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육과정 : 내용선정의 원리
46)음악을 하는 것이 성경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쩌면, 이교도들의 미신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기독교인들은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다. 聖性의 이해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하아프 같은 악기라든지, 기타 다른 음악에 대한 토론도 나올 수 있는 것은 사실이이다. 물론, 우리는 음악의 그 극적인 넌센스에 휘말려 들어 가서는 안될 것이다.
문학에 대해서도, 문학은신의 사자가 만든 것이라느니 하면서, 무조건 거부할 것은 아니다. 이교도들이 정의와 미덕의 신에게 사원을 지어 바치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석물로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경배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 스스로 정의와 미덕 자체를 포기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차라리, 선하고 진지한 기독교인이면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지, 모든 진리는 다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이교도들의 종교문학에서도, 그 진리를 알아보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거기에 깔려 있는 미신적인 생각들을 배제할 줄든 알아야 한다. 사도가,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 보았을 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지도 않고 감사드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상상속에서 허영에 들떠서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 그들은 자신이 현자라고 떠들면서, 바보가 되어갔고, 불멸의 신의 영광을 사멸하는 인간과 새, 네 발 짐승, 심지어 버러지의 형상을 한 우상으로까지 바꾸어 놓았느니라”(로마서 1:21-23)라고 비난했던 그런 사람들을 슬프게 여기고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려 한다. 교육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것은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실시하는 것으로서, 첫째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을 위한 것이고, 둘째는 신에 의해서 과거에 인간에게 주어졌거나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위한 것이다 첫 번째 것은 인간의 궤도를 다루는 것으로서, 미신적인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우상을 만들어 내거나, 어떤 창조물이나 그 한 부분을 마치 그 자체로서 신인 것처럼 숭배하는 일은 모두 미신에 속한다. 신학에 의지하는 일, 악마의 상징을 만들거나 약속을 맺는 일, 마술에 힘을 쏟는 일 등은 시인들이, 교육을 위해서 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들로서, 역시 미신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점쟁이나 예언가들이 쓴 책들은 더욱 터무니 없는 사기로서, 역시 이런 부류에 속한다.
또한, 의약품을 멀리하고 대신에 부적이나 비방 같은 것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주문을 써 놓거나, 외우거나 “징표”가 되는 물건을 몸에 매달거나 묶어 놓고 이상한 춤을 추게 하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 다 미신에 속한다. 이런 것들은 개인마다의 신체적인 조건에 맞추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은밀하게, 또 때로는 공공연하게, 그것을 나타내려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따로 가지고 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미신”이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인과요법(physics)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이 미신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을 제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한다. 예를 들자면, 양쪽 귀 위에 귀거리를 단다든가, 타조의 뼈로 만든 반지를 끼는 것, 또는 딸꾹질을 멈추려면 왼손 엄지 손가락을 쳐들면 된다는 것, 등이다.
이외에도, 우리의 몸 어딘가에 경련이 일어난다든지, 친구끼리 팔짱을 끼고 걷고 있을 때 돌맹이나 개, 또는 어떤 아이가 그 두 사람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을 경우에는 반드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둥, 벼라별 비방들이 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돌맹이가 마치 친구사이의 우정을 갈라 놓기라도 한다는 듯이. 하기사, 그것을 발로 차버리는 것이, 함께 걷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지나가기만 했울 뿐인 죄없는 아이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보다는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것도 있다. 당신 집 앞을 지나갈 때에는 문턱을 반드시 밟고 가라. 신발을 신으려고 할 때 누군가가 재채기를 하면 도로 들어가서 잠을 자라. 어디로인가 나가려고 출발하다가 비틀거리고 넘어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쥐가 의복을 쏠면, 그 당장의 손해보다도 훗날의 불행을 더 걱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카토(Cato)는 자기의 장화를 쥐가 쏠아 먹었다고 걱정하는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이건 나쁜 징조가 아닐세. 아닌게 아니라, 장화가 쥐를 먹었다면야, 정말 걱정할 만한 일이지.”
