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비판과 사랑에 대하여

해선녀 2004. 11. 2. 11:28

 

 

몇 년전, 한 친구가 고명하신 스님 한 분을 모셔 왔으니 자기 집에 잠시 와 보라고 했다. 그 분이 말씀하신 것 중에서 다른 것은 그만 두고, 특히 마음에 남은 한 가지는 바로, 나는 남의 말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그 분은 내가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않는다는 듯인가, 내가 남의 말을 '도무지' 믿지 않는 뜻인가가 잠시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하여튼, 그 후로도, 그 말은 오랫동안 내 생각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그 친구는 당황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그 분을 오랫동안 신뢰하면서 온집안의 대소사에 대해 꼭  상담을 드리고 기도를 부탁해 온 분인데, 그 분이 그런 말을 하시니...하여튼,  그 분이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했거나 간에, 나는 그 분이 아무 생각없이, 오히려 기도승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차서 그 앞에 앉은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여 더욱 그 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남다른, '사람보는 눈'을 가진 분들에 대하여..아닌게 아니라, 나는 언젠가부터, 남의 말을 잘 믿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었으며, 단지, 그런 속마음을 쉽사리 들키지 않고 살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단적인 예로, 나는 전에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었을 때, 의심 한 번 없이 가르쳐 준대로 곧장 갔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일단 모든 안내를 고맙게 '접수'는 하지만, 가다가 다시 묻곤 한다. 그 사람이 잘못 알았거나 잘못 말했거나 내가 잘못 알아들었을 수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나는 특히, 눈이 밚이 나빠진 이후로는 나 자신을 제일 믿지 않는다. 사실에 관한 말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주관적인 판단과 견해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건축감리 일을 하시는 어느 분이, 건축 설계가 제대로 되었는지, 그것이 제대로 시공되었는지를 감리하는 일을 오래 해오다 보니, 매사에 부정적인 사고부터 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는 논지의 글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분은 그 점 때문에, 자신의 아들에게는 그런 일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한다. 

 

그 글을 읽으면서, 그 스님과 함께 역시 수 년전에 나를 수술했던 어느 정형외과 의사가 그런 말을 했던 것도 생각났다. 개방골절도 아닌 골절수술이 재발되는 일은 일만 분의 일의 확률인데, 거기에 그 재수술마처 그렇게 애를 먹이는 경우는 또 다시 일만 분의 일 확률이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애를 먹인 환자였다. 골치를 썩이는 나 같은 환자를 만났을 때 정말 의사를 그만 두고 싶어지고 아들에게는 절대로 '의사짓 '은 말라고 싶어진다고 그는 말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것도 아니고, 진지하게, 소박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였다. 나는 그 때, 팔꿈치의 뼈 두 개 중 작은 뼈의 관절에 분쇄 골절상을 입었는데, 그의 말대로, '분필가루처럼' 부서진 관절이 끝내 이어지지 못하고 지금  그 부분을 관절대신 근육으로 버티고 산다.  

 

재수술 끝에 두 달 반 동안이나 고단위 항생제 투여해도 내 팔은 낫지 않고 오히려 온몸에 염증이 번져 패혈증까지 갔던 그 때, 항생제 부작용만 극심해져 생명이 위태롭게 된 나에게 그는 항생제 투여를 사실상 포기하였다.  좀더 약한 경구용 약으로 전환해 주기는 하였으나 나는 그마저 곧바로 토해내고 말았다.   그러나, 항생제를 중단한지 4일 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9일 동안의 고열이 계속되다가, '컴퓨터 오작동'으로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는 혈액검사 수치의 급격한 변동이 오더니, 역시 원인도 모르게 멀쩡히 나아 나는 퇴원을 했다.

 

감리는 건축 행위를 검토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설계하고 시공한 행위를 그 바탕부터 뒤집어서 그 행위의 목적-이유와 합리적 근거를 밝히고 정당화하는 일, 즉, 우리의 사고를 비판적으로 '검사'하는 일이다. 그것은 과학적 사고 그 이상으로 철학적인 사고를 요한다. 환경과 인간 간의 관계를 하나의 논리적 명제로 세우고 그 논리체계가 적어도 합리성의 범위 안에는 들어 있음을 증명하고 그 사실적 검증을 통하여 해당 건축행위의 타당성을 밝히는 일이다. 그것은 도한, 어느 철학자의 말에 의하면, '반성적 사고'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글에서 그가 비판적 사고와 같은 의미로 쓴 것 같은 '부정적 사고'라는 말은 비판적 사고와는 좀 다른 의미이다. 그것은 비판적 사고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임의적으로 체택된 사고이거나 비판적 사고의 결과 도달된 부정적인 결론이다. 긍적적인 사고도 비판적 사고의 한 수단으로 동원될 수도 있고 비판적 사고의 결과 긍정적인 사고가 도출될 수도 있다.그것은 그 자체로서 사고의 목적은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그 결과가  어떤 명제에 대한 긍정이 되든 부정이 되든 간에, 모든 생각들을 그 밑바닥부터 뒤집어서 검토해 보는 일이며,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것은 일단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면서 긍정이든 부정이즌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학적 사고와 명제의 논증 자체로서 그 결론에 도달하는 철학을 아우르는 말이다.

