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내 고향 신동 이야기

해선녀 2008. 8. 18.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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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집은 우리 집안에서 종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생가라고 부른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양자를 나오셨지만, 원래 출생했던 본집이라는 뜻이지요.. 종가는 저 집의 오른쪽,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의 맏형님댁, 큰댁이라고 불리는 집이지요. 저 집은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둘째 형님이신 종조부님 (윗대로부터 내려 오던 정자를 증조부님의 호를 따서 해사정으로 중건하신)이 큰댁에서 바로 그 왼쪽으로 살림나와서 살아 오신 집이지요.  증조부님과 종조부님이 얼른 읽기에는 헷갈리니까, 이제부턴 우리 집안에서 부르는 그대로, 종가는 큰댁, 종조부님댁은 생가라고 부르겟습니다.

 

그런데, 그 큰댁 할아버지도 다른 집으로 양자를 나오셔서 할아버지 네 형제 중에서 두 형제가 생가에 남은 셈인데, 손이 귀한 강씨는 여러 대에 걸쳐서 그렇게 사촌끼리 서로 양자를 주고 받았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를 잇는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생가의 가족관게 그대로 생활하므로, 우리는 할아버지가 양자로 가신 그 집안 사람들은 잘 만나지도 못햇지요. 큰댁 할아버지는 재산이 많고 벼슬은 낮은 집, 우리 할아버지는 벼슬이 더 높고 재산은 적은 집으로 가셧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생가란, 큰댁의 자손들에게나 우리 할아버지의 자손들에게는 물론이고, 생가의 자손들에게도, 원래 혈육의 본가라는 듯이지, 태어난 건물이라는 뜻은 아니며, 종가라면 어디까지나 큰댁이 종가이고 실제로도 큰댁 큰오빠를 종손이라 부르지요...

 

저 해사, 증조부님은 이조말, 대과에 장원급제하셔서 막 떠오르는 별로 벼슬길 오르셧다가 을사보호조약을 거쳐 한일합방에 이른 시기에 그에 저항하는 많은 상소문을 올리시며 투옥과 저항활동을 계속한 젊은 유생들의 13도 대표이셧지요.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영도 그 때 함께 활동하던 여러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지요. 합병 후에도 그 저항은 계속되엇지만 모친상 3년을 지내고 다시 활동을 계속하던 끝에 53 일기로 돌아 가셧지요. 그러니까, 이조와 운명을 함께하다 기어이 해체된 많은 구왕조 관직자들 중의 한 분이지요.

 

아이러니하게도, 그 큰댁의 오른쪽은 국무총리를 지냇던 이수성씨집이지요...구밭댁, 법무장관댁이라 불리는 그 집으로 똑똑한 강씨 딸네 한분이 시집가서 이수성씨를 낳앗지요. 원래, 저 생가 할아버지의 딸이신 내 종고모님이 동경대를 졸업한 사촌언니의 아들(우리 할아버지의 누님의 아들)) 그러니까, 내게는 오촌 아재 되시는 분을 중매했다지요. 그러나, 가난한 샌님보다는 부잣집 첩이 되겠다면서 첩으로 들어 갔고,곧 그 본실이 소천하고 정실이 되었답니다. 그 댁은 자유당 시절 새로운 정부의 요직을 맡아 가며 승승장구하고 있었거든요...당숙님은  OB맥주 사장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나중에 대학총장이 되었지만....아무튼, 거기에 얽힌 그런 저런 이야기도 많아요...

 

 

신동엔 광준 이씨(광주 이씨를 거기선 그렇게 불렷죠)와 강씨가 그렇게 서로 겨루며 반촌을 이루었고,, 거기에 저 당숙님의 벽진 이씨도 본산인 성주 일대에서 일부 옮겨 와서 이씨의 켠에 합세햇다고 합니다. 저 정자 뒷편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잇는데, 그게 성주에서 건물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벽진 이씨의 재실이랍니다. 다른 한편으로 칠곡군 일대에서 강씨, 이씨와 함께 삼대 구도를 이룬 인동 장씨는 왜관 쪽에서 번창햇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 쪽에도 강씨의 피가 섞여 들어 갓다네요. 같은 기방을 출입하던 어느 선조의 면모가 확실하게 보이는 아이를 낳은 기녀가 그 아이를 장씨 핏줄이라고 선언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장씨 손으로 일가를 이루어 오고 잇다는, 어디까지나 설에 불과한 설이지요...