우리는 이런 종류의 파괴적인 미신 중에 생일을 가지고 점을 치기 때문에 “생일 점쟁이”라고 불리다가 요즘에는 아예, “점성가”47)*라고 불리우는 그런 사람들도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출생 순간의 별의 위치에 따라 점을 치며, 그 별자리를 알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으로 우리의 행위와 행위의 결과까지 예언하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48)*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가련한 노예의 상태로 팔아 넘기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모든 술법들은 백해무익한 미신의 일종으로서, 인간의 재앙을 악마에 연결짓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절대적으로 근절하고 멀리해야 할, 거짓되고 배반적인 음해들일 뿐이다
49)기독교인의 마음으롤부터 이러한 미신들이 완전히 차단되고 근절되고 나면, 이제 미신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제도들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제도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연결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 그것은 인간을 악마에 연결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한 연결이 이루어지면 힘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 힘을 얻기 위해 연결한 온갖 장치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제도인 것이다. 그것들 중에는, 어떤 것은 과잉이거나 무절제한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편리하고 필수적인 것도 있다.
배우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 관중에게 보내고 있는 신호가 인간 사이의 약속과 합의 때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의미를 가진 것이라면, 예전에 카르타고의 전령관은 사람들에게 춤추는 사람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설명을 구태어 해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었다 그 당시 그런 설명을 하는 직책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의 노인들도 직 기억하고 있으며,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 극장에 가면, 공연을 열심히 보고 있으면서도 누군가가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해 주지 않으면, 도저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든지 신호를 선택하는데 관한 한,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될 수 있는대로, 신호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물자체와 닮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과 유사하다고 하는데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이므로, 신호는 어떤 합의를 미리 해 놓지 않는 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의미를 가질 수가 없다.그러나, 그림이나 조각 등의 경우에는, 그 자체가 실제의 사물과 유사하도록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긋을 보는 순간에 바로,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데 문제가 없다. 더구나, 기술이 좋은 예술가가 만든 작품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은 그것이 왜, 어디에서, 언제, 누구의 권위 아래에서 만들어졌는가하는 것이 관심꺼리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는 인간의 부질없는 노작의 범주에 속한다고밖에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수없이 많은 이야기와 소설의 허구성 역시, 인간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고안물들이다. 그러나 어떠한 창의적 작품이라고 하는 것도, 적어도 인간의 독창성 면에서는, 거짓과 사기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모든 편리하고 필수적인 제도나 장치들 중에서는, 의상이나 장신구를 가지고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보여 주는 형식들이 가장 두드러진다 신호들 중에는 그것이 없이는 인간 하이의 유대 자체가 끊어지고 말거나 대단히 곤란하게 되어 버리는 그런 것들도 수 없이 많다. 또한, 무게, 부피, 동전의 액수와 무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측량단위들이 나라마다 다른 것을 보아도, 그것들이 모두 인간적인 고안물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각기 그 지도자의 뜻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될 수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기독교인은 이 모든 인간적인 합의들을 절대로 거부하지 말고 필요불가결한 삶의 교류양식으로 인식해야 한다. 오히려, 그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인간적 체계 중에는 자연의 체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그와 유사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는 악마적인 것과 연결된 인간적 체계들은 모두 거부하고 혐오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을 연대 시켜 주는 모든 것은, 적어도 사치와 낭비로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체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것들 중에도 특히, 우리가 글을 읽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문자, 그리고,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언어들이 있다. 또한, 거기에는 속기(notae)문자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배운 사람들을 “속기사”(notarii)라고 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유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배우는 것이 조금도 불법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미신에 빠뜨리거나 사치를 조장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단지, 그것들은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들이므로, 그 보다 더 중요한 목표자체를 잊어버릴 정도로 거기에 빠져 버리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 유산 중에는, 인간에 의해 시작된 것이기 보다,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과 계획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된 것으로서, 그것을 어디에서 알게 되었든지 간에, 도저히 인간적 체제라고 볼 수는 없는 그러한 것들이 있다. 그 중 어떤 것은 신체적인 감각을 통해서 알 수 있고, 또 어떤 것은 합리적 지성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전자 중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만 들음으로써 믿게 되거나 다른 사람이 지적해 준 것을 직접 봄으로써 알게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경험한 것으로부터 추론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도 있다. 역사라고 일컬어지는 과거의 사건들로부터 우리가 얻어 내게 된 그와 같은 경험은, 그것이 어린 시절, 교회 밖에서 배운 것이었다고 해도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예컨대, 올림피아드라든가 로마집정관의 이름이 들어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예수가 태어나고 고난을 겪었던 로마집정시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 고난의 시기가 예수의 나이 46세였을 때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다. 유태인들에 의하면, 46이라는 숫자는 단지, 예수의 신체를 상징하기 위해 예수가 언급했던 “사원”을 실제로 짓는데 걸린 햇수를 뜻한 것 뿐이었다는 것이다50)* 우리는 지금 복음서를 근거로, 예수가 세례를 받았을 당시의 나이는 약 30세 였음을 알고 있따. 그 후 얼마동안 더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그의 여러 가지 활동들에 대한 기록들을 연결시켜 보아서 알 수 있다. 어쨌든, 다른 여러 가지 근거를 바탕으로 다시 의문이 제기되지 않도록, 우리는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복음서와 일반역사를 비교함으로써 사실을 밝혀 놓을 수 있다.
