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둘째 시누이네 혼사가 잇어서 저 그리운 고향, 대구로 내려 갔다. 시이모님을 모시고 가는 이종사촌 동생의 편한 차에 우리 부부가 동승을 했는데 어찌나 일찍 도착햇던지 결혼식 전에 그 옛날 40년 전, 시어머니가 근무하시던 제일여중 교문 건너편, 시이모님이 우동장사를 하시던 가게와 그 안쪽 골목에 있었던 시댁이 있던 곳을 찾아 보기로 했다. 이모님도 이종사촌도, 그 이종사촌들과 그 골목을 뛰놀던 남편도 기억이 가물가물해 하였지만 지금은 인쇄소로 변한 큰길 가의 그 가게는 쉽게 찾을 수 있었고 3년 전에 이사 왓다는 인심좋은 인쇄소 주인도 내부까지 보여 주며 매우 친절하였다...방학이라, 학교는 조용하엿지만 학생들이 골목 가득 몰려 나와 젊고 예쁜 아줌마의 우동가게로 왁자지껄 들어서는 모습이 떠오르는 듯, 나도 골목을 오르내리며 덩다라 없는 추억에 잠겼다. 그 가게의 안쪽 골목으로 들어 서면 여러 채의 적산가옥들이 있었고 그 두 번째 골목의 두 번째 집이 시댁이었단다. 서까래가 촘촘한 높은 처마 끝이 약간 들리고 뒤꼍의 벽에 가로 세로 속기둥이 세워진 사이로 하얗게 칠해진 벽...단장만 새로 했을 뿐 일본식 주택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잇는 그 때 그 집을 찾아 내고는 모두 감회에 젖었다.
그 동안 익히 들었던 이야기들, 경사가 좀 급한 골목이어서 비가 많이 올 때는 똥덩어리가 둥둥 떠 있는 하수구가 넘치곤 하여 바지 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들어가 퍼내곤 하였다던 남편의 이야기, 어느 때는 일하는 사람이 나가 버려서 노심초사하며 학교에서 돌아 오면 어린 둘째 시누이가 그 하수구를 흐르는 물을 고무신으로 퍼먹으면서 혼자 앉아 놀다가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 보더라는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지금은 말쑥하게 포장되어 있는 골목 안에 아직도 어려 잇었다. 교원노조를 이끄셨던 일로 5.16 직후 사형 구형을 받았으나, 제자들의 탄원으로 무기형 선고를 받고 결국 10년을 감옥에서 보내셨던 아버님 옥바라지를 하며 혼자서 교직을 지키며 그 짐에서 아이들을 키우시던 어머니..좌천되엇던 아포 중학교까지 통근하시던 시절, 아이들은 저녁이면 거기서 한참 떨어진 대구역까지 걸어서 어머니 마중을 나가곤 했는데 그 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돌오돌 떨며 다녔던 둘째 시누이...환경미화 작업으로 기차를 놓치고는 교장 사택에서 주무셔야 했던 어느 날은 그 딸을 생각하며 밤새도록 우셧다던 어머니..그 시누이가 이번에 둘째 딸을 시집보낸 것이다...
