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침엔 몸이 유난히 피곤했지만 운동을 좀 하면 몸이 풀릴까 하고 골프 연습장엘 나갔다. 막 스트레칭을 끝내고 어드레스를 시작하려는데 가슴이 뻐근하고 손이 싸늘해지면서 저려 왔다. 로비로 나와 몇 번이고 소퐈에 누웠지만, 일어나기만 하면 눈앞이 캄캄하고 걸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부축해서 그 골프 연습장 바로 옆의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심장이 잘 안 뛴단다. 심전도가 40에 혈압이 60-80....눈앞이 캄캄해진 것은 심장의 폄프질이 잘 안되니 뇌로 피가 가지 않아서라고..혈압을 올리는 링거 한 병 맞힌 후 보호자를 부르란다. 큰 병원으로 가라고 검사결과와 함께 소견서를 써 준다. 그러면 내 심장이 약하다는 소리인가? 난 지금까지 누구보다 강심장인 줄 알았는데...대학시절, 스무 명의 학과생들 중에홍일점이면서도 남학생들이 내 동생들처럼 여겨졌던 나는 별명이 강통뼈가 아니었던가...ㅎㅎ 하긴, 그런 증세가 전에도 두어 번 있었지만 심장문제인 줄 몰랐었다.
한의사들이 맥이 약하다느니 부정맥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했지만 흘려 들었었다. 맥박 수가 얼마라는 수치를 말하지는 않았으니까...십년 전쯤, 팔꿈치 골절로 입원수술 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맥박은 잴 때마다 늘 70 이상이었고 혈압도 정상이었다. 하기는, 그 때도 수술 후에도 염증을 일으켜서 재수술을 하고도 염증이 낫지 않아서 두어 달, 그렇게 오래 입원햇던 것도 그러면 맥박이 잘 안뛰어서 혈류가 느려서 그래서였을 수도 있겠구나. 관절낭에 고인 피가 썩어서 온몸의 피가 썩는 패혈증까지 갔던 것이다. 그 때 의사는 개방골절도 아닌 환자가 재수술 후 염증이 생기는 확률은 만분의 일이고 고단위 항생제를 그렇게 써도 이렇게 오래 염증이 가라앉지 않는 환자는 또 만분의 일이라고 하며 자기로서는 이해할 수 업는 이런 경우를 당하면 의사를 그만 두고 싶을 정도로 절망한다고 했다. 나는 그 때 남의 이야기를 듣듯, 죽어 가고 있는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아, 참, 그리고, 의사한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제자 한 분이 부득부득 목사님 한 분을 모셔 와서 안수기도를 해주시고 간 날 저녁부터 고열이 9일 동안 계속되다가 홀연히 염증수치가 떨어져서 의사는 컴퓨터 오작동일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진짜였고 그 길로 퇴원했다. 잠시, 그 기도로 내가 구원 받았던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후로는 내가 면역이 너무 떨어져서 그렇다고 생각햇다
나는 어릴 때 편식이 심햇고 고열감기 끝에 '경기'를 가끔 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대문앞에 쓰러져 잇을 때도 잇었고, 엄마가 어느 할머니를 모셔다가 손가락을 바늘로 다 찔러 놓기도 햇다. 그래도 나는 학교를 너무 좋아 해서 담요를 쓰고 학교에 간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내 몸이 약하고 눈이 나쁘다는 이유로 학교일은 물론이고 숙제도 못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밤늦게 공부하지 못하도록 두꺼비집을 내려 놓기까지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 몰래 내 방문에 담요를 치고 촛불을 켜 놓고 숙제도 숙제였지만 도서관에서 거의 매일 한 권씩의 책을 빌려 와서 하루만에 다 읽기를 좋아 했다. 그러다 들켜서 아버지가 내 책가방을 마당에 내동댕이 친 적도 있었다. 그 외에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야단을 들은 적이 없는 범생이였던 나는 초등학교 삼천 명의 학생 중에 유일한 안경쟁이엿다. 그 당시는 웬만큼 눈이 나빠도 안경을 씌우는 일도 잘 없엇지만 아버지는 내가 서울로 대학을 오기 전까지 내 안경 렌즈를 6개월마다 꼭꼭 바꾸어 주시며 김과 비타민A와 간유구와 소간 등을 억지로 먹이셨다.