 

큰댁은 규모도 더 크고  윗대부터 내려 오던 유서깊은 집이엇지요. 재실까지 몇 백미터를 설렁줄로 연결햇다는 건 숙질 간에 다섯 분이 한꺼번에 급제했다던, 증조부때보다 더 윗대의 이야기이고., 강씨집안의 세도를 비판하던 승려를 그 선돌에 묵어 놓고 매질을 했다느니 하는 것도 그 때의 이야기였지요...나는 얼굴도 기억 못하는 그 종손 욱촌오빠가 월북을 해버리고 그 올캐가 딸 둘을 두고 출가해버린 이후로는 그 댁은 많이 쇠락하엿는데, 출가인지, 가출인지, 그 올캐의 불가 귀의에 얽힌 비화도 참 소설 같지요. 그 올캐는 증조부님이 한참 마지막 관직에 계시던 그 당시 병조판서를 지내시던 분의 손녀엿는데, 이율곡의 17대 손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 올캐는 강씨보다 자신의 집안이 훨씬 더 전통있는 양반가인데 강씨 가문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낫다고 주장하더군요.

 

어릴 적에 큰댁에 들어서면 아직도 행랑채에는 머슴일가가 살고 잇고 큰댁 아지매는 그 높은 대청마루에서 비단옷을 잘잘 끌며, '와 왓노? '하셨지요. 그러니, 그 댁엔 심부름이나 세배를 갈 대 외에는 아무도 잘 가고 싶어 하지 않앗지요. 오죽하면 그 아지매는 '와 왓노 아지매'라 불렷을까요...머리가 하얗게 센 큰할머니는 손주들이 오면 벽장에서 곶감이니 배니를 꺼내어 자꾸 먹이려 하시고 큰댁 아지매는 늘 그걸 못마당해 하는 눈치엿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할아버지댁만 해도 일년에 제사가 열 세번이엇는데, 큰댁은 또 오죽이나 제사가 많앗겟어요? 제사에 슬 제수들을 늘 충분히 남겨 두어야 한다는 맏종부의 마음이 그랫을 터이지요. 그 댁이 지금 버려진 채로 퇴락해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오는 마음이 참 쓸쓸햇어요...

 

그 올캐의 말에 의하면, 강씨 집안에서 우리 아버지만 유일하게, 자신이 경주의 어느 포교당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일부러 찾아 와서 조카 며느리의 손을 잡아 주면서 그 억울함을 인정해 주었다고 하네요. 그 이후로, 마침, 경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직을 하던 우리 큰오빠도  찾아 왔더라고 하지요.  그 별난 큰댁 아지매,그러니까 그 시어머니밑에서 설음 받고 크던 두 딸들을 홍대 앞 서교동에 살던 우리 언니 집에서 몰래 만나며 돈도 주곤 햇다는 건 나도 본 적이 잇어서 알지요.  자신이 그 공부 뒷바라지를 다 햇다고 하는데, 아무리 별난 아지매엿지만, 그래도 손녀들의 학비를 집나간 며느리가 대게 햇을까, 그건 좀 의문이지요. 아무튼, 그 두 딸들도 지금 강남에서 아주 잘 살고 있지만...

 

 

 

그 종부 스님은 우리에게 자기가 그 집을 꼭 중건하겟다고도 하더군요...곧죽어도 곁불은 안쬔다는 샌님 고집, 강고집이 과연 그렇게 하게 할까요?.택도 없는 소리지...그래도 어느 고집이 더 센 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그 종손 오빠의 동생들도 고시께나 패스해서 고위 공무원도 햇고, 더구나 본가와 양자간 집의 재산을 모두 물려 받아서 아무리 그 동안 종중 산을 많이 팔았다고 해도 예전만이야 물론 못하겠지만, 예전엔, 저 신동 지천 일대의 모든 산들이 다 강씨 소유이다시피 햇다지요, 아직도 남은 재산은 빵빵할 터인데... 다만 서울 사는 자식들이 신동까지 오르내리며 돌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며 돌아 왓습니다.