멀리, 그 우동가게가 보이는 골목
이모님은 해방 당시 3대 재벌이었던, 이승만 정부보다더 많은 달러를 가지고 개성의 방직공장을 정리하고 서울 본사로 내려 왓다던 삼흥실업 서선화 집안으로 시집 갔었다. 그러나,, 김구, 장면, 등 야당만 지원했던 그 재벌이 자유당과 손을 잡은 이병철에 밀려서 망해버린 후, 이모님은 트렁크에 한가득 돈을 담아 그 분들에게 전달하는 심부름이나 하며 백수로 지냈던 이모부님과 함께 대구의 언니 형부 곁으로 무작정 내려 오셨단다. 집안 어른들의 결정대로만 시집 가야 했던 어머니와 달리, 십년 아래인 발랄하고 미모가 빼어났던 이모님은 해방 후의 이화여대 성악과를 다니며 서북 청년회를 드나들며 일을 거들었는데 그 때 만난 이모부의 끈질긴 구애에 졸업도 못하고 결혼을 했었다. 언니가 얻어 준 그 가게 단칸방에 다섯 자식들을 오골오골 모아 놓고 팔을 걷어 부치고 우동을 팔았던 이모님과 달리, 만고강산 무골호인으로 착하기만 하고 무능하였던 이모부님은 어머니의 다섯 자식을 보기만 하면 우동을 퍼 주고는 하였다...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그 곳에서 돌아 가셔서 가게 앞길에서 장례를 지냈다는 그 골목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이모부님이 돌아 가신 후 이모님은 그 우둥가게를 접고 서울로 다시 올라와 금호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미제물건 장사로 연명하셨다. 아버님 때문에 시골로 좌천이 되셨어도 아이들 학교를 대구 시내에서 계속 다니게 하기 위해 그 집에서 내내 통근하시면서 밤새 만든 뜨게질 작품들과 장갑들을 수예점에 내다 팔아서 아버님 옥바라지 하신 어머니의 고생이 오죽하엿으랴. 남편의 이야기도 눈물겹다. 장학금 준다는 바람에 마도로스가 되어도 좋겟다고 생각하고 갓던 부산의 수산대학을 3년이나 다니다가 그만 두고 공부길로 돌아 가겠다고 대입시험 치러 무작정 상경하여 금호동 이모님댁을 찾았을 때 이모님은 당신의 자식들에게 줄 밥도 없어도 늘 조카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 주었고 대학에 합격한 조카는 알바이트로 번 돈을 이종사촌들에게 갖다 주곤 했단다.
골목 밖 큰 도로 건너편에 향교가 보이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우리는 그 골목 건너편의 향교를 돌아 내가 다녔던 경북여고에도 잠시 들렸다. 근 30년 만에 가 본 모교는 옛색을 거의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먹고도 모자라 매점에서 산 빵을 먹으며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하던 그 큰 히말랴야 시타 나무 그늘 정원도 많이 없어지고 체육시간에는 하얀 체욱복 차림으로 선머스마들처럼 올라가 앉곤 하던 느티나무도 안 보이고...운동장 뒷편에 별로 볼품 없이 혼자 삐죽이 서 있던 향나무 한 그루만 이제는 아주 멋있고 우아하게 커서 빈 운동장을 말없이 바라 보고 서 있었다..강당을 비롯한 낯선 건물이 보이고 마스게임을 하던 운동장엔 붉은 트랙이 그어져 잇고 코스모스 만발하던 가장자리는 모두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교문 양쪽의 향나무와 테니스 코트, 우리가 전통몌법과 요리를 배우던 생활관이 그대로 보였지만 어쩐지 낯이 설어 들어가 볼 엄두를 못내었다...
아, 내가 어느 교실에 잇었더라....?
조그맣던 그 나무가 저렇게 컸나...왼쪽은 이종 막내 동생
결혼식은 성대했고 신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신랑도 예쁘고 귀여운 참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신혼여행을 떠나 보내고 시누이는 함이 왔을 때 시가 쪽 손님들을 접대햇으니 이번엔 친정 쪽 손님들을 초대한다며 형재들을 모두 모았다. 시누이의 시어머니는 사돈 식구들을 접대하면서 아들 며느리 자랑에 의사부부와 법조인 부부로 이제는 다 제 갈 길 단단히 잡고 가게 된 손녀들 자랑이 끝이 없다. 그래, 그럴 만도 하지....다섯 자식이 모두 의지가 굳고 강인한 성격들이지만 둘째 시누이는 특히 심지가 굳어서 기도할 일이 잇을 때마다 백일 동안 삼천배를 해내었고 마음 바르고 모든 일에 성실한 남편의 내조는 물론이고 간염이 있던 남편의 건강도 철저한 식이요법과 병원치료로 회복시키고 시댁과 친정을 두루 돌보면서 두 딸의 공부 뒷바라지도 어찌나 잘 해내엇는지 그야말로 현모양처의 전형이지 않은가.