나는 어릴 적부터 밤눈이 나빴다. 그래도 대학시절만 해도 여름방학이면 대구로 내려가서 은하수 총총한 마당에서 별자리들을 헤며 칼국수를 먹고 노래를 부르던 기억이 생생한데 결혼하고 언젠가부터는 큰 별들만 겨우 보이기 시작했다. 40살 때까지는 그래도교정시력 1.0 이상을 유지했지만, 48세 때는 교정시력 0.7 이 되지 않아 시력표를 외워서 운전면허를 갱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력도 시력이지만 시야가 자꾸만 좁아졌다. 망막의 시세포가 주변부부터 망가지는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이 병이 그런 병이엇다. 그렇게 점점 시야가 좁아져서 터널 비젼이 되다가 영 시야가 소멸되면서 세상이 영 닫혀 버리는...그 병을 판정받은 것은 45세때쯤이엇지만, 나는 그러고도 십년쯤은 적어도 낮 동안에는 아무 불편을 모르고 생활했고 운전도 계속했다. 지금은 지하철 계단을 더듬다시피 하며 내려 가고 이정표 바로 앞에서도 출구 번호를 한참이나 보아야 하고 대리석이 번들거리는 곳엘 가면 무늬인지 실물인지를 잘 몰라서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다.
오늘은 토요일, 봄빛이 찬란한 명동에서 시이모님과 맏동서를 만나 칼국수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오후를 보냈다. 겨울 되기도 전부터 벼르던 만남이었다. 초록은 동색이라는 말 싫어하지만,시댁과 남편들 이야기할 때는 이보다 더 죽이 맞는 사람들이 또 있겠는가? 이모님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우리 두 사람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해 주시고 맞장구를 쳐 주신다. 내 회갑때 주시려고 일본에서 사 오셧던 핑크색 티셔스를 동서 몰래 미리 건네 주신다. 장미꽃 인생, 호사도 많고 고생도 많으셨던 이모늠을 처음 만난 곳도 바로 명동이었지만, 여든 둘에 돌아 가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여든 한 살 이모님의 주무대 역시 지금도 명동이다. 그 옛날, 이화여대 성악과 시절부터 다니셨으니, 대학시절에나 좀 어슬렁거렸던 나보다 골목골목 모르시는 데가 없다. 저녁 때가 다 되어 가니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넘쳐 나는 인파 속을 뚫고 걷기가 나는 매우 힘들다. 다음엔 이 곳을 혼자 찾아 올 수 잇을 것 같지가 않다.
묘한 것은, 그 날 아침, 운동하러 나가기 직전에 둘째 동생댁이 전화했던 일이다. 엄마가 꿈에 나타나서 둘째 시누이인 내가 지금 많이 힘들다고 좀 챙겨 주라고 했다며 형님한테 무슨 일 있느냐고... 자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나, 의아해서 전화 했단다. 하하 웃으며, 엄마가 또 내 눈 때문에 불상하다고 하더냐고 햇지만, 내 눈 걱정을 하며 눈물 글썽이곤 하시던 생시의 모습과 마지막, 그 평안해진 얼굴로 햇살이 가득 비치는 복도 저 끝, 영안실로 가던 모습이 또 떠오른다...나를 포함해서 등등한 다섯 전처 소생의 자식들을 말없이 다 잘 수발하고 아버지가 못다 돌보신 엄마 소생의 두 동생들을을 혼자서 다 뒷바라지 하시느라고 평생을 억척으로 일만 하시다가 조금 편안해질 만하셧을 때 돌아가신 엄마, 학교 때는 공부만 하는 딸로 공주처럼 키우고 결혼 후에도 이십 년을 내 곁에서 사시면서 궂은 일 다 하시며 나를 도와 준 엄마....
