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아들이 워싱턴으로 돌아갈 때 앞으로 뭐 할 거니? 물어 보니 이제 가서 알아 보려구요...이런다. International Relations를 공부하러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일단 기업체의 이윤추구를 위해 봉사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던 아이었다. 고교때 수학 세계대회에서 일등을 하고 그 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동생이 다닌 하바드 같은 대중적인 학교와는 비교도 안되게 귀족적인 동부의 명문 사립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고는,서부의 캘리포니아로 가서 가난한 히스패닉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3년을 푹 빠져서 보냈던 아이이다. 점점 비주류 저층민에게만 관심을 가지면서 주류사회로의 진출의 길과는 멀어져 가는 아이가 하도 답답해서 내 친구 부부는 모국의 문화와 세상물정도 좀 배우라고 떠밀다시피 아이를 한국에 보낸 것이었다.
어쩌다 아직 그 아이의 석사논문을 받지 못하였지만, 아마, Second Generation Korean-American in Korea...이런 제목으로 논문을 썼다기에 나는 딱 한 가지만 물어 보았다. Philosophical or survey? 그럴 줄 알았다. 조사연구는 아니고 철학적 에쎄이엿다. 나는 늘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말수가 적은 이 키다리 천재를 보면 비트겐시타인이 생각나곤 한다. 유럽 유수의 대부호였지만 다 뿌리치고 오스트리아의 어느 촌구석에 들어 가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며 은거햇던...거기서 돌아 오면서부터는 그 이전의 그 확고햇던 논리실증주의를 스스로 뒤짚고 일상언어주의적 의미분석으로 돌아섰던 분석철학의 대부...그 아이가 한국에 있을 동안, 대구에서 서울로 오르내리며 그 엄마보다 더 자상하게 아이를 노심초사 돌봐 온 그 이모 말로는 문장이 놀랍도록 논리정연하면서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뇌와 갈등이 가득 깔려 있더란다.
백인 동창 의대생과 결혼하여 벌써 아들까지 낳은 활발한 성격의 동생에 비해, 수줍음이 많은 이 아이는 내 친구 중에 제일 명민하고 감수성이 예민하면서도 나처럼 쓸데없이 잘 나대지 않고 내 뒤에 숨기만 잘 하던 제 엄마를 꼭 닮앗다. 한국문화를 좀 알 만한 나이 다섯 살 때 겪은 문화충격도 갓난쟁이때 갔던 동생보다 조금 더 했으리라...그래도, 부모나 이모는 공부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국제관계의 일에 종사하게 되기를 은근히 바랐던 터라, 저렇게 막연히 돌아 가는 것이 못내 불안한 모양이다. 그래, 넌 천상, '공부무끼'야. 무끼라는 말 알아? 몰라요...2년 동안 국제관에서 지내면서 공부는 영어로만 하고 한국말은 이제 겨우 일상언어만 웬만큼 터득하게 된 아이가 그런 말까지 알 리가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어감으로 알아 들었는지 예 하며 눈을 빛내면서 또 그렇게 잔잔히 웃는다. 어깨를 툭툭 쳐 주며, 천천히 생각해 보고 공부해. Sociology 할 거라면서? 잘 생각했어...너아말로 능력도 관심도 학문 쪽이지...
아이가 잘 도착햇다며 전화한 친구는 공부무끼는 무슨 공부무끼, 그냥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이고 게으를 뿐이지...이런다...그럴까? 그래...비트겐시타인도 그 머그잔에 물만 부으면 커피 한 잔이 그냥 우러나올 정도로 컵을 안씻었다지...그러고 보니 내가 건방지게도 그 이빨도 잘 안들어 가는 비트겐스타인으로 대학 졸업논문을 쓰던 대학졸업 무렵이 생각난다. 그 친구는 서강대 앞에서자취를 했는데,나도 그게 부러워서 언니네 집을 나와 학교앞에 조그만 자취방 하나를 얻었었다. 우리는 두 캐퍼스를 오가며 중학교때부터의 단짝의 우정을 이어 갔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아들 둘씩만 낳았으며, 각자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공부를 다 끝내지 못했고 친구는 미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그럭저럭 살고 있으니 이제 우정이라는 것도 마음뿐이지, 추억속에서나 맴을 돌면서 현실적인 삶에서의 공감대는 잘 이루지 못하곤 한다.