고향친구들을 만나러 나간 남편을 놓아 두고 나만 혼자서 이종사촌의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 오는 길, 나는 차 속에서 이모님께 일본어를 자꾸 물었다 .이모님은 신이 나서 가르쳐 주셧다. 이모님은 일본어 관광 가이드 시험에 합격하여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 금호동의 가난을 벗어 나게 되셨다. 한 가지 웃지 못할 일은 그 시험장에서 남편이 이모님 바로 뒤에 앉아서 국사 시험지에 이모님의 이름을 대신 써서 제출했다는 일이다 어머니와 세 시누이들도 그렇지만, 이모님은 참 감성이 풍부하고 티없이 밝으신 분이다. 늘 유모어가 넘쳐서 좌중을 웃기신다. 옛날의 그 고생하던 이야기도 언제나 까르르 까르르 웃으며 하시는데 그 시험 이야기에도 온식구들이 다 배꼽을 잡는다. 남편이야말로 그 지지리도 힘들었던 가난을 벗어나게 해 준 은인이라시며 늘 고마워 하신다. 한국관광 붐을 타고 가이드 수요가 폭증했던 시절, 필기시험이야 그렇게 허술하게 치러졌고 남편은 학교에서 커닝하는 기분으로 장난스레 도와 드렸지만 아마도 이모의 그 미모와 재치와 열성은 어느 가이드보다 훌륭했으리라 생각한다.
이모님....에이, 좀 웃으시지...ㅎ
세 시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남편 역시 이모님을 무척 좋아 한다. 만나기만 하면 까르르 가르르, 이박삼일을 놀아도 지칠 줄을 모른다. 남편은 저 제일여중 앞 골목에서 십 여년을 같이 자라면서도 학교에도 못가고 대도극장 앞에서 구두닦이를 해야 했던 저 큰이종을 특히 좋아 한다. 그 화끈하면서도 착한 성품이 자기와 똑 같다며...그래도 든든한 일본유학의 학력 덕분으로 피난 내려 와서도 교직을 회복하셨던 부모님 덕분으로 그럭 저럭 다 대학에 다닌 이 집 형제들과 달리 이모네 아이들은 거의 다 중학교를 겨우 마친 정도였다. 큰아들은 서울 금호동 시절의 골목친구와 둘도 없는 우정을 지키며 사업을 같이 해왔고 지금은 영화도 찍고 드라마도 제작하는 회사를 독립운영하고 있다. 어머님이 살아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 하실까? 이모님은 그 지독히도 근검절약하시면서도 누구 못지 않은 멋쟁이셨던 어머니에게 너무 헤푸다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구박도 많이 받아 원망도 많앗지만 좋은 일만 있으면 언니 생각을 하며 눈시울을 붉히신다.
돌아 와서 나는 또 저 새로 편성된 교실을 찾아 복도를 헤매고 다니는 학교시절의 꿈을 꾸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것 같은데, 웬 6학년 2반인가 하는 교실에서 아, 여기다 하며 들어가 보니 물청소까지 된 깨끗한 교실에 친구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다들 수원에서 할 무슨 연수회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들으러 강당으로 갔단다. 내 자리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는데 책상 속은 온통 잡동사니들이 한가득이고 어느 곳은 내가 채점해 놓고 돌려 주지 않은 오래 전의 학생들의 레포트들이 주르르 흘러 내리는데 내 책상 같지는 않다.. 친구들은 몰려 와서 앉기 시작하는데 나는 여전히 내 자리를 못찾아 허둥대다가 꿈을 깼다..나는 왜 아직도 이런 꿈을 꿀까? 연말연시 어수선하고 바쁘던 중에 당일치기로 다녀 온 여행끝에 얻은 감기 탓도 있고 늘 그랫듯이 대구 바닥 어디에고 다 서려 있는 내 어린시절의 추억을 뒤꼭지로만 느끼며 그냥 돌아 온 아쉬움 탓도 있을 것이지만, 아마도, 저 시절의 불안과 초조의 그늘을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음이 더 클 것 같다. 스스로 애틋해지기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반갑기도 한 부분이다. 인생은 우리의 영혼이 다 마르기 전가지는 늘 불안한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아 한 줄기 강물처럼 흐르거나, 모든 역사가 그렇듯, 그 강물을 연어처럼 오르내리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우리 막내 시누이...
우리 둘째 시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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