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춘풍한담: 존재냐, 이름이냐?

해선녀 2004. 4. 26. 15:39

 


 

 

<나무는 언제나 나무이지요. 어린 묘목일 때나 오래 된 고목일 때나 옷을 입었을 때나 벗었을 때나...그런데, 나는 때때로 엉뚱한 곳에서 길을 잃어서, 내가 정말 누구인가조차, 잘 모르겠을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이렇게 꽃잎이 흩날리는 봄이면, 또는 낙엽지는 가을이면, 내가 정말 나인가 조차도 잘 모르겠을 때가....>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온 몇 술꾼들이 나눈 이야기 중에는 교수들이 전공영역을 너무 자유로이 넘나드는 바람에 학생들이 전공선택과 진로결정에 혼돈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심리학을 버리고 철학으로 가고, 사회학을 역사학적으로 접근하고, 그렇게 관심가는대로 발 가는대로 접근하는 교수들 때문에 교수채용을 할 때도 문제라는군요. 이공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도대체 어느 교수를 어느 분야에 뽑아야 '학문의 균형있는 탐구'가 가능할지, 아주 골치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갈수록 삶은 다양해지고 세분화되는데, 삶의 영역들 간의 대화는 단절되고 충돌만 하고 있는, 현대인의 불안정한 삶의 양상에 대한 조바심과 걱정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겠지요.그것은 결국, '학문의 체계'를 다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어찌 보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밥그릇 싸움인 것도 같았어요. 교수는 자기의 제자들의 진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만남, 또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영역들 내의, 소위, '퓨전' ‘크로스 오버’ 현상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장르의 벽이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없지요. 그러는 나도, 종종 남편으로부터, 이게 국이야, 탕이야, 찌게야? 당신은 왜 요리를 할 때마다 맛이 틀려?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그게 재미지, 뭐.. 아닌게 아니라, 모든 인간활동의 이름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어요. 학문적 체계와 그 이름  이전에, 흘러가는대로의 학문적 탐구욕 그 자체를 어떻게 금지시키겠어요 이름은, 존재가 구비치는 마디마다 필요한 대로 붙이자는 소리지요. 글을 써 놓고 제목을 붙이듯이. 실존은 본질에 우선하는 것 아니겠어요? . 하긴, 그렇게 말해 놓고 봐도, 참 걱정됩니다. 사람들은 이름만큼만 존재를 건져 올리고 이름 없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치부되는 세상이니...

 

주부이자, 엄마이고, 때로는 직장인이고, 또한 온갖 취미활동의 주체이며 자신의 내면을 향한 무한탐구의 실체인, 그런 존재를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나무에게 물어 보니 나무는, 네 맘대로 해라, 그러네요. "네가 나를 나무라고 하면 나무지. 가로수가 아니고..." 하하. 그렇군요...그런데, 그 가로수조차 없어진 세상을 상상해 보셨어요?  언젠가는 그런 일마저 가능할 지도 모르지요. 오늘날의 직업의 80%인가가 미래에는 없어질 거라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어요. 우리가 하던 모든 짓거리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땅에 딩군다...,혹자들은 교육부도 없애자고 하잖아요...


하기야, 그렇지요. 어차피 떨어져 뒹굴 것이라면야, 교육부도 그렇게 떨어트려 버려도 되겠지요. 그러나, 권위주의적 교육 감찰의 방식이 마음에 안든다고 해서 교육부라는 곳을 깡그리 없애야 할까요? 그 문제를 제외한 다른 좋은 기능과 역할들이 어떤 이름으로든, 어디선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 이름이야 무엇이건, 존재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잖아요. 그건, 뿌리까지 썩었다면 모를까, 나무 한 가지 썩었다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 내는 격이지요. 교육부는 총체적으로 썩었다. 그래서 없애야 한다는 논리대로라면, 교육부의 어떤 기능과 역할도 다른 곳으로 스며들어 살아남지 않도록 철저히 싹 없애야 된다는 말이지요. 과연 그럴까. 그 기능과 역할의 축소나 변형을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닐지...

 

에구, 이 개혁과 혁신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나는 오늘,  무슨 이름으로 살아남아 존재할 수 있을까? 내 어느 결함 때문에, 내 존재 자체가 다 말살 당하는 것은 아닐까? 정말,  내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네요...이러다가 내가 또 삼천포르 빠지지 않을까요? ㅎㅎ 뭐, 빠지게 되면  빠지는 거지,. 무슨 이름이 잇고 없고 간에...누가 이러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하긴, 그렇게 빠져 나가듯, 또 어디론가 빠져 들겟지요. 그 이름 또한 무엇이든 간에

 

에이, 그래도 그렇지...'존재냐, 소유나' 이전에 '존재냐, 이름이냐'가 먼저 아닐까요?  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러니,  지금 누가 내 이름이나 좀 불러 줘 봐요. 무슨 이름으로라도...내가 대답할 테니...나는 우선, 외롭거든요...아, 그러고 보니 한 동안 제 닉을 '아무개'라고 하며 지낸 적이 잇네요. 나 자신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어서 아예 거부해 버렸던 것이지요...잘 낫어, 정말....언제는 미국에서도 한국사람은 한국식이어야  한다며 동네방네 '정호맘'이라고 불러 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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