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비낀 숲에서

거인과 개미

해선녀 2011. 8. 3. 23:47

 

 

 

 

 

세상 영혼들을 모두 껴안고 어루만질 수 있는 거인이 되고 싶다고 하다가 아니면 차라리, 개미가 되어 달개비 이파리속 골목길을 헤매고 싶다고 하는 시인이 있더니, 과연, 나는 순간마다, 내 세포속 DNA의 지도와 영혼 사이 어느 어름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거하고 있는 것인지, 참 묘연해지기도 한다. 다만, 그것이 아무리, 미궁일지라도, 영원한 실종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한 그루 나무와도 같아서, 우리들의 뿌리로부터 잠시 잊혀지며 낙엽져 갈 수 있을 뿐, 그 모든 존재의 노중에서 편재하며 그 순환을 멈추지 않고 있음이리라...

 

비가 와도 너무 왔다. 어릴 적, 사라호 태풍을 기억하지만, 이 문명의 천지에, 그것도 서울의 강남이 산사태에 물바다라니, 이런 상처를 우리는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양평집 축대를 둘러 보고 나대지로 방치된 위땅 주인에게 겨우 연락하여 위태로워 보이는 축대를 손봐 줄 것을 부탁했더니,  어제야, 임시로 땅을 파서 물길을 만들어 놓았단다. 비가 그치고 나면 제대로 배수로 공사를 하고, 우리집 배수로도 손봐 주겠단다. 윗땅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우리집 배수로까지 매몰되어 버린 것이다. 축대 아래 사는 집은 늘 불안하다.그러게, 누가 산 위에 집을 지으라고 했던가?  봉천동집에서도 물난리가 조금 났다, 본체에서 이어내어 내부로 쓰고 있는 부분의 천정에서 빗물이 쏟아졌다. 이음새 부분의 실리콘이 삭아서 폭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이 집은 17년 전에 내가 열 세대짜리 다세대 주택을 지어 그 중 하나, 동생에게 판 것이었는데, 지금은 내가 세를 들어 살고 있다. 맨꼭대기집이어서, 딴엔 남산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창도 만들었고, 주방엔 작지만 예쁜 창문도 만들어 관악산 옆자락을 볼 수 있게 했다. 작은집을 좀더 넓게 쓰라고 거실과 베란다를 달아내어 준 것이엇지만, 그 욕심낸 부분이 그 동안에도 탈을 내곤 했었다. 내 이름은 지금 세입자이지만, 옛 건축주의 이름으로 책임을 느낀다. 달아낸 부분을 조금만 경사지게 했으면 물이 덜 고이지 않았을까? 그 동안 내부수리만 좀 햇지만, 비가 그치면, 외부공사도 해야 할 것 같다. 

 

 때때로, , 팔이 잘린, 혹은 머리가 잘린 그리스의 조상들처럼 단절되거나 통째로 매몰되어 버린 듯한 자신을 낯선 눈으로 바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자의식들의 벼랑끝마다 존재는 오히려 더 생생하고 초롱한 이슬로 맺혀 반짝거린다. 나를 버텨 온 저  폐쇄회로, 존재의 순환선 저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역이름을 부르며 크고 작은 내 안의 노선들 전체를 점검하게 된다. 나무의 생명이 그 땅속 잔뿌리들에서 가지끝이 파리에까지  소리쳐 부르고 호응하며 물관을 오르내리듯,  내가 지나온 역들과 지나오지 못했던 역들을 기억하고, 이 역을 지나 머지않아, 만나게 될 또 다른 이름의 역들을 예감하기도 한다.  존재감..그것이 있기에,지금 지나고 있는 바깥풍경이 아무리 낯설어도 그냥 편안히 즐기는 것이 가능해진다.  작정하고 가던 길을 조울거리며 가다 보면, 끄덕끄덕 의식의 바닥과 수면 사이를 오르내리며 나를 따라 오는 해마같은 환영이 하나 차창에 걸려 있기도 한다. 차창 밖 풍경이나 나 자신이나, 그저 스스로 애틋해지는 낡은 자화상 하나가...