51)역사란 인간의 옛 제도에 대해 記述하는 일이다. 우리는 역사 그 자체를 현재의 제도속에서 직접 찾아 낼 수는 없다. 그것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그것을 없었던 일로 돌려 놓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신이 창조하고 지배해 온 시간의 흐름 그 속에 속하는 일로서밖에 생각 할 도리가 없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과, 지금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역사는 과거의 일을 있었던 그대로 서술하는 충실하고 유익한 기능을 수행한다. 점쟁이나 그와 유사한 사람들이 쓴 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데 목적이 있다. 더구나, 그들은 그것을 충실한 서술의 자세가 아니라, 대담한 충고의 자세로 쓴 것이다.
서술에는 記述에 가까운, 즉, 과거의 상황보다도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을 미처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설명해 주는 그런 종류의 것도 있다. 여기에는 장소와 위치, 동물, 식물, 나무, 돌 등의 물체가 가진 성격, 등에 대한 모든 서술이 다 해당된다. 나는 앞에서 이런 종류의 사물에 대해 논의하고, 그런 지식이 성경의 어려운 문제를 푸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런 사물들은 신호로, 예컨대, 이떤 미신적인 비법이나 그 성취수단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미 그런 미신적인 종류의 지식과, 그 반대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노예상태가 아닌)종류의 지식을 구별한 바 있다. “이 풀을 뜯어서 먹으면 너의 배가 나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과, “이 풀을 너의 목에 감고 있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그 온전한 인과관계를 인정하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 미신적인 의미를 탓할 수밖에 없다.
주문을 외우거나 기원을 드리는 일이 아닌 경우에도, 예컨대, 어떤 물건을 몸에 묶거나 연결해서 병이 나았다고 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그 물건의 자연적인 속성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물건의 상징적 의미 때문이었는지는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전자의 경우였다면, 그 물건은 자유롭게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기독교인은 그 효능이 분명할수록 더욱 그것을 피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한, 어떤 물건의 효능이 왜 좋다는 것인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약이든 식품이든 간에, 적어도 그것이 몸의 병을 낫게 하려는 것인지 몸의 컨디션을 조절하려는 것인지, 그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52)그 외에도, 물건을 만들어 내는 기술, 즉, 工人의 노작을 통해서 새로운 물건이 생기게 되는 技術이 있다. 어떤 기술들은 하나님의 일을 도우는 일들이다. 예컨대, 의약, 농업, 항해술, 등이다. 춤, 경기, 레슬링처럼, 신체적인 행위로서 나타내는 기슬들도 있다. 이 모든 기술들에 관한 한, 경험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준다. 기슬을 가진 사람이라면,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를 연결해서 생각해 보지 않고서는 신체동작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기술들에 대해서 그저 피상적이고 대략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우리가 그런 지식을 가지려는 목적은 그것을 실제로 해내개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그것을 꼭 해내야 할 의무가 있지 않는 한 그렇다. 그런 기술에 관련된 비유적인 언어를 성경에서 보게 될 때, 그런 시글들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정도만 되면, 그 비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신체적 감각이 아닌, 영혼의 지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리와 수에 관한 훈련이다. 전자는 성경에 관한 온갖 문제들에 대해 탐구하고 해결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추론 때문에 토론 상대와 말다툼을 하거나 속임수를 쓰는 공호한 치기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궤변”이라고 하는, 즉, 진리와 매우 유사해서 우둔한 사람은 물론이고, 똑똑한 사람도 조금만 방심하면 속아넘어가기 십상인, 허위적인 추론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고 하자. “내가 무엇이라면, 너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면, 그 상대방은 그 말이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든지, 아니면, 먼저 말한 사람은 교활한데 비해 그 사람은 단순해서든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다. 그러면, 다시, “나는 사람이다.”라고 먼젓 사람이 말할 것이다.뒷사람은 그것을 또 받아들이고, 앞사람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 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성경이 바로 이런 종류의 그릇된 결론을 혐오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로는 지식을 보여 주는 자이면서도, 혐오스러운 자가 있나니”(전도서 37:23). 누구를 속이려는 의도는 없이, 다만 말장난을 하려는 것일자라도, 진정한 논리성이 결여된 그런 말도 역시 궤변에 속한다.