하긴, 너나 나나, 뭐 그리 공부에 열심이었나마는, 잔소리 말고 이제 더 이상 공부길로 가겠다는 아이한테 회사에 취직하라고 하지는 마. 너네가 돈이 없어서 뒤를 못댈 것도 아니고, 이제, 지가 장학금도 다 알아 볼 테지.. 어쨌건, 나 같은 가난뱅이도 자식이 공부한다면 못말리겠더만...그나 저나, 넌 옛날에 언어학 할 때 전공이 뭐였니? 막내가 의미론을 공부하겠단다. 그거, 언어학 중에서도 제일 하드 코어 아냐? 뭐, 곡 그렇지도 않지. 아, 그래? 하기사...난 세상에 너 같은 아이도 그걸 끝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쟤가 그걸 해낼까 싶지도 않아서 그러지...너도 집안일 하랴, 돈 벌랴, 제대로 공부할 수도 없었잖니..아니지, 나도 순전히 게을러서 그랬지...,, 공감대는 이루어졌는지, 말았는지, 우리의 전화는 거기서 또 끝났고 언제 다시 이어질 지 기약이 없다.
막내는 요즘 한창 공부에 열이 올랐다. 처음으로 하는 조교 노릇에도 열심이다. 학부때 듣지도 않았던 의미론 과목을 청강까지 하면서 교수님이 매주 20개씩 내 주는 퀴즈 테스트를 채점하는 일도 벅차면서도 재미가 잇는 모양이다. 무엇이든 정오답이 분명하고 흑백론적이어서 걱정이더니 처음으로 언어의 의미의 다양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귀엽기도 하다...Answers may differ...교수님이 채점 크멘트를 써 주셧지만 막상 점수를 어떻게 주어야 할 지 모르겟다며 밤새 심각한 얼굴로 왓다갓다 하기도 한다. ..visiting relatives may be boring...이 문장이 왜 ambiguous하지? 손님이 지겨울 때가 잇다는 게, 자기 탓인지, 손님 탓인지 명백하지가 않아서 아닐까? 아, 참 글쿠나...그래, 그러니까 그저 최선을 다해 채점할 뿐이지.뭐, 완벽할 수야 있겠어? 교수님도 그럴 걸 알고 너한테 맡기는 거야...그러면서 네가 공부하기를 바라시는 거지...사전도 찾아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가 좋아서 나는 또 덧붙인다. 야, 넌 좋겠다. 부럽네...그런 좋은 공부를 하다니... 밥만 굶지 않으면, 자신이 제일 좋아 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게 가장 큰 행복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과연, 저 아이가 앞으로 저 공부를 해나가려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을까, 속으로는 여전히 걱정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부부는 저 아이가 진학하기를 은근히 바란 것도 부정하지 못하겠다. 자식이 공부하겟다면 못말리겟더라고 한 말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부부가 다 막내가 진학하기를 은근히 더 바랐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라고 해야 한다. 지난 여름 졸업 무렵만 해도, 어느 선배의 추천으로 덜컥 어느 작은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일단 말렸고, 경영학과에 시험이라도 한 번 봐 보라고 부추겼다가 낙방하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우리가 들쑤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아이는 그다지 실마하지도 않고 기다렷다는 듯, 대학원을 가더라도 좀 실용적인 영어학을 해서 계속 공부를 하든지, 취직을 하더라도 좀더 나은 조건으로 하겠다고 했고 우리도 찬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작 입학 후에 진학을 권유햇던 그 실용영어 쪽의 교수의 방에는 아직 다른 선배가 있어서 저 의미론 교수의 방으로 조교발령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정말 잘 되었구나.그거 진짜 좋은 학문이야... 하고 얼른 반색을 햇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갈수록 자식의 앞길에 대해 조언을 하고 간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겠다. 저러다가 정말 나중에 아무 것도 안되는 것 아닐까, 지금은 저렇게 재미있어 하지만, 나중엔 결국 한계에 부딪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는 것이다. 친구가 그 아들을 한국으로 보낸 것도 그런 불안 때문이었으리라. 짐작이지만, 그 아이가 사회철학을 공부하게 된다면 결국 그 친구의 간여가 그만큼이라도 먹혀 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그 아이나 우리 막내나, 자신이 택한 길을 얼마나 좋아 하며 살아갈 지, 지겨워 하게 될 지, 혹은 또 다른 길을 가게 될 지...결국, 저 손님의 방문이 즐거울 지, 지겨울 지가 어느 한 쪽의 탓만이 아닐 수 있듯, 그 길 탓만도, 본인 탓만도 아닌 헤아릴 수 없는 온갖 변인들이 함께 엉겨서 요동치며 흘러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려니.., 그러니, 삶의 물살이 우리에게 다가 올 때마다 조붓이 고개 숙이고 그 물살을 즐기며 서핑하는 수 밖에...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순간마다 피어 오르는 저 봄의 기운처럼 생동하는 젊음이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병약하고 자주 쓸쓸할 지라도, 그런 절음을 바라보며 함께 염려하고 희망하면서 삶을 반추하는 이 늙음도 그것이 있는 그 만큼, 그 자체로서 역시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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