 

나는 종종 비판적 사고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한다. 비판적, 합리적 사고(이하, 통칭, 철학이라고 하자)에 대해 심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태도에 대해서. 철학에 왜 사랑이 없겠는가? 애정을 가지고 너와 나, 우리들 삶에 깔려 있는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는 것, 그것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가, 무엇이, 잘못되었거나 말았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것이다. 주어진 모은 것을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만을 살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우리는 세상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시비하지 말아야 한다. 시비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아무 말을 말아야 한다. 꽃처럼, 풀잎처럼 살기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사랑은 그 상대의 결점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말 자체도 어떤가? 결점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이미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내심, 비판을 하고 잇는 것이 아닌지? '크레타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이다 '고  외치고 다녔다는 그 사람도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논리 그대로, '시비하지 말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은 시비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미 그것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제대로 말한다는 것은 결국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철학을 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말할 지도 모른다. 풀잎 같은 사랑, 아니, 고슴도치 사랑이어도 좋다, 모름지기 비판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애정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심하게는,  ''쑤시고 깐죽거리고 염장을 지르는' 일이다. 고슴도치를 지나서 '조폭'적인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다. 무슨 일에서든 철학하는 자세로 임하는 사람을 모두 골치 아프다. 말이 무슨 소용인가...시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사랑, 아, 숭고한 사랑이여....그것이 정말 가능할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바른 길로 가도록 인도할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사랑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나는 그 글에서, 문제가 된다면 그의 비판적 사고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비판적인 사고가 '애정없는 비난과 거부'로만 받아들여진 그 상황이 문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글이 실제로 자신의 '애정없는 거부'에 대허서  반성한 것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 의사도 마찬가지, 그 의사가 그렇게, 내과, 외과, 방사선과는 물론이고 피부과 신경과 등 모든 의학적인 처치와 노력을 다했으면서도 그런 반성이 남았다면...그러나,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였다. 문제는 어떻게 사랑을 가지고 틀린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똑 같은 닥달직도 매질도 그것이 어느 입장에서든, 사랑의 매질일수도 있고 분노와 질타와 배척일 수도 있다.

 

살면서 늘 느끼는 것은 말이든, 물건이든,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마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그 주고 받는 실천의 방법과 태도가 잘못된 것을 가지고, 그 행위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혼동하고 치부한다. 사랑이라는 본질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비판적 사고나 기술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화적 풍토와 분위기라면 처음부터 그것은 엇박자로 가게 되어 있다. 비판적 사고의 '비'자만 나와도 사랑이라는 만고청청의 길에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진실을 덮고 왜곡하고 얼버무리는 철학 아닌 '철학'이 원만한 인격이나 중용이니 하는 이름들을 업고 '기득권자'의 편에 서서 사랑의 시장조차도 제압을 한다.

 

얼마 전에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글 중에 그 제목이 '부부싸움에서는 무조건 이겨라'라는 것을 보고 웃고 말려다가 그 내용을 읽어보고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무조건 싸움에만 이기라니, 기득권자는 무조건 자기 권리를 옹호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무조건 그들을 공격하고 끌어 내리고?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 논지는 결국, 이긴다는 것은 부부가 서로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돕는다는, 말하자면 건전한 부부싸움에 관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워게임에서 이기고 볼 일이라는 듯이 아니고  곧이곧대로, 즉석에서 시비를 가리라는 것도 아니었다., 한 사람이 화를 내면 다른 사람이 참아주고, 그러나 언젠가는 두 사람의 진의가 서로 전달 되도록 오래 참고 바라보면서 결국 부부가 함께 바른 길로 승리해 나가는 길을 택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의사나 그 감리자나,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들의 마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것은 그냥,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지치고 남루해진 사랑의 방법에 대해 가끔씩 그렇게 푸념하고 넋두리하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그 일을 기어이 그만 두게 되는 날도 오겠지만, 나는 어떤 일에서든지, 아무리 심신이 고달프고 희미해져 가도, 스스로 비판적인 사고를 그치고 그 사랑의 끈을 놓치지 않는 한, 그가 그 일을 적어도 자신의 비판적인 사고 때문에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비판적인 사랑 자체가 그를 '부정적인 성정'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가 그것 때문에 떠난다면 그는 어디를 가도 또 그런 문제를 만날 것이다. 그는 여전히 그이므로. 우리의 사랑은 늘,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 사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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