.. 

그 올캐도 기가 대단한 사람이긴 사람이지요. 강씨집에서 쫓겨나 친정으로 가 보았자 어디, 받아 줄 리가 없지요. 그 후로, 인도 스리랑카 등지를 돌아 다니며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 와서 작은 절들을 전전하다가 지금은 신라시대의 어느 다 쓰러져 가던 절을 엄청나게 큰 절로 중건해서 주지 스님으로 계시지요...그 기공식에 나도 가 보앗지만, 인물도 대단하고 그 기운이 주변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글어 가는 능력이 대단햇지요. 참석자들 앞에서 연설을 하며, 한진의 조중훈 사장이 그 절의 중건 비용을 대게 된 인연을 이야기하는데 아주 묘햇어요...중건을 위한 기도를 해오던 끝에 어느 날 굼에 어떤 도인이 나타나서 걱정 말고 나를 찾아 오라는 계시를 했더라지요. 조중훈 사장을 만나고 보니 바로 꿈에 본 그 모습이더라...참,  얼마 전에 그 종손 오빠가 살아 계신다는 소식을 그 형제들에게만 전해 왔는데, 그 스님은 그렇게도 섭섭해 하더니 지금까지 지내오던 제사를 그만 두고 이젠 생신을 기념하는 법문을 올린답니다. 그 두 딸들도 오랫동안 그 엄마를 인정치 않았는데, 이젠 종종 그 절에도 가고 자주 연락하며 살더군요....

 

강씨는 그렇게 사촌끼리 양자를 주고 받으면서 대를 이어 나가면서 축첩은 절대 금불이라는 가통을 지켜 오고 있지요. 하도 단명들 하여, 할아버지 형제들만 해도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용, 봉, 구, 린, 등의 장수하는 동물들의 이름들을 함자에 넣었고. 우리 아버지 형제들도 오래 사시라고, 철, 혁, 각, 규, 드의 같은 글자를 두 개씩 겹친 글짜들을 넣엇지요. 그 날, 재실을 관리해 주고 있는 고지기의 며느리가 열쇠를 내주며 종친회는 언제 하냐고 물엇는데, 아버지 제사를 지내려 큰동생네로 간 그 저녁에 나도 생전 처음으로 거기나 한 번 가 볼까, 했더니 큰동생 왈, 적손들은 거기 잘 나가지도 않고 서손들 중에 잘나가는 사람믈이나 나가서 떠들지, 별 재미도 없다나요...서손이라니? 첨실이 아니어도 후처의 자식들을 다 그렇게 부르지...그럼, 우리 두 동생들도 서손이란 말야? 에구, 참내...요새 세상에도 여전히 저런 소리나 하고 잇으면 우야노?...지금 저 생가의 본할매는 일찍 돌아 가셧고 육이오때 고관을 지냇다는 그 소생의 아재도 행방불명이 되셨고 후처인 생가 할매와 그 소생의 아재들만 저리 종중을 잘 지키고 있는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런 소릴 하나? .그건 그거고...

 

생가 할매는 정말, 보름달 같이 훤한 인물에 마음도 참 착하셧지요...가난한 집에서 어린 나이에 후처로 들어와서 나이가 더 많은 본처 소생의 두 딸들에게 설음도 많이 받으셧지요...강씨 딸들이 다 남존여비와 여필종부의 덕목에 묶여 짹소리 잘 못하는데, 유독 저 두 딸들과 행방불명된 큰아들의 외동딸만은 두 고모들과 조카끼리 돌똘 뭉쳐서 정말 대단하셧죠..ㅎㅎ.오죽하면, 울오빠들도 나 어릴 때부터, '너 저 아지매들처럼 설치고 치맛바람이나 날리면서 남편 머리 꼭대기에 올라 앉으면 안돼'라고 세뇌햇을까요...ㅎㅎ 생가의 아재들은 공부는 좀 못했지만 다들 너무 착햇지요...

