다변형 완벽주의자는 그의 말의 허술함을 메꾸기 위해 계속 말을 보탠다. 어느 쪽이든, 그들의 어투는 대개, 단언적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든, 자신의 말에 틀린 구석이 있음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슬쩍 감추고 그냥 넘어 가려는 사람은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그만큼 완벽주의도 못된다는 점이다.

 

진짜 완벽주의는 자신의 말에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책임진다는 건 꼭 그것이 객관적 진실이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순간마다의 생각과 행동을 일어나는 그대로 말하되, 항상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그것을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은 즉시, 그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며 이것이 진짜 책임지는 일이다. 입을 꿍 다물고, 혹은, 다른 말만 계속 하면서, 그 말은 피하는 사람은 완벽주의도 못될 뿐 아니라, 스스로 거짓을 하고 있다는 자책감을 가진다. 꼭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자책감을 내버려 두지 않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는 못베긴다.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지 않는 수다는 배설에 불과하다. 끝까지 책임지려는 완벽주의는 그러므로, 스스로 피곤하지만, 거기서 행복감을 얻는다.

 

침묵과 수다의 양극단을 오락가락하며 시를 쓰거나 산문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시와 산문이 객관적 진실을 기술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적 책임감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마음의 진실을 담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마음의 진실이 담기지 않은 글은 거짓이고 그것이 두려워서 글을 쓰지 못한다면 실수하는 것이 두려워 그 존재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이며, 드러내되, 너무 장황하면 그것은 수다로 떨어질 위험이 있다.

 

아직은 구석 구석 오류 투성이이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자신을 자신이 낳은 아기가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듯 바라 볼 수 있는 사람. 생각이 유연하고 자유로워서, 위신이나 체면, 유불리를 먼저 따져서 거기에 묶이는 일이 없으므로, 누구의 눈치를 볼 일도 없다. 그는 말 몇 마디로 사람의 전부를 판단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완벽하지 못한 가소성의 존재이고 인간의 마음은 항상 정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나 남의 실수에 대해 너그럽고, 누구에게나, Let It Be, Let Me See하며 기다려 줄 줄 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여유있는 사람이 진짜 완벽주의자이다.

 

완벽주의는 그러니까, 지금 현재 그의 모든 언행이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완벽하지 못함을 스스로 잘 알기에, 끝없이 그 완벽을 추구하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말하자면, 그런 반어적 의미의 완벽주의자가 좋다. 그는 감히, 신의 경지에 가까이 가기를 꿈꾼다. "나는 실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말이 좋다. 죽는 날까지, 실수를 거듭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일부러 침묵하려고도, 일부러 말을 더 하려고도 하지 않고,자유로이 흐르고 흔들리되, 적어도 자신에 관한 한, 마음의 진실을 가리거나 과장하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깨달아 가는 길을 놓지 않는 사람,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열린 실존이 좋다.

 

 

 

침묵과 수다 사이<시>  http://blog.daum.net/ihskang/13733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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