그러고 보니, 작은 오빠의 올캐가 죽을 무렵 내가 꾸었던 꿈이 생각난다. 고가도로 위를 형제들이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고 있었는데 그 끝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올캐만 혼자 내려 오두막집이 하나 있는 곳으로 뒤도 안 돌아 보고 걸어 가는데 그 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마중 나오며 따뜻한 눈빛으로 맞으시고 우리는 오른쪽으로 돌아 다른 곳으로 달려 가던 꿈... 아버지는 올캐를 반가이 맞으셨고 엄마는 나를 잘 챙겨 주라고 부탁하셨다니, 나는 죽을 꿈은 아닌 것일까? 엄마는 나를 낳으셨던 엄마와 함께고향의 아버지 묘소 곁에 누워 계신다. 그리고 내 꿈에 보이던 그 오두막집은 바로 그 시골 할머니댁이었던 것이, 얼마 전에 이제는 거의 폐가가 되어 있는 그 집엘 가 보았을 때, 꿈에 보았던 그 고가도로와 닮은 고속철이 그 앞을 지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난 정초엔 이런 꿈도 꾸었었다. 뉴질랜드라나, 어느 해변, 햇살이 밝은 창호지문 바깥에는 파도가 철썩거리고 밝고 깨끗한 벽면에 아름다운 파도의 그림이 걸려 있는 오두막집에 나는 살고 있었다. 파스텔조의 붉고 푸른 겹겹의 파도가 테두리를 번쩍이며 산봉우리처럼 우뚝 우뚝 솟아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침, 그러나, 점점 그 파도가 거세어지면서. 금방 문안으로 넘쳐 들어 올 것만 같다. 아이들을 깨워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어 옮기다가 급히 화장실에 간다. 노천 화장실...앞에서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 오고 있다. .긴 치마로 적당히 가리고 앉아서 일을 보려는데 수녀 한 분이 걱정스레 누군가와 어떤 아이의 비행에 대해 이야기하며 내려 온다. 수녀님, 그보다도 짐부터 옮겨야 해요. 빙 둘러 선 사람들과 수녀님의 마지막 동의를 얻고 방 안으로 들어 온다. 방 한가득 햇살이 넘치면서 수녀님의 하얀 옷이 눈부시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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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마우스로 호작질했던 '내 고향 신동의 밤'이라는 그림...이 그림이 생각나서 저 수채화를 그렸다....
조금 전엔, 지난 주일에 처음으로 나갔던 동네 교회 선교사가 전화를 했다. 그래요. 내일도 나갈 거예요...나는 천천히 봄볕을 즐기며 교회로 걸어 가리라. 아기 입숙만큼 벙그러지고 있던 목련이 다 피었을 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엔 친구들 따라 가기도 했고, 미국에서는 한국인 사회의 친교 목적으로 가기도 햇지만 순전히 종교 자체를 위해서는 처음으로 가 본 교회였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가리라 한 지가 수 십년, 길거리에서 만난 스물 네살 짜리 아가씨 모르몬교 선교사를 따라 선뜻 교회로 들어설 줄은 나도 몰랐다. 우선 그 사람들과 성경과 모르몬경을 공부를 좀 해 볼 양이다. 교리에 좀 무리가 있은 들, 교인들의 행테에 좀 못마땅한 데가 있은 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갈고 닦으며 가꾸어 가고자 하는 삶의 길을 나도 따라가 보리라. 그게 성당이든, 절이든, 교회이든 무슨 상관이랴. 나는 그들의 순수한 눈빛과 경건한 몸가짐이 좋다. 그저 밥을 먹듯 편안한 방식으로, 자장가를 듣듯 평온한 마음으로 삶을 사랑하였던 이들의 뒤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따라가 보리라. 징장구를 나무라기 전에, 내 게으름이나 더 문제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보리라....
월요일이면 심장 검사가 시작된다. 시술이니 수술이니, 그런 건 필요없고, 그저, 약이나 좀 먹으라고 하면 좋겠다. 심장펌프질이 잘 뒤게 되면 눈도 좋아질지 모르지...그래, 의사가 뭐라고 해도 나는 조심 조심, 그러나 편안한 마음으로 내가 가던 길을 갈 수 있을 때까지 갈 것이다. 요즘 이것 저것 배우는 것도, 그런 것이다. 지금 와서 무엇이 되고자 함은 물론 아니고 그저 시간이 되고 기회가 닿으면 언제고 해 보고 싶던 일을 해 보는 것일 뿐이다. 지척에 있는 시각 장애인 복지관 자체 프로그램이거나 거기서 지원해 주거나 연계된 것들이어서 비용도 그다지 많이 들지 않고. 그저, 내 체력과 관심이 이끄는대로 따라 가면 되는 일이다. 이런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가? 이만큼 시간이 많고 여유로워졌을 때, 나는 우선, 이런 배움들로 나를 달래고 비우고 채울 일이다. 그리고 더 나갈 수 있다면, 언젠가, 무엇인가로, 다른 이들을 위해 나누고 봉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