 

 

 

좀 전에, 언니가 전화를 햇네요. 손녀 승은이가 며칠 전에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갔잖아요.  내 블로그에도 종종 들어 와서 호팻지 사진과 태오 사진을 즐겨 본다는 승은이에게 부탁해서 언니도 이번 여행 사진 좀 보라고 햇더니 보았나 봐요...짐안 이야기는 언니가 나보다는 더 잘 알지요. 그런 저런 이야기 끝에, 언니 왈, 앞글의 맨 위의 사진, 저 연못에 대한 설명에 아버지가 꾸신 꿈 이야기를 좀 덧붙이지 그?나고요...아버지 돌아 가시던 날 꾸신 꿈 이야기인데...맞다, 나도 그거 몇 줄 더 쓸 걸, 그랫다고 했지요....아예, 다음에, 그런 글이나 본글로 하나 더 써야겟어요...집안 이야기를 제대로 쓰기엔 난 역부족인 것 같고, 그건 제대로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써야지요.

 

그잖아도 어제 전화 온 큰집 순자 언니에게 그런 부탁을 햇지요. 시월, 저 동생네 혼사에 오면 아예 언니네 집에서 며칠 자고 가라 하네요..순자 언니는 4남 1녀의 외딸인데도 그저, 저 남존여비, 여필종부의 그 고루한 가통을 지키며 저 신동에서 나고 자라서 신동에서 교직도 하며 살아 와서, 무지 착하고 성실한 언니지요. 난 그 언니에 비하면 완전 엉터리지요...ㅎㅎ 얼마 전에 수필집도 한 권 내엇는데, 저 신동의 유년시절 이야기도 많이 들어 있지요...왜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갔냐고 섭섭해 하며 청도꿀 한 병과 어릴 적 내 영웅이엇던 큰집 셋째 오빠가 작곡한 가곡 테이프를 보내 주엇군요...테너 목소리가 꼭 옛날 저 재실 동산과 낙화담 절별 위에서 부르던 오빠들의 목소리 같아요. 이번 시월에 가면 그 오빠와 차도 한 잔 해야지.....

 

 아고, 고만 쓰자...괜히 또 주절주절...중언부언...집안 이야기를 제대로 다 알지도 못하는데도 끝이 없네요. 저것도 이번에 언니와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보완한 거랍니다. 쓰다 보니, 더 많은 이야기들을 지금 살아 계신 어른들이 돌아 가시기 전에 더 듣고 싶어졌어요. 옛날처럼 가첩이라는 것도 없어진 지 오래고...모르지요. 큰집 큰오빠가 그 많던 한서와 문집들을 다 없애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딘가에 그런 것도 보관하고 있을지...저번에 하트포트에 잠깐 들려서 90이 되신 큰고모님을 뵌 적이 잇는데, 딸과 함께 미시간으로 이사하셧다네요...언제 한 번 다시 뵐 수나 잇을런지...

 

그 고종언니는 방학마다 외갓집에 오면 저 오빠들의 노래를 그리도 좋아해서....아, 정말, 그 오랜 세월에도 아직도 못잊어 하는 내외종 간위, 곡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같은 이야기도 있엇지요...아, 갑자기, 생가 할매의 딸, 환이 아지매라도 보고 싶고 저 종부 스님의 두 딸들도 보고 싶네요. 나보다 위의 큰딸은 요즘 그림을 그린다고 하고 홍대 도예과를 다?던 작은 딸은 지금도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군요..모두 또래친구들처럼 이 집 저 집 몰려 다녔는데...,그 땐 난 촌수도 잘 몰라서 왜 그 딸들이 나더러 아지매라고 부르는지도 몰랏지요...ㅎㅎ  모두 지척에 살면서도 왜 이리 서로 못보고 지내는지...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전에, 마우스로 호작질했던 '내 고향 신동의 밤'이라는 그림...이 그림이 생각나서 저 수채화를 그렸다.... 

 

< 이 두 그림은 지난 글,  심장과 눈과 꿈과 교회가 있는 봄 풍경 2008. 04. 06.에서 가져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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