또한, 진정한 추론이기는 하지만, 이야기하고 있는 상대방의 실수를 그대로 적용하여 그 논리적 결과로 이르게 되는 잘못된 결론의 경우도 있다. 그런 결론은 학식있는 사람들이 종종, 좋은 의도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상대방의 생각을 그대로 인정할 때 어떤 결과가 오는가를 그 사람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 스스로 실수를 깨닫고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도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집을 부리는 그 사람이, 결국 자신이 경멸하던 견해를 스스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사도가,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살아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설교는 모두 헛된 것이었다53)*라고 했던 것은, 아직 진정한 결론이 아니었다. 사도는 그 후,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사실은, 그리스도는 살아났고, 또한 그것을 선언했던 사람의 설교나 그것을 믿었던 사람의 신앙이 헛된 것이 아니였지만, 그것은, “죽은 사람의 부활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그 사람들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면 어떤 결론에 이르는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죽은자의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그에 따른 결론도 부정해야 하며, 그러기를 거부하면, 죽은자의 부활은 인정될 수밖에 없다. 올바른 추론의 과정은 올바른 명제와 그릇된 명제의 어느쪽에나 다 사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 바깥의 학교에서도 쉽게 그것을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명제의 진리는 궁극적으로는, 성서 속에서 찾아 내어야 한다.
논리적 진리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진리가 아니다. 인간은 단지 그것을 발견하고 확인해서, 그것을 배우고 가르치게 되었을 뿐이다. 논리적 진리는 사물의 합리적 질서 속에 영원히 존재하며, 그것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하는 것도 그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장소의 상황, 동물, 식물, 바위의 성질, 등을 기술하는 사람도 인간에 의해 결정된 어떤 것을 기술한는 것이 아니다. 별의 자리를 알려 주고 그 움직임을 말해 주는 사람도 자기자신이나 다른 어떤 사람이 만들어낸 어떤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결론이 잘못되었으면, 그 전제가 당연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는 사람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이 그 진리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닌 것이다. 단지, 그는 그것이 진리임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사도의 말에서 인용해 온 것은 바로 이러한 원리에 해당한다. 즉, 전제는,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는, 사도가 잘못을 지적해 주고 싶었던 그 사람들의 진술이었다. 그 진술에서 추론되는 결론은 당연히,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살아나지 않았다”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아났으므로, 그 결론은 틀렸고, 따라서,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없다는 전제 역시 틀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자의 부활은 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는 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살아났다. 따라서,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있다. 결론이 부정되면 그 전제도 필연적으로 부정된다는 원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알아 낸 것이다. 그 원리는 논리적 추론의 타당성에 관한 것이지, 명제의 진리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54 )“웅변”은 좀 더 풍부한 토론을 위한 원리이다. 이 원리를 거짓을 가르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 진리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진리를 위해서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는 한, 우리는 웅변의 원리 자체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쁜 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마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듣는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말을 해야 그 사람에게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서술은 짧고 분명할수록 효과적으로 전달된다든가, 변화가 있어야 청중을 지겹게 만들지 않으면서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원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외에도, 그것이 사용되는 이유야 옳든 그르든 간에, 이와 유사한 원리들이 많이 있다. 그러한 원리들은 우리에게 지식이나 신념을 가져다 주는 한, 또는 사람의 마음을 무엇인가를 추구하거나 거부하도록 이끌어 갈 수 있는 한, 옳은 원리이다. 