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지식의 차원을 셋으로 구분하는 시도를 해온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들이 그렇게 결정했다기보다, 그렇게 발견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첫 단계는 “물리적”, 두 번째는 “논리적”, 세 번째는 “윤리적” 지식의 단계로서, 이들 각각에 대한 라틴어는 “자연적”, “합리적”, “도덕적” 지식이라고 흔히 부른다. 나는 이에 대해서, 나의 여덟 번째 책, 「신의 도시」 ⅷ, 4ff.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최초로 생각하고 이를 규정했던 사람은 플라톤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철학자들의 지식의 3차원성에 대한 생각이 반드시 神의 삼위일체성과 연관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플라톤은, 신은 모든 자연의 창조주이자 지성의 施與者로서, 사랑의 등불로 행복한 삶을 밝혀주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철학자들은 사물의 본질, 진리탐구의 방법, 그리고 모든 행위의 지표로서의 善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심은 이 세 가지의 중요한 문제에 쏟아져 온 것이 사실이다. 자연 속에는 어떤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 지식에는 그 방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삶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匠人들이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성, 교육, 실천의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천성은 타고난 능력, 교육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 그리고 실천은 그 열매, 즉 결과가 무엇인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열매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만큼 향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따라, 그리고 실천이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사용가치가 있는지에 따라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지지 않고 그 자체로서 우리를 기쁘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향수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 자체를 넘어서서 다른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향수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현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것들을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금전을 얻기 위해 신을 사용하고 있는 저 희안한 사람들을 닮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신을 위해 금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금전을 얻기 위해 신에게 경배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열매를 사용하고, 그 사용을 향수하고 있다. 현세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사용하고 있는 저 모든 “들판의 열매”라는 것들은, 그러고 보면 문자 그대로 정확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천성, 교육, 실천이라는 세 가지 요소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용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철학자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행복한 삶을 위한 지식의 3차원이라는 것을 끌어내었다. 자연에 대해서는 자연철학, 교육에 대해서는 인식론, 그리고 실천에 대해서는 도덕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 우리의 천성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혜까지 만들어 내어서 아예 교육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도록, 즉,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혜를 배워야만 하지 않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의 진정한 사랑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우리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가 행복한 삶을 향수하는 데 더 이상 다른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천성은 신이 만든 것이었으므로, 우리가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신이 있어야 했다. 또한 행복을 위해서도 역시, 우리에게 내면의 사랑을 불어넣어 줄 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5)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향수할 수 있는가를 묻는 사람은 바로 “최고선이란 무엇인가?” 즉, “타락하고 무분별한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은, 확고부동한 진리에 입각해서 보았을 때, 가장 확실한 최고선이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최고선은 우리의 신체와 마음, 그리고 神 가운데 어느 한 곳, 또는 그 세 가지에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최고선, 혹은, 그 한 조각이라도, 우리의 신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면, 남은 가능성은 인간의 마음, 신, 아니면 그 두 가지 모두에 있다고 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신체에 대한 모든 것이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도대체 神 이외에 어느 곳에서, 인간이 최고선을 찾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善도 善 나름이겠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선이라 할 때, 그것은 모든 선이 그 준거로 삼고 있는 그런 선이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대상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향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최고선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이상으로 우리가 추구할 것이 아무 것도 없고, 그것이 준거로 삼아야 할 것이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것이다. 그 안에 욕망의 휴식처가 있고, 그 안에, 다른 열매를 따게 되는 안식과 의지가 충족되는 평안이 함께 깃들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음의 善이 신체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신체의 善을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말하는 最高善 또는 그 일부라도 신체 안에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이, 마음이 신체보다 우월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삶 또는 그 일부를 부여해 주는 존재가 그것을 부여받는 존재보다 우월하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신체가 병들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육체적 쾌락의 달콤함에 눈이 어두워져 있다. 완전한 신체적 건강은 영혼불멸의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신은 우리 영혼에게, 성자들에게나 약속되었던 그런 행복이 때가 되면 우리 천성의 하부, 즉, 신체부분을 통해서도 넘쳐 흘러들어 올 수 있도록 크나큰 힘을 부여해 주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기고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행복의 수준이 아니라, 온전한 건강, 다시 말해서 불멸의 원기인 것이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환상을 만족시켜 주는 견해만 옳다고 끝도 없이 싸운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최고선을 신체에 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질서한 육체적 관심을 대중들에게 불러 일으킨다. 그런 사람들 중에 에피큐러스 학파(Epicureans)는 무지한 대중들 속에서 가장 큰 권위를 누렸다.