 

젊은 날, 큰아이가 학교 앞 문방구에서 작은 금붕어 두 마리가 든 비닐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 던 날, 아이는  꼭 저 거인이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키울까? 다음 날, 더 많은 금붕어 친구들과 함께 어항 하나를 사 주었다. 녀석들은 좋아라 헤엄쳐 다니고, 아이는 예쁜 조약돌들도 넣어 주고 녀석들의 하인처럼, 하나님처럼, 어항을 바라 보고 돌보는 양이더니, 가만히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마치 저 아라비안 나이트의 호리병 속을 드나드는 거인이나 된 듯이, 그 어항을 드나들고 있다.  산꼭대기 소나무 한 그루를 솜털 하나 뽑듯 뽑아 올려 그 어항 속 작은 초가집 옆에 심어 주고 하하하 너털웃음도 웃는다. 어느 날은 금붕어가 되었는지, 초가집 안방에서  창박을 내다 보며 지나가는 녀석들에게 소리를 쳣다. 얘들아, 우리 이 방안에서 놀자... 야, 임마, 싸우지 마. 저 까만 배불뚝이의 옆구리가 벌써 상처가 나지 않았니? 녀석들은 아이의 말이 들리는지 안들리는지, 쉼없이 창문앞을 알짱거리면서 지나만 간다. 그 후, 마당에 작은 연못을 하나 파고 금붕어들을 넣어 주었을 때쯤 해서는, 아이는 호리병 거인도 금붕어도 그만 두고, 마당의 오리들이 금붕어를 잡아 먹지 못하게 열심히 오리를  쫓는 아주 현실적인 파숫꾼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자유를 염원하여, 때로는  예쁜 열대어처럼 모양을 갖추고 살랑살랑 헤엄쳐 다니기도 하지만, 울퉁불퉁 시시때때로 그 형체가 변하는 아메바 같고,  경게조차 모호한 물안개 같은 욕망과 사유의 덩어리들이 아니던가?  언어는 사고의 집이라고들 하지만, 언어든 사고든, 혹은 욕망이든,  그것들이 거하는 집이 있다고 하면, 저 먼 나라 이태리 남단 장화 뒷굽 동네의 주거 유적들이라는 trulli 같지 않을까? 둥근 벽 위에 원추지붕이 올려진 크고 작은 trullo들을 여러 개, 복도도 없이 붙여서 지은  trulli(trullo의 복수)같은,  다중 폐쇄회로라고나 할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든 안하든, 즐기든 못즐기든, 언제나 우리를 가두고 있고, 단지 우리가 의식하는 순간, 그 문이 열리지만, 그 문을 나서는 순간, 또 다시 다른 감옥에 갇히게 되는 감옥. 그리하여, 우리의 기도는 결국, 그 truli의 대한 사랑을 안고 솟아 오르는 종달새 같은 것...

 

작은 올캐의 마지막 날들을 떠올린다. 어느 새벽, 그녀는 나와 언니, 그리고 사촌 시누이까지, 셋을 집으로 와달라고 불렀다. 세 김서방들은 우리 세 시집식구들을 그 금단의 성 앞에 내려 놓아 주고 우리는 성문을 열고 들어 갔다. 햇살이 환하게 비쳐드는 안방의 커다란 침대 위에 누워 잇던 올캐는 우리를 보자 마자, 형님요, 00아, 00야, 내 정말 잘못햇다. 용서해 도고...내가 가 남편의 핏줄을 모두 끊어 놓았다...눈물도 흘릴 기력도 없는 듯, 앙상하게 뼈만 남은 매마른 얼굴로 소리쳤다. 간밤에 설핏 잠이 들었는데, 하늘에서부터 금빛 도옴이 내려 와서 지붕 위를 덮더니,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려 왓다는 것이다. 회개하라, 회개하라고..우리는 모두 얼싸안고 울었다. 그래, 그래, 우리도 다 잘못햇지...마음 편히 먹어요...쌓인 할 말은 이미 늦은지 너무 오래고, 무조건 떠날 사람의 참회의 의식을 위한 사과만 열심히 했다. 그러고는 며칠 후, 다시 병원으로 문병 갓을 때, 그녀는 다시 길을 잃고, '너, 왜 왔니? 나 가고 나서도, 절대로, 절대로, 우리 아이들 가까이 오지도 마라...'그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그녀는 갔다. 오로지, 남기고 가는 새끼들이 외적의 침입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에 가득 찬 한 마리 종달새가 되어...