그것이 그렇다는 것은 인간이 알아 내게 된 것일 뿐,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55)이제, 수에 관한 학문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아무리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도,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확인하고 발견한 것임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버어질은, 그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Italia"의 첫음절을 옛날 사람들은 짧게 발음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길게 만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56)* 그러나, ‘세 그루의 나무가 셋 있으면, 아홉그루의 나무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정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수를 그 자체로서만 생각하든지, 특정한 모양, 소리, 또는 다른 어떤 개념에 적용시켜서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은 사람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들의 예리한 지성이 발견해 낸, 불변하는 법칙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지식을 가지고도, 자신이 진리로 본 그 진리의 근거를 더 파고 들어가서 탐구하는 대신에, 그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데 더 열을 낸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확인한 그 불변의 진리가 어떻게 해서, 진리일 뿐 아니라 불변하는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묻지를 않는다. 그들이 그러기만 한다면, 물리적 현상의 세계를 지나서 마음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이 위로는 불변하는 진리, 아래로는 변하는 사물들이 있는, 그 중간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또한 마음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도 하다가 그것을 모르게 되기도 한다는, 즉, 마음도 역시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신에 대한 찬양과 사랑으로 향하도록 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신의 뜻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탐구로 향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남들에게 학식이 높은 듯이 보이기는 할 수 있어도, 절대로 현명하지는 못하다.
따라서, 나는 신을 두려워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학구적이고 능력있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금방이라도 가져다 줄 듯이 보이는, 그리스도 교회 바깥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런 학문에 무턱대고 들어서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런 학문들에 대해 사려깊고 신중한 분별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에 의해 고안된 학문들이 그 고안자들의 다양한 의도에 따라 달라지고 그들의 그릇된 생각으로 인해 무지를 드러내는 지경이 되면, 특히, 도당과 그에 관련된 상징들을 바탕으로 약속들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악과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우리 젊은이들은 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젊은이들은 불필요하고 사치스러운 인간적 제도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 위한 그런 것들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배우는 학문들 가운데는, 현재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간에, 물리적 감각에 관련된 현상들에 대한 설명, 논리학, 산수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유익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학문의 범주에는 기계적인 기술에 관한 실험들과 그 결론들도 포함된다. 그런데, 모든 학문, 특히, 신체적 감각에 관한, 따라서, 공간과 시간의 범주에 속하는 학문에 대해서는, “남고 처지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충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번역이 되어있지 않은 모든 말들, 히브리어, 시리아어, 이집트어들을 시시콜콜이 번역해 놓기도 한다. 유세비우스(Eusebius)도 역사적 지식이 없이는 풀리지 않는 성경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의 역사에 관련된 모든 언어들을 번역해 놓았다. 그런 사람들의 노고 덕분에, 이제 기독교인들은 조그만 단편적 지식들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학과들을 열심히 공부해야 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나는 다른 분야의 일에 있어서도, 몇몇 유능한 사람들이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그런 수고를 진심으로 해 준다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성경에서 언급된 미지의 땅, 동물, 식물, 나무, 바위, 금속, 그리고 많은 종류의 사물들을 분류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 설명해 주고 글로 써 줄 수도 있을 것이다. 數에 대해서도 역시, 성경에서 언급된 수에 대한 이론을 모아서 설명하고 써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어떤 것은, 아니, 그 모두가 벌써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훌륭한, 학식있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많은 일들이 그렇게 이루어져 왔고 글로 써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로서는 생각도 못해 본 일들을. 그러나 그 많은 기록들 중에는, 사람들이 너무 부주의했던 탓으로, 또는 그것을 탐낸 어떤 사람들이 감추어 놓았던 탓으로, 지금까지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지식들 외에도, 추리력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이 같은 일이 가능한지, 그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러나, 추리력은 마치 신경체계처럼 성경의 모든 조직 속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이유로, 추리력은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인 신호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음에 이야기할 애매한 표현들에 대해, 그것을 해결하고 설명해 낼 수 있도록 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철학자로 불리는 사람들, 특히 플라톤주의자들이 우리의 믿음에 부합하는 어떤 진리를 