마음이 행복할 때에는 마음 속에 어떤 좋은 것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의 마음이 불행해지는 데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렇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최고선, 즉,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 오는 선, 또는 그 한 부분이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인가를 묻지도 않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어떤 좋은 것 때문에 우리가 그 좋은 것을 즐기고 있다는 식으로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의 마음은 오만해진다. 그러나 만약, (우리의) 마음이 그 자신이 곧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우리의 행복은 마음이 어리석음으로부터 지혜로움으로 달라진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동시에 지혜로움이라는 것은 불변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마음은 곧바로, 지혜가 마음 전체의 본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 틀림없다.
마음은 또한 자신이 지혜와 함께 하고 그 지혜로 인해 계명되는 것이 자기 혼자서만 있는 상태보다 더 풍부하고 확실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은 오만을 버리고, 자만심을 가라앉혀 신에게 매달리면서, 그 불변하는 신에 의해 재창조되고 개조되고자 할 것이다. 마음은 이제, 신이야말로, 지금까지 신체적 감각이나 지적인 능력을 통해서 자신이 접할 수 있었던 세상의 모든 것들의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은 또한 신이야말로,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실제로 인식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 형식(Form)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무형식의 존재라는 것, 즉, 형식을 인식하는 능력의 창조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은 자신이,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과의 만남을 소홀하게 하면 할수록, 점점 그 안정성을 잃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마음은 이제, 신은 불변하는 존재로서 더 커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따라서 신에게 더 완전하게 매달리는 것이 그 자체로서 더 훌륭한 변화인 반면에, 신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나가면 나갈수록, 그것은 잘못된 변화라는 것, 즉, 신은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는 모든 것은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완전한 파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모든 것은 원래의 그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 아닌 정도만큼의 파멸이 온다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다.
이 때문에 마음은, 어떤 것이 타락되기 쉽거나 실제로 타락되는 이유는, 그것이 원래 무(無)에서 만들어졌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全一的인 우주 속에서 그 속성, 지속성, 혹은 불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모든 물상들의 位相은 모두 신의 善性과 全能性과의 관계 속에서 그 자리가 매겨진다. 그것은 신은 완전한 창조주로서, 단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었을 뿐 아니라, 위대한 유(有)를 창조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원죄, 즉 최초의 타락은 진실로 위대한 신의 능력을 기뻐하는 대신에 그 자신의 능력, 즉 유(有)를 기뻐하는 데서 온 것이다.
인간의 최고선을 신체에 두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의 중요성을 생각해 내고 최고선은 마음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최고선은 순수이성의 작용이라고 할 때보다 최고선을 더 낮은 위치에 두게 된다. 그렇게 생각했던 희랍 철학자들 중에서, 스토아 학파는 그 수에서나 논의의 세련 정도에서나 최고 수준에까지 도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물질적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물질로부터 마음을 분리시켰다고 하기보다도, 단지 육체로부터 마음을 분리시켰을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최고선, 유일한 善이란 결국 신을 향수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세상 만물이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말했던 사람들은 바로 플라톤주의자들이었다. 근거가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의무가 스토아 학파를 비판하고, 특히 에피큐러스 학파를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학문주의자들이, 바로 플라톤주의자들과 그 계파를 이어왔던 사람들과 거의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졌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거의 동일한 학파였다.
아르세실라스(Arsesilas)는 자기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는 않으면서 오로지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러스 학파에 대한 비판에만 열중했던 사람이었다는데, 그 선조가 누구였는가를 묻는다면, 폴레몬(Polemon)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폴레몬 위에는 또 누구였는가 하면,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였다. 크세노크라테스는 바로 플라톤의 제자로서,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이 후계자로 지명했던 사람이었다.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러스 학파의 서로 상반된 견해들의 대표자들은 일단 접어두고, 최고선 그 자체에 대한 문제만 놓고 볼 때, 그 둘은 서로의 오류끼리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최고선이 신체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이 두 오류는 결국 신을 최고선으로 보는 진정한 理性에 상반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들이 理性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학습한 것의 오류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지 못하는 한, 그것은 아직도 진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두 가지 견해의 지지자들이 해온 행동을 볼 때, 그들은 모두 극렬한 싸움 자체에만 몰두해 왔다고 할 수밖에 없다. 플라톤주의자들도, 자신들의 생각은 뒤로 감추어 두고, 상대편들을 오류에 빠지게 한 헛된 자만심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것을 밝혀내고 무너뜨리기만 하는 것으로 그 두 학파간의 논쟁을 해결하려고 했을 뿐이다.
4) 「신의 도시」 ⅺ, 25 5) 「서간문」 118, 13-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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