 

 당신의 삶이 몇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그 동안 누군가와 쌓인 오해를 풀고 가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냥, 내버려 두고, 그 동안 고마웠던 사람에게 감사의 밥 한 끼라도 사고 가고 싶다는 말들을 한다. 그 동안 내내 행복했노라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세상을 원망하기보다는 내게 작은 행복이라도 안겨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 ..나는 과연 그런 마음으로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더구나, 그냥, 나에게 고마웠던 사람들만이 아니고, 나를 미워햇던 사람들, 내가 미워했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내 작은 성문을 활짝 열고 진심으로 미안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갈 수 있을까? 그것은 개미의 회로를 거인의 회로로 바꾸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면, 진짜로 이 세상에 대해서 감사하고 떠난다 고 할 수는 없으리라.  어찌 되었든,  내 울퉁불퉁하고 삐죽삐죽한 온갖 욕망과 사유의 지붕들 위에 맑은 유리지붕 하나를 세우듯,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리...

 

한 이틀 좀 빠안하더니, 오늘은 또 폭우였다. 폭우가 할퀴고 간 상처들을 함께 슬퍼하고 위무하는 듯한 라벨의 찌간느를 들으며 뜻모를 애수에 잠긴다. 라벨은 프랑스의 부호 아버지와 스페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던가...그래선지, 인상주의적이면서도 집시적인 정서가 풍부하다. 저 집시들처럼 우리도 생각과 환상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거인이 되었다가 개미가 되었다가 자유자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는 듯이 보여서, 나는 송창식이나, 조영남을 좋아한다. 김도향이 '벽오동 심은 뜻은'을 부를 때의 너털웃음은 마치, 그가 거인을 넘어 초인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였었다. 거인의 너털웃음은 그의 거대한 절망에서 나온다. 거대한 절망은 다시 거대한 희망을 부른다. 희망은 기쁨을 부르고 기쁨은 다시 슬픔을 부른다. 그 기쁨이 하도 애처로와서...거인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그 거대한 가슴에 품고 어르고 달래도 주다가, 어느 순간에는 무심한 듯 내던져 버리고, 우리들의 기쁨과 슬픔들을 들고 남을 바라만 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거인의 회로와 개미의 회로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졋을 때처럼, 연이어 호안에 가닿았다가는 되돌아 와 서로 만나고 교차하는 동심원의 파문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할 것 없이, 우리 안에는,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도, 나름대로의 거인과 개미의 파문들이 연이어 교차한다. 그러니, 누구할 것 없이, 집시의 자식들로 태어나서 마지막에 어느 파문에서 놀다가 생을 마쳤느냐보다도, 평생을 , 우리의 파문이 호안의 어디까지 가닿고 어떤 파문을 얼마나 즐겼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겟는가?  더러는 내 안에 들어와 내 풍경이 되어 주고, 더러는 내가 들어가 다른 풍경을 만들었던 그 모든 풍경들과 작별을 할 날이 내게도 머지 않았다.  내가 즐긴만큼만 내가 알게 되었던,  그 영원히 단절되고 매몰되지 않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들은  여전히 이 세상을 달려 가게 남겨 두고, 오, 제발, 폭우는 아니게, 부슬비처럼 조용히 내 마음의 호수에 마지막 파문들을 일으키며 떠날 수 있기를...,  

 

어쩌면, 아무에게도 감사의 밥 한 끼도 사지 못하고, 

어쩌면, 어느 낯선  간이역에서 홀연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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