말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 때문에 위축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오다시피, 우리의 목적에 맞추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해서 피해버렸던 그 우상과 무거운 짐을 자기들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이집트인들도 그랬지만, 반대로, 이집트를 빠져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래 자기 것으로 만들어 더 멋지게 사용했던, 배, 금은 장신구, 의복 등을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아니라 신의 명령대로 그렇게 했던 것이며, 이집트인들도 자기들도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자기들이 잘 사용하지 않고 있던 것을 그들에게 제공했던 것이다.57)* 마찬가지로, 모든 이교적인 학문들은 다, 허위적이고 미신적인 환상과, 헛된 노력만 요구하는 짐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도 아래, 그런 것들을 거부하고 피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반 학문들 중에는, 매우 유용한 도덕 교육이나 유일신에 대한 경배와 관련되는 지식 등, 진리에 대한 봉사와 합치되는 자유교양학과들이 있다. 그런 부분들이야말로, 이교도들이 가진 보화들이다. 그러나, 그것들 역시,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신의 영토, 신의 광산에서 그들이 캐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 보화들을 악마에게 경배하기 위해 타락되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남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런 사람들과의 비열한 우정을 용기있게 끊어 버리고 그들로부터 그것들을 빼앗아 와서 복음 전파를 위해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옳다. 그들의 의복도 마찬가지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인간과 인간을 연대하는, 이 세상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모든 제도들도, 그들로부터 가져와서 소유하는 것이 옳다.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기독교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선하고 신앙심이 돈독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해왔던 그대로이다. 훌륭한 교사이자 축복받은 순교자였던 싸이프러스 사람들이 이집트를 벗어나올 때, 얼마나 많은 금은보화와 의상들을 짊어지고 나왔던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것은 빅토리누스, 옵타누스, 힐라리 등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구나 말할 것도 없다.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고, 그들 누구보다도 앞서서, “이집트의 모든 지혜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이 배웠던 사람”이라고 기록되었던 모세까지도 그러했다(사도행전 7:22). 이교도들은 그 미신적인 관습 때문에, 그러한 지식들을 배우면 유일신을 경배하게 되고 그 헛된 자기들의 우상을 경배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의심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것을 유익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학문에 근접하지 못하게 저지당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러한 형편은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의 멍에를 발로 차고 기독교들을 박해할 당시에는 더욱 심했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나갈 때, 자기들의 금과 은, 의상들은, 그것들이 그리스도에게 얼마나 큰 봉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들에게 내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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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기독교 교육론?, ⅱ, 28-32
47).* Genethliaci는 문자 그대로는 “생일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Mathematici는 수학자였고, 후에 일반적으로 “점성가”로 불리었다
48)* .? 기독교 교육론 ?, ⅱ, 36.
49) ?기독교 교육론 ?, ⅱ, 38-42..
50)* ?요한복음?, 2:19-21 : “예수는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이 사원을 무너뜨려 보시오. 나는 사흘 만에 그것을 다시 세울 것이니.’라고 하셨도다. 그러자, 유태인들은, ‘이 사원을 짓는데 46년이나 걸렸는데, 당신은 3일 만에 다시 짓겠다는 것이요?’라고 하였더라.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말씀하신 사원은 곧 주님의 신체를 뜻한 것이었도다.”~
51) ?기독교 교육론?, ⅱ, 44-45..
52) ?기독교 교육론,?, ⅱ, 47-50
53)* ?고린도전서1, 15:13-14 : “죽은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는 살아나지 않았을 것이리라. 그리스도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설교는 모두 거짓이고 너희의 믿음도 모두 헛것이니라.”
54) . ?기독교 교육론?, ⅱ, 54
55) ?기독교 교육론?, ii, 56-61
56)* 버어질(Vergil)의 Aeneid 1, 두번째 줄에서 그는 “Italia"의 첫 모음을 짧게 하지 않고, 길게 하고 있다.
Arma virumque cano, Troiae qui primus ab oris Italiam fato profugus Laviniaque venit litora
“Nequid nimis” Terence, ?Andria, 1막 1장, 34
57)* ?출애굽기?, 12: 35-36 “그리고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모세의 말에 따라, 이집트인들에게서 금은보석과 의상을 얻어왔다. 예수께서 이집트인 보는 앞에서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어, 그들이 필요한 대로 모든 물건들은 가져오게 하였더니, 그들은 이집트인들의 물건을 거의 다 빼앗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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